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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상리 고분

2002-08-2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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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대학교 박물관에서는 1994년과 1997년 두 차례에 걸쳐 여주군 여 주읍 상리고분군과 주변 유구에 대해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 과, 94년에는 통일신라시대 고분 7기와 조선시대로 추정되는 토광묘 1 기가 조사되었고,. 97년에는 구릉부의 정상부에서 유실된 주거지 1기 와 통일신라 석곽 10기가 조사되었다. 1. 1994년도 조사 이번 상리 고분군의 발굴에서 조사된 고분 중 1호분은 석실분으로 중 앙에 羨道가 달리고 屍床 양측에서 石枕이 각각 1개씩 발견되었다. 또 한 석실 내부 바닥에서 統一新羅의 특징적인 토기인 印花文 有蓋小壺 의 뚜껑이 한 점 발견됨으로서 이 고분의 축조시기와 주체는 통일신라 로 판명되었다. 그러므로 1호분에서 출토된 형식의 석침과 같은 유형 의 석침이 출토된 고분은 통일신라시기의 고분으로 편년이 가능하게 되었다. 따라서 翰林大學校 博物館에서 1987년도와 1988년도에 발굴 한 매룡리의 고분 가운데 屍床위에서 석침이 발견된 고분이 모두 統一 新羅 무덤이다. 즉 본 발굴을 통하여 상리를 포함한 여주군 일원의 고 분군 안에는 전부는 아니더라도 통일신라의 무덤이 主流를 차지하고 있음이 밝혀지게 되었다. 나아가서 이러한 統一新羅의 무덤과 동일한 群안에서 발견된 무덤구 조나 出土土器의 면에서 性格과 所屬이 애매했던 石槨墳들도 統一新羅 期의 中央羨道 石室墳과 同日時期의 무덤일 可能性은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中央羨道 石室墳으로부터 작은골 하나를 사이에 두고 동쪽에 서 調査된 2號墳과 3號墳은 小形의 石槨墳과 이로부터 산쪽으로 불과 30m위에 있는 弧狀列石을 두른 4號 石槨墳은 기본적으로 竪穴式石槨 에 해당한다. 이들은 우선 무덤구조에서 中央羨道 石室墳과 다르고, 出 土된 土器들도 小形의 단지와 병류로서 印花文 有蓋小壺보다는 製作技 法과 質과 硬度의 제측면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유구 중복 의 흔적이 나타나지 않았고 유물도 시기적인 차이를 찾을 수 없었다. 따라서 이러한 차이를 축조시기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기는 어려운 것 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차이는 石槨墳에 埋葬된 사람의 身分 이 中央羨道 石室墳에 埋葬된 사람보다 낮거나, 혹은 양 무덤의 시기 나 계통이 다른 데서 그러한 構造와 遺物의 差異가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石槨墳과 中央羨道 石室墳이 한 곳에 分布하는 사실과 頂上部의 호상열석을 지닌 4號石槨墳 안에서 출토된 小形壺의 硬度와 製作手法이 中央羨道 石室墳 안에서 출토된 印花文 小壺의 뚜껑과 동일한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이번에 發掘된 모든 古 墳은 統一新羅의 것으로 볼 可能性이 現在로선 제일 크고 하겠다. 한편 Trench안에서 發見된 朝鮮時代의 土壙墓는 바닥의 中央部에 구 멍을 파고 그곳에 흑색단지 한개를 안치한 것인데 이 시기 장법상의 독 특한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안치된 흑색도기는 제작수법이나 형태면에서 조선시대 중기 이후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므로 도기가 출토된 분묘의 시기도 조선시대 중기 이후로 보아야 할 것이다. 2. 1997년도 조사 97년도 조사에서는 시굴조사지역에서 파괴된 무문토기 주거지 1기가 조사되었고, 고분은 소형석곽분 10기가 조사되었다. 1) 시굴조사 해당지역 전체에 대한 전면적인 탐색을 실시한 결과, 현재 경작지로 사 용하는 지대에서는 소수의 무문토기편이 발견되었고, 구릉 정상부에서 는 소수의 석기와 파괴된 무문토기 주거지 1기가 확인되었을 뿐 고분 의 흔적은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구릉 정상부의 경우 원래는 무문토 기 주거지가 더 존재하였을 것으로 보이나, 오랜 세월에 걸친 침식작용 으로 인하여 모두 인멸하여 버렸으며, 1기의 파괴된 주거지가 벽선이 거의 깎여 나간 채, 바닥면 윤곽만이 일부 살아서 잔존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골짜기 저지대의 밭에서 발견된 무문토기편들은 이러한 구릉지 대 주거지에서 흘러내려 간 것으로 판명되었다. 시굴지역은 현재의 남한강변에서 불과 300여m 거리이며, 지형적으로 는 강변의 충적대지로 이어지는 야산자락의 끝 부분에 해당한다. 따라 서 입지조건은 유적의 입지에 적당하지만 조사 결과 고분은 전무한 것 으로 밝혀졌고, 무문토기 주거지가 구릉선을 따라서 존재하였던 것으 로 보이지만 모두 침식으로 인멸되었고, 단지 소형 1기만이 그 바닥면 에 가까운 윤곽을 남기고 있을 뿐이었다. 이 잔존주거지 외에는 조사 의 방식과 범위로 판단할 때 이 일대에는 더 이상의 유적과 유구는 없 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2) 고분발굴조사 적은 범위(약 500평)에서 비교적 많은 수인 10기의 유구가 발견되었 다. 그러나 모두 통일신라의 석곽으로서는 규모와 수준이 낮은 급에 속 한다. 또한 석곽 2기를 제외한 모든 석곽이 이미 완전히 도굴되어 한 점 의 유물도 남아있지 않았고, 구조도 상당히 교란된 상태로 남아있었 다. 현장주민들의 정보에 의하면 이 일대는 60∼70년대에 도굴꾼들이 상주 하면서 샅샅히 파헤친 지역이고, 이 과정에서 남은 것으로 보이는 도굴 꾼의 꼬챙이 구멍이 석곽 주변의 여러 곳에서 확인되었다. 이 고분들은 출토토기의 수준과 석곽의 규모로 볼 때 통일신라기에 조 성된 이 지역 일반주민들의 공동묘지의 일부로 추정되는데, 이번 발굴 에서 나타난 주목할 점 하나는 소아용으로 보이는 소형 석곽이다. 이러 한 소형 석곽이 성인용 석곽의 주변에서 함께 발견되는 사실은 이 일대 가 공동묘지인 동시에 가족묘지였음을 보여준다. 이곳에서 조사된 고분의 축조 시기 및 주체에 대해서는 상기한 바와 같이 논란의 여지를 가지고 있다. 본 보고서에서는 조사에 의해 제시 된 기초적인 자료만을 가지고 이에 대해 간단한 고찰만을 시도한 것이 다. 그러므로 이 보고서에 제시된 결론은 상당부분 논란의 대상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본 보고서가 발간됨으로서 학계에 여주 일원 의 고분 중 하나의 자료가 추가 되는 것이 되므로 이러한 논란에 대해 서는 관심있는 연구자에 의해 좀더 심도있는 분석과 결론이 내려지기 를 기대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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