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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 주거 복원에 대하여

2007-08-11 00:00:00
조회 2609
안녕하세요. 청동기시대 연구자인 안재호입니다.
청동기시대의 가옥 모습에 대하여 오래전부터 궁리하면서 느낀 점을 적어 보겠습니다. 특히 가옥의 외관을 이루는 지붕과 벽체에 대한 저의 고증없는 잡상입니다.

청동기시대의 주거가 복원되어 유적지에 세워둔 것을 여럿 보아 왔습니다. 회원 여러분들께서도 보았을 것입니다만, 제가 최근에 본 것은 고창 지석묘유적과 부여 송국리유적의 가옥 복원입니다. 송국리유적의 예는 발굴30주년 기념심포지움 때이기 때문에 최근래에도 이러한 복원안을 상정하는 연구자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즉, 대체로 처마가 지상에서 떨어져 벽체가 높이 솟아 오른 구조물입니다. 지붕은 물론 수직의 지상벽체에도 볏짚을 사용하여 엉성하게 지워진 가옥입니다.

두가지의 의문입니다.
1. 수직의 지상식 벽체가 있었는가?
2. 볏짚의 사용이 가능하였는가?

첫째,  벽체는 흔히 교과서나 개설서에도 지상식으로 복원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북한지역의 청동기시대 가옥의 연구에서는 수혈벽 가까이에 기둥구멍이 발견되므로, 지상의 벽체를 상정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것은 아마도 고건축학자들의 단순한 도면만을 참고한 복원도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수혈식주거라는 것이 그 당시 기후조건의 영향이 컸을 것이라 생각하여 가옥의 실내 온도를 유지하기 위함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지상식의 벽체는 이러한 의도와는 상반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는 미숙한 가구(架構)의 구조로 인하여 지상식의 벽체를 만들기에는 시기상조였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우리는 최근 수많은 주거지의 발굴을 통하여 주거내에 매몰된 토양의 층위조사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학생들과 함께 또는 울문연의 직원들과 함께 조사한 주거지의 내부 그것도 최하층에 해당하는 벽면 가까운 바닥에서 생토에 가까운 부식되지 않은 흙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당시 문화층이었다고 생각되는 검은 부식토 아래에 놓여 있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이 때문에 주거지 벽면과의 구분도 어려운 경우도 있고, 잘 못 발굴하여 주거지 벽면에 설치한 기둥이 흡사 본래의 벽면을 반정도 파고 박혀있는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기둥을 설치하더라도 주거지 벽선을 따라 기둥의 절반만 벽면에 박히도록 설치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이 기둥이 박힌 자리에 생토성분과 구분이 어려운 매몰토로 인한 착오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 벽면에 설치된 기둥의 구멍은 대부분이 그다지 깊지 않은 상태이고 그 숫자가 많습니다. 따라서, 서까래를 받칠만큼의 구조물은 아니고 그 숫자가 많아서 오히려 직선적으로 각 기둥을 연결하지 못하여 지붕가구에도 오히려 어려움이 더 많아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이 기둥구멍은 수혈벽면에만 세운 판자나 횡적한 통나무(?) 또는 초본류나 가는 나무가지로 엮은 발같은 것을 지지하였던 버팀목에 불과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수혈벽면은 경사져 있는 것이 당연한데, 이 지지목의 기둥을 직립으로 세우면 수혈벽면과의 사이에는 단면 역삼각형의 빈공간이 생기고 이곳을 굴착시에 퍼올려진 생토를 다시 충전하게 됩니다. 그리고도 남는 생토성분의 흙들은 주거지 어깨선 주위에 제방처럼 둘러져 주제(周堤)를 이루고, 이곳에 서까래가 꽂히게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최근의 여러 발굴에서 이런 지붕구조로서 복원되는 경우도 보이고 있습니다.
   한편, 중서부지역의 구릉지에서 다수가 발견되는 송국리형주거에서도 이러한 예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 지역 주거의 토층양상을 현장에서 실견한 예는 적지만, 관창리유적의 원형주거지에서는 생토성분의 흙이 주거지 바닥과 수혈의 1/3가량 덮여 나오는 것을 목격한 적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인식하지 못하였지만, 이것은 주거지 어께선 주변에 설치되었던 주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상부에 부식토와 각종 유물이 출토되는 것은 그 당시의 문화층이 유입된 결과라고 보고 싶습니다. 송국리형주거에 이러한 양상이 두드러진다면, 이 시기 한랭하였던 기후를 극복하기 위해 더욱 깊은 수혈을 조성한 까닭일 것입니다.   

둘째, 지붕을 잇는 자재로서 짚의 사용에 대한 의문입니다.  짚을 이용할려면 우선 짚단으로 묶을 수 있어야한다고 생각하는데, 짚단은 아무래도 지금처럼 모심기를 통해 여러 포기를 묶어 심는 방법을 통하지 않으면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청동기시대에는 석도로써 수확하는 것이 통상이고, 이것은 벼이삭을 동시 한꺼번에 수확이 불가능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벼 품종이 동시에 수확할 수 없는 미분화된 상태의 품종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벼 씨앗을 직파하여 자란 논이나 밭에 수확기가 되면 매일 나가서 벼이삭을 꺾어 오게 됩니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잘 알려진 일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이미 다른 벼포기에 비해 먼저 수확된 벼포기는 경작지에서 말라 넘어지기도 하고 밟히기도 하여 사용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모든 벼포기가 다 수확된 뒤라 하더라도 볏짚을 이용하기 위해 뿌리 가까이에서 자르기도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짚단으로 묶을 수도 없는 상황일 것입니다.
   일본의 농가에는 갈대나 억새와 같은 초본류로 지붕을 잇고 있습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 농가의 탐구를 위해서 어느 일본의 공학대학에서 이러한 원시적일 것 같은 지붕이 방수에 뛰어난 구조적 실험을 시행하는 것을 보았습니다만. 갈대와 같은 것은 그 내구성이 강하기도 하지만 균등한 굵기로 쌓여 있기 때문에, 단면을 자른 상태에서 보면 갈대와 갈대 사이에는 작은 삼각형의 틈이 생기게 됩니다. 비가 오게 되면 상부의 3-4겹째에는 물에 젖게 되지만, 그 아래로는 더 이상 빗물이 갈대의 표면장력으로 인하여 5-6겹째에는 물방울이 맺힌 상태에서 더 이상 침투를 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이 갈대지붕의 놀라운 과학이라는 점입니다.
   우리의 초가 지붕에도 서까래 위에는 갈대나 억새 띠 또는 가늘고 속이 빈 긴 삼줄기 등으로써 지붕을 이었습니다. 역시 일본 전통농가의 누수방지의 비밀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속이 빈 이런 초본류는 무게도 가볍다는 잇점이 있습니다. 볏짚을 이은 것은 단지 외관을 위해서 매년 갈아둘 뿐인 것입니다. 볏짚은 줄기의 이용이 매우 량이 적고 단단하지도 못합니다. 그리고 벼잎이 붙은 상태로 이용되는 것이 보통이므로, 볏짚 전체가 물에 젖어 누수를 막지 못하는 역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한가지는 벼를 재배한 논이나 밭이 청동기시대에 과연 취락전체의 가옥마다 볏짚을 이용할만큼의 면적을 발견할 수 있는가하는 점입니다. 저는 송국리단계라 하더라도 벼의 재배는 매우 제한적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러한 검증은 주거지 내에서 갈대류의 식물유체를 확인하는 작업이 따라야겠습니다만, 저는 특히 일본열도의 농경문화를 우리의 송국리문화의 영향이라는 주지의 사실을 주목한다면, 일본 야요이 가옥의 구조도 우리나라 송국리문화단계의 가옥구조를 그대로 답습하였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싶습니다. 일본문화가 한국문화와 다르다고해서 이것마저도 다르게 복원되어 오히려 한일농경문화의 전파와 영향력을 왜곡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담입니다만, 저는 학생들과 학교캠퍼스 운동장에 4주식의 방형수혈주거를 복원한 적이 있었습니다. 10년전의 일이라 저도 지붕은 볏짚으로 이었습니다. 밤마다 화덕에 둘러 앉아 술도 마시고 학생들의 기타반주에 노래도 했지만...문제는 축제가 끝나고 폐기할 때의 일입니다. 불을 질러 폐기하여 수년 후에 다시 발굴할 계획이었는데, 지붕에 불을 놓자 무수히 뛰쳐 나온 것은 다름아닌 쥐였습니다. 우리가 수혈의 움집 벽에 등을 대고 앉았던 그 뒤에는 쥐들도 짚단속에 서식처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래도 가옥의 요건에는 어울리지 못하는 상황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취락의 이동원인을 중국소수민족들의 예를 빌리면 농경지의 피폐와 위생환경의 악화와 전염병의 창궐 등을 들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상으로 복원된 청동기시대 가옥의 외관은, 거대한 묘역을 가진 송국리문화단계의 묘역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에 상응하는 위용의 가옥으로 재현될 것입니다. 상당한 두께를 가지며 아주 조직적으로 탄탄한 지붕모습이며, 실내에 들어서면 잘 다듬어진 나무판자가 수혈벽면을 둘러싸고 주제에 박힌 서까래와 수혈어깨선 사이에는 또다른 수납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는 멋진 그리고 나무향이 가득한 청동기시대의 가옥 복원을 기대해 봅니다.

저의 잡념을 장황히 늘어 놓았습니다.
안녕히

안재호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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