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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

양주 대모산성

2002-08-20 00:00:00
조회 2716
1995년 제 6차 조사와 1998년 제 7차 조사시 동문지와 서문지, 그리 고 그 주변에서 지표수습되거나 출토된 토기류는 크게 뚜껑, 고배(高 杯), 대부발(臺附鉢), 대부완(臺附 ), 합(盒), 완( ), 발(鉢), 병(甁), 호(壺), 동이(盤), 시루 등 주요 11종과 기타로 처리된 기대, 벼루, 손잡 이편 등이 있다. 이와 같은 분류는 보고자의 임의에 따라 각 토기의 용 도별로 분류한 것이므로, 연구자의 개념 차이에 따라 일부 조정될 여지 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밖에 '德部', '德部舍, '富部' 등의 명문이 양각된 기와편과 청자 편, 백자편이 발견되었으나 수량이 적어 대모산성과의 직접적인 관련 성 여부는 파악하기 어렵다. 추가조사를 통해 자료가 보다 축적되어야 만 대모산성의 축조와 운영양상을 밝히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화살촉, 낫, 도자, 못, 차관 등 많은 철제 유물이 출토되었는 데, 제일 많이 출토된 철제 유물로 1995년 조사(동문지)와 1998년 조사 (서문지)에서 총 143점(동문지 56점·서문지 87점)이 수습된 화살촉을 들 수 있다. 대개 표면 부식과 표면 탈락이 심한 편으로, 이 중에서 촉 두와 촉신이 결실되어 원형을 알 수 없는 60점(동문지 24점·서문지 36 점)을 제외한 나머지 83점(동문지 32점·서문지 51점)은 촉두의 평면형 태와 단면형태에 따라 구분할 수 있다. 그렇지만 대부분 교란층 퇴적토 에서 출토되었으며, 반출 유물도 일관성이 없기 때문에 철촉의 형식으 로 편년과 기능을 단언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문지의 외곽 구조는 이미 조사된 북문지와 비교해 동문지와 서문지 모두 크게 다르지 않다. 즉, 3개 문지 모두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문지 의 개념처럼 지표면에 설치된 것이 아니다. 외부에서 보았을 때, 성벽 중간에 凹자형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사다리 등의 보조 시설이 없으 면 출입이 불가능한 구조이다. 수성 전략상 가장 취약한 성 구조물 중 하나가 바로 문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확인된 3개 문지가 모두 凹자형 구조라는 사실은 양주 대모산성의 군사적 성격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는 부분이다. 동문지 체성 내벽은 생토를 판 후 비교적 큰 할석을 막쌓기하여 축조 하였으며, 廻郭道로 추정되는 체성 내벽을 따라 형성된 체성 내벽 아래 의 황갈색 사질토 흔적도 조사되었다. 그리고 문지 서남쪽, 성내에서 석축이 노출되면서 이와 함께 생토면을 파고 형성된 큰 구덩이의 존재 가 확인되었다. 석축은 그 끝을 확인하지 못했지만 이 구덩이를 감싸 는 형태로 보이며, 현재 확인하지 못한 서측이 추후 조사되면 구덩이 가 지금보다 더 커질 가능성이 높다. 구덩이 바닥에 점토층이 형성되 어 있지만 그것이 뻘층이라고 표현될 정도는 아니라는 점에서 물이 오 래 고여 있는 저수지라기보다는 흘러내려오는 물을 임시 저장하면서 다시 흘려보내는 집수지의 성격이 더 강한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생 토를 파고 만든 작은 구덩이가 동문지 주변 성내에서 여럿 확인되었 다. 내부에서 약간의 토기편과 와편들이 출토되었지만 용도에 대해서 는 명확히 언급하기 어렵다. 동문지 체성 외벽은 잘 다듬은 장방형 석재를 品자형으로 단을 맞추 며 비교적 수직에 가깝게 쌓아올렸다. 그리고 체성 외벽 외곽에는 체성 과 비슷하거나 약간 작은 크기의 장방형 석재로 쌓은 보축이 있는데, 체성 외벽의 구조는 이 보축 때문에 자세히 확인하기 어렵다. 체성 외벽 외곽의 보축도 잘 다듬은 장방형 석재를 이용하여 축조하 였다. 바닥에는 고운 황갈색 사질토를 단단하게 다지고, 그 위로 바닥 의 2단은 비교적 큰 석재를 놓고 그 위로는 보다 작은 석재들을 조금씩 뒤로 물리며 쌓아올렸다. 이러한 경사도라면 보축의 상단은 문지 바닥 면 정도의 높이에 맞닿을 것으로 보인다. 보축 성벽의 뒷채움은 크고 작은 잡석과 황갈색 사질토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서문지 바닥은 동문지에 비해 상당히 교란된 상태이지만 문지 남·북 측벽 부근의 잔존 상태를 보면 정연하지는 않아도 크고 작은 판석형 할 석들을 깔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바닥 중앙에서는 배수로로 보이 는 유구도 발견되었다. 문지 바로 위(동)쪽 부식토층에서 둔테석이 2 개 노출되었는데, 그보다 위(동)쪽에서 굴러내려온 것이라기보다는 둔 테석의 기능상 상층 서문 시설에서 탈락된 것이라고 보여진다. 서문지 체성 내벽도 동문지와 마찬가지로 생토를 판 후 비교적 큰 할 석을 막쌓기하여 축조하였다. 그런데 남쪽 내벽 뒤(아래)에서는 비교 적 열을 맞추며 돌을 막쌓기하여 정연하게 형성한 석렬(폭 160㎝)이 노 출되었고, 북쪽 내벽 뒤(아래)에서는 할석과 흙을 채운 사실이 확인되 었다. 그리고 서문지 위(동)쪽에서 노출된 남북방향 석렬은 문지쪽으 로 토사가 밀리는 것을 막는 기능을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로 꽤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내부 유구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석렬 동쪽 을 조사한 결과, 문지와 이 석렬 사이의 공간에 비해 위쪽에서 밀려내 려온 것으로 보이는 비교적 많은 양의 토기편과 와편이 발견되었기 때 문이다. 서문지 체성 외벽은 전체적으로 잘 다듬은 장방형 석재로 단을 맞추 어 品자형으로 축성하였다. 암반층을 기저로 삼아 가장 아래에는 비교 적 큰 할석을 암반에 밀착되게 놓고, 그 윗단 즉, 2번째 단은 뒤로 약간 물려 쌓고, 3번째 단부터는 2번째 단 외벽에 맞추어 비교적 수직에 가 깝게 쌓아 올라갔다. 체성 외벽 외곽에는 체성과 비슷한 크기의 장방 형 석재로 쌓은 보축이 노출되어 있다. 문지 주변과 남쪽 보축은 바닥 에는 고운 점질의 황갈색 사질토를 다져 그 위에 비교적 큰 할석을 놓 고, 2번째 단은 뒤로 조금 크게 물려 쌓고, 3번째 단부터는 약하게 뒤 로 물리며 쌓아 올라갔다. 그런데 문지 북쪽에는 보축 외곽에 또 보축 한 즉, 2중으로 보축이 형성된 흔적이 남아있다. 안쪽 보축은 암반을 기 저로 일부만 다듬은 듯한 비교적 큰 할석을 마치 부채꼴 모양으로 외면 이 하늘을 바라보듯이 쌓아올렸다. 하단에서 9∼11단에 이르면 체성과 맞닿아 마치 체성 하단-기저부를 감싸는 모양이다. 이에 반해 바깥쪽 의 보축은 1∼2단만 노출된 상태지만 남쪽의 보축 양상과 비슷한 것으 로 보여진다. 아쉽게도 북쪽의 보축에서 문지 주변의 보축으로 이어지 는 부분이 붕괴되어 양자간의 관계를 확인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이번 1955년 6차, 1998년 7차 조사를 통해 대모산성이 삼국시대에 초 축된 이래 여러 번 보수, 개축을 거쳐 늦게는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장기간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95년 6차 조사에서 동문지와 동문지 남북 체성에서는 1번 이상의 개축 흔적이 확인되었다. 먼저, 문지를 보면 문지 외곽의 장방형 홈이 있는 장대석의 존재가 주목된다. 출입 장치의 흔적일 가능성도 없는 것 은 아니지만, 반대편에서는 이와 같은 장대석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의 석재를 문지 개축시 재활용하였을 가능성이 있 다. 그리고 체성 외벽 외곽의 보축에서도 개축의 흔적이 확인된다. 멀 리에서도 외관상 개축 흔적이 뚜렷한데, 사용된 석재의 형태나 축조 방 식에서 주변 보축과 크게 차이가 나기 때문에 보축을 처음 축조했던 시 점에서 그리 가까운 시기에 보수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일단 문지의 개축과 보축의 개축은 동일한 시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즉, 동문지의 출토 유물 양상을 보더라도 초축 이래 중단없이 계속 사용되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일부 허물어진 채 방치된 문지 와 보축을 어느 시기엔가 보수, 개축하여 사용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시점에 대해서는 명확히 언급하기 어렵다. 재사용시점에 대한 근거 로 사용할 수 있는 출토 유물들이 명확한 층위를 가지고 구분되는 것 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동문지 조사중 문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서쪽 성내에서 집수지 로 추정되는 시설이 확인되었는데, 이 집수지 석축을 따라 바닥 생토층 에서 다량의 토기들이 출토되었다. 노출 양상으로 보아 위쪽에서 흘러 내리며 한쪽에 몰리게 된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수습된 토기편 중 비교적 완형에 가까운 것도 있어서 과연 위에서 흘러내려온 것인가 하 는 의문도 있다. 이것은 차후 이 시설에 대한 추가 조사가 이루어지면 이 시설의 성격과 함께 밝혀질 문제이고, 어쨌든 수습된 토기의 양상 은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지만 그 이후에 속 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찾기 어렵다. 따라서 이 집수지의 하한은 통 일신라시대로, 약 9∼10세기로 보여진다. 이와 같은 사실들을 종합하면 동문지 일대는 통일신라시대, 약 9∼10 세기경까지 사용되다가 이후 방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후 어느 시점에 체성 외벽 보축과 문지가 보수, 개축되며 일정 기간 사용 되었다가 다시 방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문지가 마지막으로 폐기된 시점에 관해서는 동문지 바닥에서 출토된 청동방울과 13세기대로 추정되는 국화문 청자병으로 보아 일단 고려중 기 이후로 추정할 수 있으나, 서문지와 북문지와의 관계를 고려하면 조 선시대에 폐기되었을 가능성도 고려할 수 있다. 1998년 7차 조사를 통해 서문지도 문지와 체성 외벽 외곽의 보축에서 1번 이상의 개축 흔적이 확인된다. 먼저 문지를 보면 크고 작은 판석형 할석을 깔았던 하층과 90∼100㎝ 높이의 단이 지면서 성내 구지표면으 로 이어지는 상층으로 구분된다. 하층에서는 배수로 흔적도 확인되었 는데, 노출 양상으로 보면 하층 바닥과 동일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한편 성내 구지표면은 문지 상층과 이어질 뿐만 아니라 문지 양쪽의 체 성 내벽 뒤(아래) 추정 회곽도와 이어지고 문지로 흘러내리는 토사를 막기 위한 남북 석렬과도 이어진다. 따라서 서문지 주변은 배수로와 함 께 문지 하층이 방치되며 허물어진 것을 어느 시기엔가 문지와 함께 주 변시설을 크게 보수, 개축하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체성 외벽 외곽의 보축은 문지 북쪽의 축조 방식이 주변과 차이를 보 이고 있다. 문지 주변과 남쪽은 바닥에 고운 점질의 황갈색 사질토를 다지고, 그 위로 체성 외벽과 비슷한 석재를 이용하여 뒤로 물리며 쌓 아 올라갔다. 그런데 문지 북쪽에는 보축 외곽에 또 보축한 즉, 2중으 로 보축이 형성된 흔적이 남아있다. 특히, 안쪽 보축은 암반을 기저로 일부만 다듬은 듯한 비교적 큰 할석을 마치 부채꼴 모양으로 외면이 하 늘을 바라보듯이 쌓아올렸다. 이에 반해 바깥쪽의 보축은 남쪽의 보축 양상과 비슷한 것으로 보여진다. 북쪽에서 문지 주변의 보축으로 이어 지는 부분이 붕괴되어 양자간의 관계를 확인하는데 어려움이 있지만, 북쪽 안팎의 보축이 함께 이루어졌다기보다는 양자 간에 시기의 차이 가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서문지 주변에서 이와 같은 개축의 흔적이 발견되었음에도 개축시기 나 사용시기에 대해 명확한 언급을 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동문지와 마 찬가지로 시기 추정의 근거로 사용할 수 있는 출토 유물들이 명확한 층 위를 가지고 구분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대략적인 시기 추 정은 가능하다고 보여지는데, 먼저, 하층 문지 배수로에서 발견된 회청 색 경질의 통일신라시대 호형 토기 구연부가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 을 것이다. 따라서 하층 문지가 방치되며 폐기된 대략의 시점은 약 9∼ 10세기 이후로 추정된다. 다음으로 상층 문지의 상한을 추정하는 단서 로는 문지 남·북 측벽 부근에서 수습된 조선시대 백자편들이 있다. 대 략 15∼16세기로 편년 추정되는 이 백자편들은 상층 문지의 바닥면 아 래에서 출토된 것으로, 따라서 상층 문지의 상한은 약 17∼18세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대모산성의 초축 시기와 주체에 대해서 이미 1∼5차 조사 종합발굴보 고서에서는 명확히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일단 6세기 중엽 이후 신라에 의해 축성된 것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았다. 다만 성밖 북쪽 대지에 서 확인된 백제 토기 출토 저장공의 존재를 통해 축성 이전에 목책 등 일종의 방어시설이 백제에 의해 운용되었을 가능성을 인정하는 정도였 다. 이후 대모산성이 신라 산성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별다른 의문 없 이 널리 받아들여지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근래에 백제 산성에 대한 조사성과가 축적되면서 최근에는 대 모산성이 신라 산성이라는 사실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었다. 즉, 성내에 서도 삼족토기 등 백제 유물이 출토되고, 보축 방식도 신라 산성 뿐만 아니라 백제와 고구려 산성에서 발견되고 있다는 점을 들어 대모산성 이 백제 산성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사실 1∼7차에 걸친 대모산성 발굴조사 과정에서 백제계 내지는 백 제 토기로 볼 수도 있는 토기편들이 일부 발견되고 있다. 또, 그 동안 신라 산성의 근거로 제시되었던 보축의 존재나 일부 축성 방식도 백제 산성이라고 지적되는 산성들과 비견될 만한 부분들이 있다. 따라서 백 제에 의해 대모산성이 초축되었다는 주장이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쉽게 어떠한 결론을 내리기에는 좀 더 숙고해야할 부분들이 남아 있다. 왜냐하면 산성 밖 북쪽 대지의 구덩이에서 출토된 백제 토기를 근거로 목책, 토루 등의 방어시설이 존재했을 가능성은 이미 제시된 바 있다. 백제계 또는, 백제 토기가 존재한다고 해서 대모산성의 초축 이 백제에 의한 것이었다고 단언하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 다. 목책, 토루 등의 군사시설과 관련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대모산성의 초축 주체 문제는 성곽 자체에 대한 조사 성과를 기 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재 이루어진 조사는 각 문지 주변 일부에 불과하고, 조사가 이루어진 부분만으로는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어려운 형편이다. 따라서 대모산성의 초축 시기와 주체 문제에 관해서 는 산성 전체에 대한 추가 조사가 이루어지고, 타지역의 삼국시대 산성 에 대한 조사 성과가 좀 더 축적될 때까지 단정적인 결론을 유보하고 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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