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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院里고분군

1999-11-30 00:00:00
조회 1031
< 유적의 연대 > 용원리 고분군은 토광묘와 수혈식 석곽묘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출토유물의 개략적 형상, 즉 토기나 철기의 갖춤새 로 미루어 백제유적으로서, 그것도 비교적 이른 시기의 것 이란 추정은 쉽게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좀더 구체적 연대 관의 제시는 심층적 분석이 요구된다. 그러나 용원리 고분 군과 관련 절대년대를 추정할 수 있는 자료는 많지 않다. 1 호 석실분에서 수습된 작은 조각의 인골편이 있어 이를 토 대로 탄소년대 분석을 시도한 결과 오차가 크게 나타나지 만 대체로 4세기 중반의 것으로 편년할 수 있는 정도이다. 그리고 137호 토광묘와 겹쳐 있는 주거지내에서 수습된 시 료를 토대로 내려진 炭素년대는 중심년대가 300년대 전후이 고 여기에 오차범위를 약 60년정도 가감하는 것이 전부이 다. 이외에 9호 석곽묘 출토의 계수호는 그것이 중국 東普 製라는 점에서 적어도 9호 석곽묘의 축조시기가 5세기까지 는 내려오지 않는다는 추정이 용원리 유적에 대한 절대연대 를 판단할 수 있을 뿐이다. 몰론 여기에 흑색마연토기라던 가 각종의 토기도 대비될 수 있겠지만 이들은 어차피 비교 연대에 불과할 뿐이다. 용원리 고분군의 편년에 활용될 수 있는 자료는 위의 절대 연대 추정자료와 이외에 교차편년에 활용될 수 있는 자료들 도 편년관의 마련에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그에 따르면 우 선적으로 이 유적이 중심연대가 4세기 중반에서 후반에 둘 수 있다는 것은 쉽게 추정되는데 문제는 이 유적이 조성된 시간 폭이다. 앞에서 살핀 것처럼 용원리 유적은 다량의 분 묘가 군집된 유적이다. 이 유적이 일시에 조성되었다고 보 기는 어렵고 상당한 시간폭을 두고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 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범위인데, 출토유물에서 시 간 폭을 크게 잡을 수 있는 요소가 많지 않고, 개별 고분 의 조성이 매우 규칙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미루어 유적 의 조성시기가 상당한 기간이었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은가 생각된다. 용원리 고분군의 중심연대를 4세기 후반으로 보면서 그 시 간 폭이 크지 않을 것이란 사실은 다음과 같은 이유도 있 다. 이미 살핀바 있지만, 9호 석곽묘 출토의 黑釉 鷄首壺 는 그것이 東普製이면서 전수기간을 고려하여도 4세기말경 을 넘지 않는 것으로 볼 수 있음을 보았다. 그리고 9호 석 곽묘의 출토품의 주종을 이루는 토기를 보면 토광묘 출토 토기와는 다리 口脣에 장식적 의도가 있어 이를 후행의 요 소로 보고 9호 석곽묘가 유적내에서는 상대적으로 늦은 시기의 것으로 볼 수 있는 점에 근거한다. 더불어 백제 유 적중에 5세기 이후가 되면 일반적으로 출토되는 기대, 고 배, 삼족토기, 개배와 같은 백제의 전형적 토기가 이 용원 리 유적에서는 없다는 점은 이들 유적이 5세기대로는 내려 오지 않는다는 근거로 보는 것이다. 한편 상한에 대해서는 4세기 중반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 것으로 보는데, 물론 이를 입증할 수 있는 자료는 많지 않 으나, 137호 토광묘와 겹쳐진 주거지의 년대가 대체로 300 년대 이후로 보아야 하는 점, 기왕에 천안지역에서 조사된 청당동 유적이 3세기말 혹은 4세기 초반으로 편년 됨에 비 추어 이들과 대비될 수 있는 유물이 거의 발견되지 않고 나 아가 4세기 초반으로 편년되는 천안 두정동의 유적과도 대 비되는 유물이 거의 없는 점에 근거한다. 때문에 이 용원 리 고분군은 적어도 4세기 중반에서 시작되어 4세기 말경까 지 50~60여년간에 조성된 것이 아닌가 추정하는 것이다. 물 론 이러한 연대관은 4세기 후반이 중심 연대일 것이란 사 실 외에 자료의 증가에 따라 상한과 하한은 충분히 수정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개별 유구간의 연대는 일단 토광묘 보다는 석곽묘가 후행하는 것으로 보지만 분포상으로 보아 토광묘의 사용 중간기에 석곽묘가 사용되었고, 이것이 마지 막 단계까지 병용된 것으로 보는데 이는 추후 검토가 필요 한 사항이기도 한다. 용원리 고분군은 4세기 후반대 차령산맥의 언저리에 그것 도 대규모의 형태로 존재한다. 고분의 부장품에서 어디에 견주어도 결코 손색이 없는 위세품도 적지 않다. 물론 이러 한 자료는 4세기대 천안의 동남부 지역에 이들 유적을 조영 할 수 있는 집단이 존재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 인 근의 화성리 고분군이나 그리 멀지 않은 청주의 신봉동이 나 오창의 주성리 등지의 고분군이 용원리 유적의 고분군 과 동일시기, 혹은 연계선상에 있는 것으로 판단되는 바, 이들 고분을 조성한 집단들은 비교적 대규모의 집단사회였 을 것으로 추정하기 어렵지 않다. 그리고 출토된 유물에서 금동제 용봉문환두대도나 흑색 마연토기, 그리고 중국제 흑 유 계수호 등은 그 존재자체가 이에 피장된 자들이 입지가 결코 범상치 않음도 암시한다. 문제는 이들이 백제의 중앙 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의 문제일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 들 威勢品이 백제의 중앙과 관련된 것인가, 아니면 독자성 이 있는 것인가의 판단이 우선되어야 할것이나, 아직 백제 의 중앙지역에 그와 비교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아쉬 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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