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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소식

평택 관방산성 시(발)굴조사 지도위원회 개최

2004-05-19 15: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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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조사개요 1. 조사지역 : 평택시 안중면, 청북면, 현덕면 일대 5개 관방 유적 (무성산성, 자미산성, 비파산성, 용성리성, 덕목리성) 2. 조사기관 : 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 3. 조사기간 : 2004년 3월 12일∼20043년 5월 20일 현재까지 4. 조사단 구성 지도위원 : 최영희(한림대학교 석좌교수) 조유전(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정영호(단국대학교 석좌교수, 동교 박물관장) 장경호(기전매장문화재연구원장) 김동현(전통문화학교 석좌교수) 최몽룡(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단 장 : 박경식(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장) 조사위원 : 차용걸(충북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장준식(충청대학 교수, 동교 박물관장) 책임조사원 : 서영일(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 연구교 수) 조 사 원 : 김철웅(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 상임연구 원) 엄기표(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 연구원) 조사보조원 : 방유리(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 연구 원) 김호준(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 연구원) 정성권(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 연구원) 보 조 원 : 이재설(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 연구원) 최문환(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 연구원) 강형웅(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 연구원) 5. 조사목적 아산만과 남양만 일대는 일대는 서해의 요충지로 삼국시대 이후 군사 적으로 중요시되어 왔던 지역이었다. 삼국시대에는 삼국 간에 해상권 을 장악하기 위한 치열한 항쟁이 펼쳐지던 곳이었고 통일신라시대에 는 남양만에 위치한 국제무역항 당항진의 배후기지로 중요시되었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경기만 일대 해안 방어상의 요지로 주목 되었고, 특히 고려말 조선초에는 왜구의 피해가 심하여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듯 다수의 성곽이 아산만과 남양만 일 대에서 확인되고 있다. 이번 조사가 실시되었던 평택 서부 지구의 5개 성곽도 그 중 일부에 해당된다. 삼국시대 이후 아산만 일대의 해안 방 어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 성곽들로 주목되어 왔다. 원래 이 성 들에 대해서는 1998년∼1999년 동안에 경기도박물관에서 정밀지표조 사를 실시한 적이 있다. 그 결과 각 성의 규모, 시설물 등이 조사되었 고 다량의 유물로 수습되어 대략적이나마 축조 및 사용시기, 성격 등 에 대한 파악이 가능하였다. 최근 평택 지역은 평택항 개항, 서해안 고속도로 및 안중-평택 고속도 로 개통, 국도의 확장 공사 등 수륙 교통의 중심지가 되면서 공단과 도 시가 계속 확대되는 등 지속적으로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번 조 사 지역은 그 중에서도 가장 급속도로 개발이 이루어지는 지역이다. 이 번 조사 지역 서남쪽에는 신도시가 들어서고 동쪽에는 현곡 공단 등 공 단 부지가 개발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 과정에서 주변의 야산들도 사라 져가고 있다. 더구나 이번 조사 대상 성곽의 경우에도 일부 성들은 성 벽 바로 아래까지 각종 시설물이 들어서 있다. 심지어 성벽을 삭토하 고 송신탑을 세우거나 중장비를 동원하여 성내부나 성벽을 굴착하고 분묘를 조성하는 등 유구의 훼손이 점점 확대되어 가고 있었다. 그대 로 둔다면 앞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성벽의 흔적은 물론 심한 경우 성 의 흔적이 완전히 없어질 위기에 처하여 있다. 평택시에서는 급속한 개발 과정에서 더 이상 유적이 훼손되는 것을 막고 정비 및 보존 대책을 수립하기 위하여 이번 조사를 계획하였다. 이미 지표조사가 실시되었던 적은 있으나 이것만으로는 보존대책 및 문화재 지정에 미진한 부분이 있어 구체적인 자료를 수집하고 그에 따 른 정비 및 보존 대책을 수립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각각의 성곽에 대 한 시굴조사를 실시하여 이에 대한 기초 자료를 수집하고자 하는 것이 었다. 우리 연구소에서는 평택시의 의뢰를 받아 이상의 문제점을 고려 하여 다음과 같은 점에 주안점을 두고 조사에 임하였다. 첫째 대상 유 적 모두 중요한 지점을 선택하여 시굴조사를 실시하고 이를 통하여 축 조시기 및 활용문제를 규명하여 본다. 둘째, 성벽에 대한 구조 조사를 실시하여 축조 방법을 파악하고 향후 정비 및 복원의 기초 자료를 확보한다. 셋째, 조사 내용을 바탕으로 문화재 지정여부를 판단함은 물론 향후 활 용 방안을 포함한 정비 계획안을 제시한다. 넷째, 조사 결과 학술적 중요성이 큰 유적에 대해서는 향후 정밀 발굴 조사 계획을 수립한다. Ⅱ. 무성산성 1. 유구 가니구에서는 내성벽의 절개 트렌치를 통해 성벽과 排水溝의 축조 방 식을 짐작할 수 있었다. 먼저 성벽의 경우 동쪽의 정상부에서 흘러 내 려오는 편마암계통의 암반을 다듬어 성벽을 축조할 자리를 마련한 다 음, 그 위로 점토를 깔아 평탄하게 기저부를 만들었으며, 이 때 내벽에 인접하여 排水溝를 조성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기저부층 위로는 모 래와 암반부스러기를 섞어 넣어 성벽을 축조하였고, 사이사이에 점토 와 모래를 다져 강도를 높였다. 성벽의 전체 규모는 하단 폭 13m, 상단 폭 1.8m, 높이는 외벽 3.5m, 내벽 2.3m 정도이다. 이러한 규모는 후에 성벽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Ⅱ층이 성벽을 덮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 되며, 초축 당시의 성벽 규모는 외벽까지 조사를 한 후에 좀 더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내벽 앞에 있는 排水溝는 동서 폭 약 3m, 깊이 50∼70cm의 규모로 확 인되었다. 바닥에서는 암반 면은 인위적으로 깍은 흔적이 발견되고 있 다. 나지구도 성벽 시굴조사였다. 구조는 북치성과 차이가 없었다. 암반 을 평평히 한 위에 기저부를 형성하고, 기저부층 위로 가지구의 성벽 과 마찬가지로 자갈과 잡석이 많이 섞인 흙을 사용하여 판축했던 것으 로 확인된다. 성벽 규모는 하단 폭 23m, 상단 폭 2.2m, 높이는 외벽 7.2m, 내벽 2.5m 정도이다. 2. 출토 유물 무성산성에서는 시굴조사한 지역에 비하여 출토된 유물은 적은 편이 다. 이전 지표조사에서는 이동통신기지국에 의해 파괴된 남벽 부근에 서 대부분의 유물이 채집되었고, 성내에서는 찾기 어려웠다고 한다. 주 로 신라 후기이거나 고려시대에 해당되는 유물이 출토되었다. 기와는 주로 나지구에서 출토되었다. 특히 성벽 하부의 와적층에서 다양한 기와가 출토되었다. 기와는 화재로 인해 2차 소성된 기와가 대 부분이었으며 뒤섞여 있는 상태였다. 출토된 기와들은 대부분 고려시 대 기와이다. 막새류는 출토되지 않았다. 평기와 중 무성산성 뿐만 아 니라 주위의 자미산성, 비파산성, 덕목리성에서도 공통적으로 출토되 는 것들이 있다. 통일된 생산체계에 의해 제작되었음을 추정 할 수 있 다. 명문기와는 가지구에서 1점 출토되었다. 선문암키와의 윗부분에 2.5cm 3.5cm 크기의 방형구획을 설정하여 그 안에 명문을 넣었다. 명 문은 馬?로 추정되나 분명하지 않다. 이 밖에 토기류 23점이 출토되었는데 백제토기편이 섞여 있으나 고려 시대토기가 주류를 이루고 일부 통일신라시대(9세기 이후) 토기도 있 었다. 또한 자기 3점 철기 1점도 출토되었다. 앞서 경기도 박물관에서 시행된 지표조사에서는 청동기시대, 백제시 대이 상당수 출토되었다고 하지만 이번 조사에서는 대부분 신라 후기 나 고려시대 것이었다. 제한된 지역에 대한 발굴조사이기 때문인지 아 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차후 조사에서 밝혀야 할 것이다. Ⅲ. 자미산성 1. 유구 1) 저장시설. 나 지구에서 신라시대 저장시설이 출토되었다. 풍화암반층을 동서 620cm, 남북 600m, 깊이 160m∼180cm 정도의 사각형 상자형태로 수혈 을 조성하였다. 깊이는 풍화암반층 상면 지형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바 닥의 레벨은 수평을 이루고 있었다. 수혈 바닥에 60cm, 측벽에 약 100cm 정도 두께로 암갈색 고운 점토(Ⅵ층)로 다져 올렸다. 이 상태에 서 저장시설의 바닥석을 놓기 위하여 적갈색점토(Ⅴ층)를 5cm 정도 다 지고 그 위에 바닥석을 시설하였다. 중앙에 '+'자로 폭 30cm 정도의 간격을 두고 4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각 구획별로 바닥석을 시설하였 다. 벽체는 암갈색 점토를 그대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바닥석 상 면에서 석재들이 출토되기는 하지만 그 수가 적고, 저장시설이 폐기된 후 퇴적된 토층보다 위에 있으며, 바닥석이 내벽 점토에 잇대어 있기 때문이다. 벽체를 모두 시설한 후 그 위로 지붕을 덮었던 것으로 추정 된다. 하지만 지붕에는 기와를 시설하였던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무너 진 저장시설 내부에서 다량의 기와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기와 지붕일 가능성을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후대 폐기과정에서 인위적으로 와적 된 것일 수 도 있다. 더구나 기와지붕을 시설하였던 유구의 흔적도 찾 기 어려웠다. 저장시설 내부로 진입하는 통로는 확인할 수 없었다. 이 와 유사한 설봉산성 저장시설의 경우에는 벽체를 이루는 점토층이 단 절된 부분이 있었고, 붕괴된 계단시설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자미 산성의 경우에는 이러한 출입시설의 흔적은 없었다. 도굴갱으로 출입 시설이 교란되었거나, 특별한 시설 없이 사다리를 이용하여 출입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축조시기는 일단 백제고배와 토기가 출토된 토광을 파괴하여 축조된 점으로 보아 토광보다 후대로 봐야 할 것이다. 또한 바닥석 상면에서 출토된 토기편과 기와가 모두 신라유물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신라가 진출한 6세기 후반 이후로 볼 수 있다. 폐기된 시점은 상면의 토층이 교 란되어 분명하지 않다. 2) 북문지 지표조사시에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번 시굴조사 과정에서 성벽에 대한 절개조사 중 출토되었다. 아직 전반적인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그 형태와 성격이 불분명하다. 현재 노출된 북문지 폭이 6m 이상으로 추정되며, 통로부에 각기 다른 유구가 중복되어 있었다. 북문지의 정확 한 규모를 밝히기 위해서는 성내외부의 확장조사가 필요하며, 중복된 유구의 선후과정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차후 주변에 대한 정밀조사가 실시되어야 할 것이다. * 내옹성 확장 트렌치 동벽과 남벽이 만나는 지점에서 남벽을 따라 400cm 진행 하다 북쪽으로 반원을 그리며 회절한다. 확인된 전체 길이는 740cm 정 도이다. Ⅵ층이 내옹성 뒤쪽에 형성되어 있다. 현재 노출된 단수는 8∼ 9단, 90cm이다. 1단과 2단은 5cm, 2단과 3단은 2cm의 들여쌓기를 하 고 있으나, 그 위로는 면석재의 뒷심을 기울여 경사면을 이루고 있다. 하단에서 상단까지 들여쌓은 깊이는 60cm이다. * 등성시설(계단) 내옹선 전면에 축조되었다. 내옹성 상면에서 북쪽으로 330cm까지 확 인된다. 높이 차는 110cm 정도이다. 추정단수는 8∼10단 정도이다. 장 방형 석재(33cm 13cm 26cm)와 판석형 석재(58cm 13cm 47cm), 할석 재(42cm 20cm)를 사용하고 있다. 등성시설 중앙에는 폭 30cm∼50cm 의 배수로가 확인된다. 이 배수로를 통해 등성시설이 좌우로 대칭되는 것으로 보이나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내옹성(등성시설 1)과의 관계 는 아직 불분명하다. * 성벽 북문지 외부 시설물은 등성시설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북쪽으로 600cm 떨어져서 확인되었다. 지표에서 400cm 하부에 동서로 이어지 는 석재단이 확인되었다. 3단 높이 37cm가 잔존한다. 토층벽에서는 높 이 120cm, 폭 80cm 까지 보인다. 보축성벽 외부에는 점토와 마사토를 다져 성벽을 보호하며, 단면 삼각형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이 층은 문의 출입과 관련된 가능성이 있다. 2. 출토유물 자미산성은 조사지역이 가장 넓었던 만큼 유물의 수량도 많은 편이 다. 청동기 무문토기에서부터 조선시대 자기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시 대에 걸쳐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출토유물 중에는 명문이 새겨 진 벼루와 고배편도 있어 주목된다. 청동기시대로 보이는 유물은 정교하게 마연한 마제석촉, 어망추, 무 문 발형토기의 원형 굽편이 있다. 마제 석촉은 유경식 석촉으로 경부 의 일부가 결실되었으나 거의 완형에 가깝다. 신부의 단면은 능형이며 전체적으로 마연흔이 확인된다. 길이 5.5cm, 너비 2cm이다. 어망추는 성벽 절개 트렌치 부토층에서 출토되었다. 토제로 되어 있으며, 면을 다듬은 흔적이 남아 있다. 출토된 기와류는 수키와, 암키와, 명문기와, 막새, 특수기와 등이다. 막새류는 수막새와 암막새 모두 출토되었다. 수막새는 회오리 문양으 로 다지구와 라지구에서 주로 나타난다. 크기는 지름 15cm∼16cm, 두 께 1.5cm, 주연 너비 2.2cm이며, 시문된 회오리의 가지 수는 11조이 다. 뒷면과 드림새 턱 모두 정면되어 있으며, 상단부에는 접합흔과 보 토흔이 남아있다. 암막새는 당초문으로 현재 2종류 역시 다지구와 라지 구에서 출토되었다. 암막새의 너비는 4.5cm, 5cm의 비교적 소형이며, 선문계통의 암키와와 접합되어있다. 명문기와는 나확-1 트렌치에서 1점 출토되었다. 선문수키와의 윗부분 에 2.5 3.5cm 크기의 방형구획을 설정하여 그 안에 명문을 넣었다. 명 문은 현재 판독 중이다. 평기와에는 모두 점토판 소지를 사용한 것으로 관찰되었다. 명문기와 는 1점이 출토되었으며, 막새는 암막새와 수막새가 출토되었다. 기와 는 화재로 인해 2차 소성된 기와가 대부분이었다. 출토된 기와들은 대 부분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의 기와들이다. 그 외 특수기와로 구멍이 뚫린 암키와 2점과 ,수키와의 배면에 0.5cm 이하 두께의 점토판을 댄 흔적이 나타난 것이 2점 출토되었다. 백제토기는 여러 종류가 출토되었으나 대부분 파편이고 기형이 복원 되는 것으로 옹과 고배 등이 있다. 옹은 구연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완형에 가깝다. 경부는 긴 편이 며, 동체는 란형에 가깝다. 외벽동체에는 중하단부까지 평행집선문 위 에 조족문이 타날되어 있다. 회청색의 경질로 높이 63.5㎝, 구경 34.5 ㎝, 경부길이 12.8㎝이다. 완형에 가까운 소형의 유개고배도 출토되었다. 구연의 길이는 긴 편 이며, 밖으로 벌어지면서 올라 구순에서 둥글게 마무리되었다. 굽다리 는 밖으로 외반되었으며 접지면을 단을 두어 꺾어 표현하였다. 태토는 가는 석립이 섞여있으나 정선된 점토이다. 색조는 어두운 암적색을 띠 고 있으며 배신 안쪽과 굽다리 안쪽, 접지면에는 붉은 색이 두드러진 다. 구경 10.7㎝, 높이 7㎝, 굽높이 3.5㎝이다. 이와 공반 출토도니 유물 은 연질토기로 장란형토기 바닥편, 심발형토기 동체 및 저부편이 있 고, 경질토기는 회청색 호의 경부 및 동체편이 있다. 신라 시대로 추정되는 토기류는 단각고배류, 대부완류, 완류, 뚜껑 류, 호류 등이다. 다지구 성벽 절개 트렌치 지표에서 수습된 고배의 배신면에는 "下"자 의 명문이 음각 시문되어 있다. 형태로 보아 신라 6세기 후반 단각고배 로 생각된다. 반구형의 뚜껑편과 손잡이편도 출토되었다. 대부완류는 구연부나 저부편으로 출토되었는데, 도상복원이 가능한 것은 나확-1 저장시설을 조사하면서 출토된 것이다. 교란층과 바닥층에서 각각 그 편이 수습되어 일부 복원되었다. 이 대부완은 높이 9㎝로, 내외벽 흑 색, 속심은 회색이며 연질이다. 구순 바로 밑과 동체 중간부에는 얕은 음각홈이 돌려져 있다. 내벽 바닥에는 요철이 심하고, 외벽 바닥에는 날카로운 도구 끝으로 그은 선이 남아 있다. 또한 마모는 심하나 점렬 문이 시문된 대부완도 출토되었다. 주목되는 유물로는 명문이 씌어 있는 토제 원형 벼루편이 있다. 벼루 는 다지구 성벽 절개 트렌치 부토층에서 출토되었다. 복원구경은 약 19 ㎝, 높이 5.2㎝이다. 짧은 다리에 투창이 뚫려 있는 원형벼루의 형태이 다. 硯岡부분은 결실되었고, 硯池와 硯堤, 硯盤, 臺脚의 일부만이 남아 있다. 연지는 깊은 편이다. 대각에는 투창이 있는데, 원형과 장고형(삼 각형을 맞닿은 형태)이다. 투창 사이에는 초서체의 명문이 있다. Ⅳ. 비파산성 1. 유구 1) 수혈식 주거지 모두 2동이 확인되었다. 경작으로 인하여 주거지 상면이 모두 파괴 된 것으로 추정된다. 2개의 주거지는 서로 남북으로 접하고 있다. 남쪽 에 있는 주거지를 주거지 1로, 북쪽에 있는 것을 주거지 2로 정하였다. 주거지 1은 남북 500cm 동서 390cm의 규모로 남북이 긴 타원형이며, 수혈깊이는 약 50cm이다. 바닥은 암반상면에 최고 두께 35cm정도까 지 적갈색 점토+모래를 다져서 조성하였다. 점토 바닥아래 암반면에서 는 지름 20cm, 깊이 10cm의 기둥구멍이 확인되었다. 또한 주거지 내부 의 남쪽 바닥상면에서 흑갈색 점토+숯+적갈색 소토된 점토와 석재들 이 확인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화덕시설이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석재 의 크기는 19cm 22cm, 16cm 8cm 3cm 등이다. 소토층 내부에서는 백 자와 호편, 뚜껑편이 출토되었다. 주거지 2는 주거지 1과 같은 타원형으로 규모는 남북 505cm 동서 380cm로 수혈 깊이는 약 30cm정도이다. 바닥은 적갈색 점토 +모래 다 짐을 하여 조성하였다. 다짐층에서는 소량의 기와편이 출토되었다. 주 거지 내부 남쪽으로 소형석재와 기와편이 모여 있는 것으로 보아 주거 지 1과 같은 화덕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소토흔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사용된 석재의 크기는 19cm 9cm, 19cm 8cm 등이다. 주공은 서쪽과 북쪽에서 확인되었다. 주공의 크기는 지름 27cm 깊이 36cm, 지 름 22cm 깊이 19cm 등이다. 출토된 유물은 주거지 1과 유사하다. 2) 성벽 성벽의 축조방식과 정확한 규모를 파악하기 위하여 동벽에 시굴 트렌 치를 설치하여 성벽을 절개하였다. 성벽은 암반층을 정리한 후 갈색점 토와 약간의 자갈을 다져서 기저부를 축조하였다. 기저부의 규모는 외 벽이 약 13m정도이고, 내벽이 약 10m정도이다. 그 위로 적갈색점토와 갈색 점토, 회갈색 점토를 교대로 다져서 축조하였다. 다짐층의 간격 은 일정하지 않다. 한편 외벽 기단부에서는 2∼3단정도 석렬을 쌓은 흔 적이 노출되었다. 기단 석재열 외부로 와적층이 확인되었다. 와적층의 폭은 약 3m∼4m 정도이고, 두께는 약 20cm∼40cm정도이다. 후대에 보수한 것인데 성 벽이 우수에 파이는 것을 빙지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성벽 상면폭은 약 2m∼3m정도이다. 외벽의 하단폭은 토루의 중심축 으로부터 약 13m정도이고, 높이는 약 6m정도이다. 내벽 절개 트렌치에 서 나타난 내벽의 하단폭은 토루의 중심축으로부터 약 10m정도이고, 높이는 약 3.3m정도이다. 2. 출토유물 '車成' 銘 명문 기와가 출토되었다. 이번 조사 지역은 고려시대 龍城 縣에 해당되는 지역이다. 용성현은 고구려의 上忽縣으로 신라 경덕왕 대 車城縣으로 개명하였던 기록이 남아 있다. 이 명문기와는 차성현의 치소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유물로 평가된다. 기와는 주로 성벽 절개 트렌치에서 출토되었다. 특히 내·외성벽 하부 의 와적층에서 다양한 기와가 출토되었다. 와적은 성벽의 하부를 보강 하기위해 쓰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기와는 화재로 인해 2차 소성된 기 와가 대부분이었으며 뒤섞여 있는 상태였다. 내벽과 외벽의 절개 트렌 치에서 출토된 기와들은 대부분 고려시대 기와이다. 외벽 트렌치에서 는 무문 평기와가 80∼90%로, 내벽 트렌치는 40∼50%의 출토비율을 보였다. 막새류는 출토되지 않았다. 토기류는 대부분 잔존상태가 작아서 거의 파편 상태이므로 전체 기형 을 파악하기 힘들다. 백색 또는 황갈색 무문이거나 회청색 경질이 대 부분이다.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자기류는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가장 주목되는 것은 가확-1 트렌치에 서 출토된 분청상감인화문대접이다. 1/2정도 반파되어 수습되었는데, 내벽에는 인화문이 장식되어 있다. 4줄의 선이 돌아가고 그 아래 열두 장 꽃잎과 가운데 원형받침이 표현된 국화문이 한줄 돌아간다. 그 아래 에는 다시 5줄의 선이 돌아간다. 선은 나선형으로 회전을 이용하여 돌 렸다. 국화문은 일정간격을 유지하면서 표현되어 있다. 굽은 대마디굽 의 형태이며 깎음새가 깨끗하고 단정하다. 태토비짐을 이용하여 번조 하였다. 표면에는 갈록색 유약을 입혀 시유하였으며, 빙열은 없다 백자 접시류와 대접류, 완류도 있다. 가-2 트렌치에서 출토된 대접은 안쪽에 원각을 마련하고 가운데는 편평하게 다듬었다. 굽은 오목굽의 형태이며, 태토비짐을 이용하여 번조하였다. 백색의 유약을 굽을 제외 한 전면에 시유하였다. 또한 가-1 트렌치에서 출토된 접시는 청백색을 띠고 있으며, 굽은 오목굽이다. 태토비짐을 이용하여 번조하였다. Ⅴ. 용성리성 1. 유구 1) 성벽 북벽 절개 트렌치를 통해서 성벽의 축조방식을 추정할 수 있었다. 먼 저 암반상면에 점토를 다져 기저부를 조성하였다. 그 위로 적갈색 점 토 + 모래를 다져서 축조하였다. 그 다짐 사이사이에 적갈색 점토 + 숯 또는 마사토를 깔았는데 그 간격은 일정하지 않다. 북벽 절개 트렌치로 확인된 외벽의 규모는 다음과 같다. 다짐층의 하 단폭은 토루의 중심축에서 약 4m이고, 최대 하단폭은 6.5m정도이다. 성벽 높이는 토루의 중심높이는 약 2.9m정도이며, 외황의 바닥으로부 터의 높이는 약 5.6m이다. 초축시의 정확한 높이는 성벽의 상부가 보수 된 것으로 추정되어 파악이 어렵지만, 현재 용성리성에서 북벽의 높이 가 가장 높고 훼손된 정도가 다른 성벽에 비하여 적은 것으로 파악되는 바 현재와 비슷한 높이로 추정된다. 2) 북치성 조사 결과 북쪽으로 흐르는 능선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어지며, 외황 의 조성을 위해서 이 능선을 삭토했던 것으로 추정되어진다. 지표조사 시 치성으로 추정한 북벽 돌출부는 외황을 조성하기 위해 삭토하고 남 은 능선이다. 즉 치성은 외황을 조성하기 위하여 삭토하고 남은 능선 을 이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되어진다. 치성을 전체적으로 조사한 것이 아니어서 자세한 상황은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외황의 규모는 폭 이 약 8m정도이며, 깊이는 현 지표에서 70cm정도이다. 2. 출토유물 기와는 북치성 시굴 트렌치에서 2종류의 암키와가 출토되었다. 어골문 과 무문의 암키와로 고려시대 기와이다. 어골문은 두께 1.5cm, 무문은 두께 2.3cm 이다. 측면 와도흔은 1/5과 2/3 깊이로 확인된다. 무문 암 키와에서 내면의 조막손흔이 너비4cm로 관찰된다. 토기류의 대부분은 편이 작아 전체적인 형태를 파악하기 힘들다. Ⅵ. 덕목리성 1. 유구 1)북문지 동벽 조사결과 문지 일부로 추정되는 유구가 노출되었다. Ⅳ층 하부 에서 남북으로 이어지는 석재열이 확인되었다. 서쪽 부분은 열이 잘 살 아있고 2단 정도 쌓였던 흔적이 나타나고 있다. 일부 석재는 밀려났지 만 전체적인 형태는 유지하고 있다. 석재열 서쪽으로 황갈색 점토층이 석재 높이와 같이 나타나며, 이것은 물이 고였거나 흘렀던 흔적으로 추 정된다. 석재는 부정형 할석재를 사용하였으며, 일부는 불먹은 석재를 재사용하였다. 크기는 50cm 42cm, 44cm 36cm, 34cm 29cm, 19cm 12cm, 31cm 12cm 등이다. 트렌치 남벽에서 북서쪽으로 남북 폭 300cm, 동서 폭 100cm 정도의 갈색 점토층이 확인되며 20cm 아래에 암반이 확인되었다. 문지와 접하는 성벽 1 트렌치에서는 배수로로 보이 는 유구가 노출되었다. 석재열은 북문지 2 시굴 트렌치의 동쪽 석재열 과 일치하게 흐른다. 석재열은 동서 폭 110cm, 남북 폭 280cm으로 2열 이 확인된다. 석재열 내부에는 Ⅳ-a층이 형성되어 있으며, 북문지 2 시 굴 트렌치 남벽에서도 확인된다. 이는 문지 폐쇄 후 복토되기 전에 형 성된 토층으로 추정된다. 석재 내부의 토층이 물이 흐른 흔적으로 본다 면 2열의 석재열은 배수로의 측벽일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덮개돌은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석재열 또한 잘 남아있지 않아 확신할 수는 없 다. 2) 성벽 외벽 기단은 석축으로 축조되었음이 확인되었다. 3단 46cm 정도로 조 성되었다는데 1단은 방형석재를 사용하고, 그 위로는 할석재를 사용하 며, 전체 10cm 정도의 들여쌓기를 하고 있었다. 각단에 사용된 석재는 1단 40cm 12cm, 2단 15cm 11cm, 3단 16cm 6cm 정도이다. 토성의 전체규모는 절개조사를 하지 않아 알 수 없었다. 외벽의 추 정 높이는 500cm 정도이다. 垓字는 폭 370cm∼500cm 이며, 중심 깊이는 90cm 정도이다. 2. 출토 유물 덕목리성에서 기와는 주로 발굴지 동편의 가옥 주위의 경작지 지표에 서 수습되었다. 시굴된 트렌치 내에서는 극히 소량의 작은 편들이 출토 되었을 뿐이다. 출토된 기와들은 대부분 고려시대 기와이다. 막새와 명 문와류는 출토되지 않았다. 덕목리성에서는 조사구역이 좁았던 만큼 소량의 유물만이 출토되었 다. 지표조사 시에도 격자문이 시문된 대부분 고려시대 토기편이 수습 되었다고 한다. 기종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지표에서 수습된 동이편이 다. 회갈색의 연질편으로 구연부와 저부의 일부가 남아있다. 그외 토 기 동체편은 잔존크기가 작아 전체형태를 파악하기 어렵다. 자기류는 청자대접편이 수습되었다. 굽과 동체의 일부만이 남아있어 전체 형태를 파악할 수 없다. 백자 잔도 출토되었으나 구연의 형태는 알 수 없다. 동체의 저부에서 한번 각이 꺾어져 굽으로 이어지는 형태 이다. 담회백색의 유약을 얇게 입혔으며 빙열이 있다. Ⅶ. 종합고찰-조사 의의와 전망 이번 시(발)굴 조사는 5개 성곽에 대한 시굴조사에 중점을 두고 실시 되었다. 조사 대상지는 대부분 사유지였고 야산이나 구릉지로 현재 농 경지나 분묘로 활용되는 지역이 많았다. 때문에 시굴조사를 위한 트렌 치를 설정에 어려운 점이 많았다. 특히 중요지역으로 판단되어 시굴조 사를 실시하려고 하였던 곳 가운데 토지 소유주와 협의가 잘 이루어지 지 않아서 조사를 할 수 없었던 부분도 많았다. 따라서 이번 조사에서 는 각 유적의 시굴대상지를 선정하는데 있어서 가장 고려되었던 것은 실제 조사가 가능한 지점인가 여부였다. 일부 유적의 경우 안타깝게도 유적의 성격을 파악하는데 가장 필요한 지역에 대하여 시굴할 수 없었 다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 문제는 앞으로 지속적인 조사가 이루 어진다면 충분히 고려되어야할 사항이다. 이번 조사는 5개 유적을 모두 대상으로 하였지만 조사 과정에서 유적 의 중요도에 따라 시굴조사의 차이를 두었다. 가장 역점을 두고 오랫동 안 조사가 이루어진 곳은 자미산성이었다. 조사 여건이 가장 양호하기 도 하였지만 유구 일부가 지상에 노출되어 있었고 출토되는 유물도 다 른 곳에 비하여 월등하였다. 더구나 출토되는 유물이 청동기 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질적인 면에서도 학술적 가치가 높았 다. 전체 조사기간의 절반 정도는 자미산성 조사에 할당하였다. 그 결 과 저장시설이 완전히 노출되었고 북문지와 백제 토광 등도 일부 노출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차후의 정밀조사가 필요하다. 1. 저장시설 이번 자미산성에서 출토된 저장시설은 그 구조에 있어서 이천 설봉산 성의 것과 유사하여 주목된다. 설봉산성과 자미산성 저장시설의 형태 및 규모를 상호 비교하면 다음의 표와 같다. 세부적인 면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지만 전반적인 축조 방식에 있어서 는 대동소이하다. 모두 암반층을 굴착한 다음 바닥과 벽체에 점토를 발 라서 축조하였다. 설봉산성은 점토 벽체 안쪽에 할석으로 내벽을 구축 하였지만 자미산성에서는 점토 벽체를 그대로 활용하였던 것으로 추정 된다. 조사 과정에서 석재로 축조한 내벽이 있을 가능성에 주목하였으 나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바닥을 덮고 있던 할석이 없는 것은 아 니었지만 바닥석과 같은 판석형태였고 그 크기도 작아서 벽체로 사용 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석재의 전체적인 수량도 얼마되지 않았다. 또 한 바닥석이 점토벽에 직접 물려져 있는 것도 내벽이 없었을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따라서 일단 내벽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하였 다. 그런데 이 경우 지붕 시설이 문제가 된다. 자미산성 저장시설의 경우 에는 지붕을 시설하였던 유구의 흔적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설봉산 성에서도 지붕에 사용되었던 가구구조는 출토되지 않아서 그 형태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발굴 조사시 저장시설 중심부에서 다수의 목탄 과 기와편이 섞여서 출토되었다. 특히 출토된 기와편들은 모두 신라 기 와편으로 저장시설 폐기 후 외부에서 쓸려 들어온 기와와 종류나 퇴적 된 상태가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직접적으로 기와와 목탄 위에 퇴적 된 토층은 이것들이 외부에서 쓸려들어 온 것이 아니라, 지붕에 시설되 었던 기와가 떨어져 내린 흔적을 보여주고 있었다. 따라서 목탄은 지 붕 가구에 사용되었던 목재의 흔적으로 볼 수 있다. 이것들이 저장시 설 중심에서 반경 160cm 안에서만 보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무너져 내 렸던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하지만 자미산성에서도 바닥층 상면에서 일부 목재 흔적이 보이고 있었고 와적층도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도 굴갱이 수 개가 뚫리는 과정에서 토층이 대부분 교란되어 목재와 와적 층의 선후 관계 및 그 상면의 토층과 상호 관계도 파악하기 곤란하였 다. 더구나 벽체가 점토로 축조되었다면 기와 지붕을 시설할 경우 그 에 상응하는 기둥을 세워야 하는데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유구가 도굴로 훼손되면서 없어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애초부터 기 와가 아닌 자른 형태의 지붕이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현재로서는 지붕 의 형태를 짐작하기가 매우 어렵다. 지붕과 함께 출입시설의 문제도 의문으로 남는다. 설봉산성의 경우에 는 서벽 중앙부에 점토벽이 없는 공간이 있었고 바닥에 내려오는 계단 이 비록 일부지만 붕괴된 상태로 노출되었다. 그러나 자미산성 저장시 설은 출입구로 볼 수 있는 흔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현재 남벽과 서벽은 비교적 상태가 양호한 편이지만 출입구의 흔적을 찾을 수 없고 동벽과 북벽은 대부분 파괴되어 알 수 없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출입시 설의 형태나 출입방법을 추정할 수 없다. 다만 반지하식이라는 점을 고 려하면 사다리 같은 것을 사용하여 출입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한편, 이 시설은 저장시설로 추정되나 저수시설일 가능성도 제시될 수 있다. 설성산성 저수시설의 경우 암반을 굴착하여 광을 만들고 여기 에 일정한 두께로 점토를 다져 넣어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닥에 는 바닥석을 시설하지 않고 목재를 [井]자로 시설한 다음 그 사이에 자 갈을 시설하였다. 사실 저수시설에 물을 채울 경우 점토 바닥 위에 바 닥석을 정연하게 설치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또한 자미산성의 경우 벽 체가 점토인 점도 저수시설로 보기 어려운 점이다. 이상 저장시설에 대하여 약간의 검토를 해보았지만 아직 의문으로 남 는 것이 있다. 즉 이 시설의 용도 문제이다. 아주 특수한 용도로 사용 하기 위하여 만든 것으로 보인다. 반지하식 구조이고, 벽체 외부와 바 닥 하부에까지 점토를 채워 넣었기 때문이다. 이는 항온·항습을 유지하 기 위한 조치로 파악된다. 따라서 상온에서는 보관이 어렵고, 항온·항 습이 필요한 어떤 물건을 저장하기 위한 특수 용도로 설계된 것이라 하 겠다. 이와 관련하여 먼저 내부에서 출토되는 유물을 주목할 필요가 있 다. 완과 호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그 양은 많지 않지 않다. 설봉산성 에서는 역시 소량의 고배, 병, 호 등 중소형 토기들이 출토되었다. 저장 과 관련되 대형 토기는 출토되지 않았다. 출토 유물로는 저장시설의 용 도를 파악하기 어렵다. 이 밖에 토양 분석도 저장시설의 용도를 파악하 는데 단서를 제공하여 줄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사과정에서 저장 시설 바닥층에서 토양 시료를 채취하였다. 이에 대한 조사는 차후에 진 행할 예정이다. 마자막으로 자미산성 저장시성에서 출토된 토기들은 모두 신라토기 였다. 편년을 세분화 할 수 있는 토기들은 충분하지 않았지만 그 중심 연대는 대체적으로 통일신라시대에 해당되고 고려시대 토기는 출토되 지 않았다. {三國史記} 신라본기를 고려할 때, 신라가 자미산성에 진출 한 것은 6세기 중반 경이다. 564년 당항진을 차지하고 대중국사절을 파 견하였던 것으로 보아 늦어도 이 시기에는 자미산성이 신라의 수중에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후 아산만을 경계로 백제와 치열한 항쟁이 펼쳐졌고 백제군 뿐만 아니라 고구려군도 당항성을 직접 공격한 기록 이 보이고 있다. 유사한 형태인 설봉산성 저장시설은 7세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자미산성 저장시설 축조 상한선을 7세기까지 올 라 갈 수 있다. 자미산성이 신라에 의하여 대대적으로 수축되는 시기 와 일치할 것이고 설봉산성에도 비슷한 시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것 과도 시기적으로 관계되는 것이 분명하다. 일단 7세기에 축조되어 9세 기까지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하고자 한다. 지금까지 저장시설에 대하여 몇 가지 문제점을 살펴보았다. 이 같은 시설은 설봉산성에서 처음 출토된 이후 자미산성에서 다시 비슷한 형 태의 것이 출토됨으로써 당시 신라의 산성 운용과 관련된 특수한 시설 의 하나로 추정할 수 있다. 아직 그 용도는 파악하기 어렵지만 앞으로 다른 산성에서도 비슷한 시설이 출토될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차후 에 의문이 해결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2. 성벽 이번에 조사된 4개 토성은 모두 고려시대에 축조되어 사용되었던 유 적이다. 비슷한 시기에 같은 지역에 축조된 유적으로서 공통점과 차이 점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아직 본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상호 비교에는 어려움이 있다. 여기에서는 이번 조사 내용을 정 리하는 의미에서 성벽을 중심으로 그 축조 방법상의 특징을 상호 비교 하여 고려시대 토성의 특징에 잡근하여 보고자 한다. 이번 에 조사된 4개의 토성은 대략적 축조방법에 있어서 대동소이하 다. 기본적으로 토성벽은 암반면에 점토를 다져서 기저부를 조성하였 다. 그 위로 점토와 모래 및 지역에 따라 약간 다른 토사를 섞어서 순 차적으로 다져올려서 토루를 구성하였다. 토루를 구성하는 토양은 각 각 차이가 있지만 이는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의 차이에서 기인 한 것이지 공법상의 차이로 보기는 어렵다. 토루의 조성 방법은 판축 과 유사하지만 일반적으로 고대의 판축토성보다는 정교하지 못하다. 하지만 수평을 맞추어 다져올리는 것은 비교적 정연한 편이다. 토루를 구성함에 있어서 마사토나 모래 또는 암반 부스러기를 중간 중간에 집 어넣어 배수가 용이하도록 조치하여 성벽의 견고성을 높였다. 다짐층 상면에는 사질이 많은 토사로 덮었는데 이는 보수과정에서 추차에 걸 쳐서 이루어진 것으로 산성에 따라서 차이가 크다. 성벽의 기단을 구성하는 방법은 크게 석재를 사용한 것과 그렇지 않 은 것으로 구분된다. 비파산성과 덕목리성의 경우에는 토성 기단부에 2-3단의 석축을 구성하고 그 위로 토사를 다져 올렸다. 토사를 다지기 위해 기둥을 사용하였던 흔적도 보이고 있다. 반면에 용성리 성은 암 반을 삭토한 후 석재를 대지 않고 그대로 토축하였다. 다만 기저부에 는 고운점토 다져서 수평을 유지하였고 토루 중심부에 석재를 놓아 성 벽의 구심력을 강화하였다. 이는 아무래도 전자에 비하여 노동력을 적 게들이고 축조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용성리성이 비파산성의 부 성과 같은 역할을 하였던 기능과도 관련될 것이다. 무성산성의 경우에 는 절개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정확한 축조방법을 확인하기가 어려 웠다. 외황이 조성된 토성은 용성리성과 덕목리성이다. 이 성들은 낮은 구 릉에 위치하며, 외황을 조성하면서 나온 토사를 성벽 축조에 사용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외항은 지형적인 불리함을 극복하기 위하여 시설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외벽이나 내벽의 기단부를 보호하기 위한 시설도 출토되었다. 비파산 성의 경우 내외벽에 와적층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 와적층은 기단석축 을 외부에서 성벽을 덮고 있었다. 와적층의 폭은 약 3m~4m정도이고, 두께는 약 20cm~40cm정도이다. 이 와적층은 석축성벽의 보축과 같은 기능을 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토성에서 흘러내린 빗물이 기단부를 파 헤치는 것을 방지하여 성벽기단을 보호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다만 현재 노출된 와적은 출토되는 기와로 보아 초축시의 것은 아닌 것 같아 서 초축시부터 이 같은 시설이 있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또한 내벽과 외벽이 각각 종류가 다른 기와로 시설되었는데 이것이 시기적인 차이 인지 동시대 다른 지역의 기와를 사용한 것인지 역시 분명하지 않다. 다만 후대의 보수과정에서 형성된 것은 분명하다. 이상 간략하게 이번 조사된 성벽의 축조방식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고려시대 토성에 대한 연구가 큭 진척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번 조사는 여러 가지 의미를 던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번 조사가 시굴조 사라는 한계가 있지만 앞으로 보고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심도 있는 연구가 있을 것이다. 3. [車城]명 기와의 출토 의미 이번 조사지역 중 자미산성, 비파산성 일대는 고려시대의 용성현(龍 城縣) 지역에 해당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용성현은 고구려의 상홀 현으로 신라 경덕왕대에 거성현으로 개명하여 당은군 영현(領縣)이 되 었다가 고려시대에 용성현으로 개명되었다. 용성현으로 개명된 시기 는 {고려사} 지리지에는 고려초로 기록되어 있을 뿐 구체적인 시기는 기록하지 않았다. 고려 초 지명 개정은 대체로 성종대 이루어지는 것 을 고려하면 아마도 거성현을 용성현으로 개명한 것을 성종대를 전후 로 한 시기로 볼 수 있다. 신라시대 거성현은 자미산성으로 추정되지만 고려시대 거성현 또는 용성현의 치소는 비파산성이 주목되었다. 자미산성이 고려시대에도 사 용되었지만 그 유물의 출토상으로 보아 신라시대에 비하여 그 양이 많 지 않다. 반면에 비파산성의 경우에는 고려 초기의 유물부터 등장하고 있어서 고려시대를 기준으로 지방통치의 거점으로서 두 성의 역할이 교대되었던 사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 경우 그 시기가 어느 시기인가 문제이다. 즉 비파산성이 언제 어떤 목적으로 축조되었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단서가 되는 것이다. 비파산성의 초축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유 물은 경기도박물관에서 지표조사시 수습된 명문기와편이다. '乾德三 年'이란 명문이 새겨진 기와이다. 건덕은 송나라의 연호로 고려 광종 7 년(965)에 해당된다. 광종대 요지에 대한 축성이 이루어졌던 것은 안 성 망이산성 출토 [준풍]명 기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번 조사에서 비파산성에서 [車城]명의 기와가 출토되었다. 거성에서 용성으로 개명되는 것이 성종대로 보여지기 때문에 이 기와 는 그 이전의 기와로 추정된다. 즉 [건덕]명 기와와 시기가 비슷하거 나 같은 시기의 것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무엇보다 비파산성이 거성 현의 치소로 축조되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유물인 것이다. 물론 이 후 거성현이 용성현으로 개명되었지만 치소는 여전히 비파산성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비파산성은 고려시대 거성현성 또는 용성현성이 되는 것이다. 비파산성이란 명칭 대신 거성현성 또는 용성현성으로 부르는 문제도 논의할 필요가 있다. 또한 신라시대와 고려시대의 지방통치의 차이점과 이 지역에서의 인구변화, 농업생산력, 해안읍성의 축조 문제 등 여러 가지 문제를 연구할 수 있는 단서가 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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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7 사천 선진리성 주변 정비사업부지내 유적 발굴 조사 지도위원회 개최 운영자 1242 2004.06.29
376 보은 삼년산성 지도위원회 운영자 1405 2004.06.28
375 청양 학암리 유적 발굴조사 지도위원회 운영자 1452 2004.06.25
374 청진6지구 신축공사부지 시굴조사 1차 지도위원회 운영자 1252 2004.06.24
373 충주 장미산성 발굴조사 지도위원회 개최 운영자 1181 2004.06.23
372 춘천 천전리 유적 발굴조사 지도위원회 개최 운영자 1570 2004.06.22
371 평택시 일대 5개 관방 유적 지도위원회 및 주민설명회 개최 운영자 1384 2004.06.21
370 청진6지구 신축공사부지 시굴조사 2차지도위원회의 개최 운영자 977 2004.06.21
369 완주 상운리 유적 발굴조사 지도위원회 개최 운영자 1438 2004.06.21
368 청진6지구 신축공사부지 시굴조사 2차지도위원회의 개최 운영자 776 2004.06.21
367 완주 상운리 유적 발굴조사 지도위원회 개최 운영자 771 2004.06.21
366 영월 흥령선원지 지도회의 개최 운영자 986 2004.06.18
365 화성 동탄택지개발사업(9지점) 발굴조사 지도위원회의 및 현장설명회 개최 운영자 1466 2004.06.18
364 화성 동탄택지개발사업(9지점) 발굴조사 지도위원회의 및 현장설명회 개최 운영자 856 2004.06.18
363 금산 백령산성 문화유적 발굴조사 지도위원회 개최 운영자 1461 2004.06.16
362 남양주 호평구석기유적(3차)에 대한 지도회의 및 현장설명회 운영자 1064 2004.06.15
361 나주 복암리고분군 전시관건립부지 내 유적 발굴조사 지도위원회 개최 운영자 737 2004.06.15
360 나주 복암리고분군 전시관건립부지 내 유적 발굴조사 지도위원회 개최 운영자 1298 2004.06.15
359 화성 동학산유적 발굴조사 지도위원회의 및 현장설명회 개최 운영자 1206 2004.06.15
358 화성 동학산유적 지도위원회의 및 현장설명회 개최 알림 김무중 754 2004.0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