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로고

현장소식

금산 백령산성 문화유적 발굴조사 지도위원회 개최

2004-06-16 17:27:00
조회 1461
문화재청(청장 노태섭·盧太燮)이 허가하여 충남역사문화원에서 발굴조 사 중인 금산 백령산성 문화유적 발굴조사에 대한 지도위원회를 아래 와 같이 개최한다. ▣ 일 시 : 2004. 5. 7(금) 14:30 ▣ 장 소 : 충남 금산군 남이면 건천리 발굴조사 현장 ▣ 조사기관 : 충남역사문화원(단장 정덕기) ▣ 발굴기간 : 2004. 3. 5 ~ 현재 붙임 보도자료(사진포함) 1부. ------------------------------------------------------------- Ⅰ. 조사개요 1. 조 사 명 : 금산 백령산성 문화유적 발굴조사 2. 조 사 지 역 : 충남 금산군 남이면 역평리 산 16-2번지, 건천리 산 1 번지 일원 3. 조 사 기 간 : 2004년 3월 5일 ~ 2004년 5월 15일 4. 조 사 면 적 : 남문지 주변 및 정상부(저수조, 구들시설) 2000㎡(약 600평) 5. 조사의뢰기관 : 금산군 6. 조 사 기 관 : 충청남도역사문화원 7. 조사단 구성 조 사 단 장 정 덕 기 (충청남도역사문화원원장) 지 도 위 원 이 강 승 (문화재위원, 충남대학교 교수) 심 정 보 (문화재위원, 한밭대학교 교수) 자 문 위 원 박 순 발 (충청문화재연구원장, 충남대학교 교수) 이 남 석 (공주대학교 박물관장, 공주대학교 교수) 차 용 걸 (중원문화재연구원장, 충북대학교 교수) 조 사 위 원 이 훈 (충청남도역사문화원 문화재연구부장) 책임 조사원 강 종 원 (충청남도역사문화원 연구위원) 조 사 원 정 해 준 (충청남도역사문화원 연구원) 최 병 화 (충청남도역사문화원 연구원) 조사 보조원 김 영 국 (충청남도역사문화원 연구보조원) Ⅱ. 유적의 위치와 환경 1. 自然地理的 環境 금산군 일대는 북동-남서 방향으로 금산군을 가로질러 뻗어 있는 노 령산맥의 험준한 지맥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는데, 평균 고도가 250m로 서 충남지역에서 가장 높은 산악군을 이루고 있다. 그중 유적이 위치한 남이면은 금산군에서도 제일의 산악지대이다. 남 이면 주위로는 동쪽의 進樂山(732m), 서쪽의 仙治山(700m), 북쪽의 印 大山(666m)이 고봉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으로는 이 고봉들 사이로 금산군내에서 금강의 가장 큰 지류인 鳳凰川이 건천리에서 발원하여 역평리를 지나 침식계곡을 따라 大小 하천과 합류하면서 南一面으로 유입되고 있다. 이를 중심으로 협장한 계곡을 이루며 하천분지 교통로 가 형성되어 주요 교통로로 이용되고 있다. 실제 금산 지역은 삼국말 의 羅濟 전쟁시에 신라군의 주요한 진격로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 다. 백령산성은 행정구역상으로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건천리 일대에 위치하고 있다. 자세한 위치는 건천리의 동남부로, 건천리와 역평리를 경계지으며 남북으로 길게 형성된 해발 400m의 능선 일부분에 자리하고 있다. 백령산성이 위치한 乾川里는 서쪽의 仙治峰과 동쪽의 進樂山에서 동 서주한 해발 500m내외의 험준한 능선들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 이처 럼 금산은 높은 산에 의해 둘러싸여 있어 일견 교통이 불편할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금강수계에 의해 상하류로 연결될 뿐만 아니라 침식 계곡을 따라 사방으로 교통로가 발달되어 있어 교통의 요지라 할 수 있 다. 백령산성이 위치한 능선은 연산과 무주를 이어주는 교통로상의 한 가 운데 장벽을 이루며 남북으로 길게 뻗어있다. 금산군은 서쪽으로는 논산군 연산면 지역과 노령산맥의 험준한 줄기 가 그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 연산면 지역은 백제 멸망시의 격전지로 유명한 ‘황산벌’로 비정되는 곳인데, 금산에서 이 연산지역으로 진입하 기 위해서는 2가지 주요 교통로가 사용되고 있다. 하나는 금산읍에서 서쪽으로 진산을 거쳐 평탄한 계곡을 따라 벌곡 大德里까지 이르는 길로서 편의상 ‘珍山-伐谷’루트라고 불리는 곳이 다. 이 길은 대덕리에서 다시 갈라지는데, 북쪽으로 벌곡 汙三川里를 지나 황령재를 넘으면 연산 동쪽 지역으로 바로 진입할 수 있다. 또 대 덕리에서 서쪽 檢川里로 나 있는 계곡을 따라 3.5㎞ 쯤 가면 古來부터 연산과 벌곡 사이의 주요 교통로로 이용되어온 곰치재가 있는데, 이 곰 치재를 넘으면 바로 연산면 山直里에 다다를 수 있다. 다른 하나의 교통로는 백령성을 경유하는 것으로, 이 길은 남이면 역 평리에서 서쪽으로 해발 500m의 작은 고개를 넘어 남이면 건천리에서 雲洲-陽村을 거쳐 연산에 이르게 되는 길로서 ‘雲洲-陽村’루트이다. 이 길은 건천리에서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서쪽으로 운주 삼거리-龍溪院 을 지나는 天燈山 南路와 서북쪽으로 운주 山北里로 향하는 천등산 北 路가 있다. 두 길은 운주 長仙里에서 합류되며, 이 곳에서 長仙川을 따 라 10㎞ 쯤 가면 양촌면 茅村里가 나오는데, 이는 운주에서 연산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교통로이다. 한편 남쪽으로 795번 지방도를 따라 南 一面을 지나 솔재 고개를 넘으면 鎭安 龍澤面이 나오며 여기서 서남쪽 으로 18㎞ 쯤 가면 鎭安邑에 이르게 된다. 2. 歷史的 性格 조사지역인 금산은 백제시대에는 진잉을군의 1개 군과 두시이현․물 거현․적천현 등 3개의 속현과 황산군의 영현이었던 진동현으로 분할 되어 편제되어 있었다. 금산지방이 언제 백제의 영역내로 편제되었는 지 분명하게 알 수는 없으나 차령산맥 및 금강 이남이라는 지리적 단절 성으로 인해 백제 전기부터 백제의 지배체제하에 편제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이들 지역이 백제의 정치적 영향력하에 놓이게 되는 시기 는 근초고왕대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그런데 금산지역이 백제사상 중요성을 띠기 시작한 것은 475년 문주왕에 의한 공주로의 천도 이후였 다. 물론 신라가 백제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자비마립간 13년(470) 보은 에 三年山城을 축조하게 되면서 대전지역을 포함한 이들 지역이 군사 적으로 중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중요성을 갖 기 시작하는 것은 공주로의 천도 이후였다고 하겠다. 『三國史記』권 26 백제본기에 동성왕 20년(498) 沙井城을 축조하여 干率 비타로 하여 금 지키게 하였으며, 23년(501)에는 炭峴에 木柵을 설치하고 신라에 대 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사정성은 현재 대전 사정동에 있는 사정성에 비정되고 있으며, 탄현은 신라가 삼국통일기 백제를 공격하는 통로로 지목되고 있는 탄현과 동일지점이라고 한다면 대전 동부 또는 금산지 역에 비정될 수 있다. 따라서 금산지역은 동성왕대를 전후해 군사적 요 충지로서 주목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런데 금산 장대리에서 신라 계 토기를 반출하는 고분군이 위치하고 있어 언젠가 이곳이 신라의 영 향력하에 놓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기록이 주 목된다. 1. 秋七月 新羅取東北鄙置新州(『三國史記』권26, 성왕 31년) 秋七月 取百濟東北鄙 置新興 以阿湌武力爲軍主(앞의 책 권4, 진흥왕 14년) 2. 秋七月 王欲襲新羅 親帥步騎五十 夜至狗川 新羅伏兵發與戰 爲亂兵 所害薨 諡曰聖(앞의 책 권26, 성왕 32년) 3. 百濟王名襛與加良 來攻管山城 軍主角干于德 伊湌耽知等 逆戰失利 新 州軍主金武力 以州兵赴之及交戰 裨將三年山郡高于都刀 急擊殺百濟王 於是 諸軍乘勝大克之 斬佐平四人 士卒二萬九千六百人 匹馬無反者(앞 의 책 권4, 진흥왕 15년) 앞의 사료 1은 553년 신라 진흥왕이 백제 東北部를 공략하여 新州를 설치한 사실을 기록한 내용이고, 사료 2는 백제 성왕이 신라의 管山城 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전사한 사실에 대한 내용이다. 관산성은 현재 옥 천의 環山城에 비정되고 있다. 위의 사건은 백제 성왕이 신라 진흥왕 과 연합작전으로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었던 한강유역에 대한 공취 후 신라가 다시 백제 점유의 한강 하류지역에 대한 공략과 그로 인한 성왕 의 신라에 대한 보복전쟁에 관한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그런데 이때 금산지역이 신라의 영역으로 편제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이 과정에서 신라의 정치적 영향력이 금산지역에 미쳤던 것은 분명하였다고 하겠 다. 그러나 금산지역이 이후 계속 신라의 영향력 하에 놓여있지는 않았 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삼국통일 전쟁시 신라가 백제를 공격하는 진격 로가 炭峴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탄현은 현재 금산지방에 비정되고 있다. 물론 탄현의 위치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고 있으나, 계백의 황산벌 전투지점과의 관련성에서 볼 때 신라군의 진격 로는 영동-금산-연산을 연결하는 도상에서 구할 수 있겠다. 따라서 금 산지역에 백제 최후의 보루라고 할 수 있는 탄현이 위치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당시 이 지역이 백제의 영역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라고 하겠 다. 그러면 언제 다시 이들 지역이 백제의 영역으로 편제되었는지 살펴 보기로 하자. 분명하지는 않으나 다음의 기록이 주목된다. 春三月 義直襲取新羅西鄙腰車等一十餘城 夏四月進軍於王門谷 新羅 將軍庾信逆之再戰 大敗之(『三國史記』권28, 의자왕 8년) 백제는 의자왕 8년 신라의 서변에 위치하고 있는 요차성 등을 공격하 여 빼앗은 사실을 알 수 있는데, 腰車는 尙州의 옛 要濟院으로 추정되 고 있다. 따라서 의자왕 초기에 금산지역은 다시 백제의 영역이 되었으 며, 이 까닭에 신라 침략시 興首는 ‘白江〔或云伎伐浦〕 炭峴〔或云沈 峴〕 我國之要路也 羅人未得過炭峴“(『三國史記』권28, 의자왕 20년) 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지역은 지방통치조직의 5方 가운 데 東方(得安城, 현 충남 은진에 비정)에 편제되어 있었을 것이다. 백제의 왕도가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함락된 후 당은 백제에 5도 독부를 두어 각각 州縣을 통할하게 하였는데, 정림사지 5층석탑 탑신부 에 새겨진 唐平百濟碑에 5都督府 밑에 37州, 250縣이 설치되었던 것으 로 기록되어 있다. 5도독부는 熊津․馬韓․東明․金漣․德安에 두고 있 는데, 이중 熊津은 공주가 분명하며, 德安은 東方의 得安城에 비정될 수 있을 뿐 나머지는 상호 비정이 불가능하다. 금산지역은 일시적으로 덕안도독부에 領屬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 멸망후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에 대한 지배권을 차지하기 위한 당과의 전쟁을 통해 결 국 대동강과 원산만을 잇는 선 이남의 땅을 차지하였다. 이후 신라는 지방통치조직으로 전국을 9州로 나누어 신라를 포함한 백제․고구려 의 옛 땅에 각각 3개의 주를 설치하였다. 9주는 신문왕 7년(687)에 설치 하였는데, 다시 경덕왕 18년(757)에 그 명칭을 한식으로 개칭하였다. 이 과정에서 금산지역은 進禮郡으로 승격되고, 이성현(현 부리면, 제원 면 일부와 무주군 부남면), 청거현(현 전북 진안군 용담면, 주천면, 안 천면, 정천면, 동향면), 단천현(현 무주군 일원)의 3현을 領屬시켜 完山 州의 관할로 하였으며, 일부는 熊州 黃山郡의 珍同縣으로 편제되었 다. Ⅲ. 조사내용 금번 발굴조사는 남문지와 저수조, 구들시설에 관한 전면 발굴조사이 다. 학술적인 가치와 유적의 성격에 대한 완벽한 자료를 얻기 위해서 는 성내 전지역에 대한 전면 발굴조사를 해야하지만 현재 발굴조사가 가지고 있는 시간과 경제력이라는 현실적인 한계에 의하여 시굴조사 를 통해 유적의 존재가 확실하게 알려진 일부 구간만을 한정하여 조사 를 진행하였다. 백령산성은 성내로 이르는 지역이 험하고 성내의 지형이 다소 협소 한 편이어서 장비의 이용이 불가능하여 순수 인력만을 가지고 조사를 진행하였다. 유적내로 함몰된 크고 무거운 석재와 주변의 급한 경사로 인해 조사상에 많은 어려움과 인재 사고의 위험이 상존한 관계로 최대 한 안전에 유념하며 조사를 진행하였다. 조사는 남문지 및 주변(P.90~110) 시설과, 성벽 기단부, 구들시설, 목 곽고 등, 네 부분으로 나누어서 진행하였다. 1. 남문지 및 주변 (성벽구간 P.90 ~ 110) 남문지는 다락문식(懸門式)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여 그 존재가 이 미 지표상에서부터 확인되었다. 문지는 성벽이 능선과 이어지는 곳을 피하여 서쪽측면으로 비스듬히 약 30m 떨어진 남벽 구간에 설치하고 있다. 시굴조사결과 성밖에서 성내로 진입하는 문지의 내부구조와 진 입방향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발굴조사는 문지와 성내부 통로와의 연결시설에 대한 현황을 밝히는 데 주 목적을 두었다. 따라서 남문지를 중심으로 동서로 연결된 성벽 의 내부지역에 대한 지표를 전면 제토하는 방법으로 조사를 진행하였 다. 조사결과 남문지와 성내 통로의 연결시설과 함께 보도시설, 그리고 토광 유구 3기 등이 확인되었다. (1) 남문지 ① 통로 및 바닥시설 문지는 성과 연결된 남쪽능선에서 남벽을 따라 서쪽으로 약 30m 거리 에 위치한다. 남문지는 전형적인 다락문형식(현문식)으로서 통로부 길 이 450㎝, 폭 430㎝의 규모이며, 생토면을 기반으로 형성된 외곽성벽 기저부에서부터 약 4m 높이에 開口된 입구가 위치하고 있다. 문지 통 로부의 바닥은 석재를 사용하지 않고 생토부스러기가 섞인 황색의 점 토를 다져 조성하고 있으며, 성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레벨이 높아지고 있다. 통로부를 지나 성내에 이르면 계단처럼 배수로의 석렬이 한단을 이루 고 있으며, 바닥은 다짐토를 사용하지 않고 황색조의 생토면으로 조성 하고 있다. 통로부를 지나면 성내의 지형과 바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벽체시 설로 가로막혀 있다. 벽체시설은 내벽과 280㎝의 거리를 두고 평행하 게 조성되어 있는데, 성격은 통로부를 지나 성안의 내벽을 따라 꺾여 들어가는 진입로를 조성하기 위한 성 안쪽의 벽면 시설로 내옹성의 역 할도 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즉, 남문의 진입 형태는 일반적인 평 면 'I'자 형이 아니라 ‘ㄱ'자 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는 출입부와 성내의 지형이 고저차가 심한 점을 고려하여, 통로부 에서 성내로 이르는 바닥의 레벨을 단계적으로 높이기 위하여 내벽을 따라 꺾여 들어가면서 입구를 조성한 것이며, 동시에 내옹성과 같은 수 비적인 기능을 하고 있다. ② 배수로 배수시설은 입구의 양쪽 가장자리에 위치하여 성내의 내벽에서부터 측벽을 따라 입구 전체에 걸쳐 조성되어 있다. 배수로는 너비 약 40㎝ 이며, 깊이는 부분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대부분 25㎝내외이다. 배수로는 소규모의 할석을 이용하여 조성하고 있다. 내벽이 문지로 꺾이는 곳에서부터 조성된 배수로는 남문지 안쪽에 시 설된 벽체시설을 따라 문지 입구로 이어져 오고 있다. 남문지 입구부 내에는 수로의 내벽을 석재로 조성하고 있으며, 부분적으로 덮개돌을 덮은 것이 남아있다. 또한 성 안쪽의 남문지 입구 양쪽 모서리부분에서 기둥시설을 설치했 던 흔적이 확인되고 있다. 서편모서리는 대부분이 무너져 있지만 원형 을 이루며 불탄 토양이 매몰되어 있고, 동편모서리는 석재를 세로로 길 게 덧대어 기둥을 보강했던 흔적이 남아있다. (2) 城內 통로 연결시설 남문의 진입은 전술한 것처럼 문지를 통해서 곧바로 성내로 진입하 는 것이 아니라 서편으로 90° 꺾여 진입하도록 되어있다. 즉 평면형태 가 “ㄱ”자형을 하고 있다. 성 안쪽 내벽에서부터 약 280㎝의 거리를 두고 할석을 이용하여 축조 한 벽체시설이 있는데, 이것이 문지에서 성내로 진입시 서편으로 꺾이 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벽체시설 진입로는 서편으로 향하 여 내벽과 평행을 이루며 길게 형성되어 있다. 시굴조사시 남벽절개 트렌치(P.85)에서 조사된 성 안쪽 석축시설은 금번 조사결과 내벽을 따라 형성되어 있는 성내 통로시설임이 확인되 었다. 통로는 내벽으로부터 성 안쪽으로 약 400㎝의 간격을 두고 형성 되었다. 즉, 내벽에서 400㎝의 거리에는 높이 1m내외의 석축시설이 있 으며, 이 석축시설은 내벽과 평행을 이루며 성벽을 따라 돌아가면서 일 정한 간격의 통로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약 400㎝ 간격으로 돌아가던 성내의 통로와 남문지 안쪽에 조 성된 280㎝ 간격의 벽체시설 진입로는 120㎝의 편차를 두고 있다. 문지 와 성내통로의 연결부는 400㎝의 통로가 내벽쪽으로 비스듬히 좁아지 면서 남문지 안쪽에 설치되었던 280㎝ 간격의 진입로(벽체시설)와 이 어지면서 형성된 사선지역이다. 사선지역을 통하여 완만하고 비스듬히 형성된 진입로는 보도시설과 연결되어(후술) 동쪽방향으로 경사면을 비스듬히 타면서 정상부로 향 하고 있다. 현재, 사선지역이라 표현한 성내 통로 연결부는 파괴가 심하여 별다 른 시설의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으며, 다만 비스듬히 연결되는 생토지 형과 바로 위로 풍화암반 생토부스러기와 암갈색 사질부토를 포함한 조성토를 깔아 진입로를 조성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3) 보도시설 보도시설은 성내 통로 연결부와 이어져 정상부로 향하는 진입로이 다. 금번 발굴조사에서 새로이 발견된 것으로 보도시설을 통하여 성내 로 출입되는 주변시설에 대한 이해에 좋은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보도시설은 경사면을 단면 “ㄴ”자 형으로 정지한 후 간단히 다듬은 석 재를 사용하여 축조하고 있다. 우선 수직으로 축대와 같은 벽체를 1~2 단으로 쌓아 길게 조성하고 있으며, 바닥은 너비 100~120㎝로서 간단 히 다듬은 석재를 듬성듬성 밀집하여 깔아 놓았다. 보도는 성내 통로 연결부에서 정상부로 경사면을 따라 비스듬히 올라가는 지형에 설치되 어 있어, 바닥은 계단식으로 높이를 조절해가면서 조성하였다. 현재는 성이 폐기되면서 보도를 이루던 석재가 부분적으로 유실되어 있는 상 태이다. (4) 원형 주공 보도시설 안쪽으로 원형 주공 5기가 조사되었다. 주공의 크기는 (지 름×잔존깊이) 50×35㎝, 50×60㎝, 50×40㎝의 것과 14×40㎝, 20×60㎝ 로 大小 구분이 이루어지고 있다. 주공내에는 암갈색 사점질부토와 암 반부스러기가 혼합된 토양이 채워져 있으며, 20×60㎝의 주공 내에서 는 기와편이 발견되고 있다. 주공간의 간격은 가깝게는 20㎝, 멀게는 60㎝의 거리를 두고 밀집되어 있다. (5) 토광유구 1 토광유구 1은 성내 정상부로 이어지는 보도시설을 파괴하며 조성되 어 있다. 그리드 조사당시 표면에서 다량의 석재들이 밀집을 이루고 있 어 성 내부 시설과 연관된 적석유구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석재는 모 두 함몰된 것이며, 내부 유입토가 표토층과 연결되어 있다. 또한 적석 을 걷어내는 과정에서 탄피와 옹기편이 출토되고 있으며, 유구의 바닥 에서 유리병 조각이 발견되어 최근에 형성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평면형태는 말각장방형이며, 크기는 240×190㎝, 잔존깊이 45㎝이다. 바닥에서는 전술한 유물 외에 낫과 옹기편, 그리고 목탄이 추가로 발견 되었다. (6) 토광유구 2 토광유구 2는 보도시설과 내벽과의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유구의 크 기는 280×170㎝, 잔존깊이 65㎝로서 평면형태 장방형을 하고 있다. 표 면에는 다수의 기와편이 함몰되어 있어 유구의 존재를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기와편을 걷어내는 과정에서 유구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표면에 깔려있는 기와편을 걷어내자 바로 아래서 유구 안으로 함몰된 할석들이 밀집되어 있는 것이 나타났다. 함몰된 석재들 사이로 기와편 이 발견되고 있으며, 바닥에서 약 20㎝까지는 회색의 사질점토층이 깔 려 있었다. 유구의 벽체는 수직으로 비교적 반듯하게 조성하고 있으며, 바닥은 아무런 시설 없이 평평하게 이루어져 있다. (7) 토광유구 3 토광유구 3은 평면이 말각방형에 가까운 원형을 하고 있으며, 토광유 구 1에 의해 일부분이 파괴되어 있는 상태였다. 유구의 발견도 토광유 구 1의 표면정리 과정에서 그 존재를 확인하였으며, 파괴된 부분을 기 준으로 삼아 “I”자형 토층을 남기며 조사를 진행하였다. 유구는 지름이 230㎝, 깊이 170㎝정도로서 지하로 깊게 조성하였는 데, 아래로 갈수록 유구의 면적이 좁아지고 있다. 바닥은 풍화암반 생 토를 평평하게 조성하여 마무리 하고 있다. 토층에서는 크게 두 가지 로 분류되는데, 상층은 암적갈색의 사점질부토층, 하층은 풍화암반 생 토 부스러기층으로 채워져 있다. 상층에서 다수의 기와편이 함몰되어 있으며, 하단에는 몇 점 발견되지 않는다. 2. 성벽 기단부 (1) 남문지 성벽 기단부 남문지 외곽의 성벽 기초시설을 조사하기 위하여 성벽과 수직이 되도 록 “I”자형 트렌치를 설치하였다. 표면상 기초시설에는 특별한 보강시 설을 하지는 않았으나, 문지 외곽이라는 출입지역임을 감안할 때, 급경 사의 지역을 어느 정도 조정하여 진입로를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기 때 문이다. 조사결과 성곽외부로 황갈색 사질점토와 풍화암반 생토 부스러기가 섞여있는 성토층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현재는 급경사에 의한 유실로 인 하여 일부분만이 남아 있으나, 생토암반 위에 성토를 하고 있음이 확인 되었다. 또한 성벽의 기단부는 시굴조사 당시 남벽 일부(P.85)조사를 통해 아 무런 보축시설 없이 생토면을 “L”자로 정지하고 성돌을 올려놓아 조성 한 것으로 확인되었으나, 문지부근에서는 생토면을 “L”자가 아닌 “⊔” 자로 턱이지게 깊게 굴광하여 성돌이 한단 반은 매몰되도록 시설하고 있다. (2) 내벽 기단부 (P.110 지점) 이 부분은 남문지를 포함한 주변의 성벽과 축조된 방식이 확연하게 다른 구간이다. 따라서 성벽의 구조가 차이를 가지고 있는 만큼 축조상 의 차이도 보일 것으로 판단되어 내벽의 기초시설을 조사하였다. 이는 기존에 조사된 남벽절개 트렌치(P.85)에서 조사된 것과 비교를 통하여 그 시기적인 편차를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기단부는 구지표에서부터 약 80㎝의 깊이에서 확인되었다. 성벽의 기 단부는 남벽 절개 트렌치에서 조사된 것과 그 축조양상이 같다. 생토면 을 평평히 정지한 후 생토부스러기와 사질점토가 섞인 것을 바닥에 깔 고(두께 10~20㎝내외) 거칠게 다듬은 할석을 이용하여 기단부를 조성 하고 있다. 기단부에 깔았던 부토의 두께에는 다소 차이가 있으나, 기 단부의 조성방식은 동일하며, 또한 트렌치 조사당시 층위에서 출토되 고 있는 유물에서 큰 시기적인 차이가 발견되지 않았다. 3. 구들시설 정상 평탄부의 남단에 위치하고 있다. 시설은 지름 80㎝크기의 연통 시설과 서쪽부분에 덮개돌이 덮힌 구들이 연결되어 있다. 구들시설은 장축이 東西방향으로 자리하며, 거칠게 다듬은 할석을 이용하여 원형 으로 둥글게 돌려 쌓고 있다. 구들은 잔존 길이 약 230㎝로서, 연통부의 西편과 연결되어 1m정도 정西로 향하다가 약 45° 南西쪽으로 꺾여 경사면 아래로 향하면서 유실 되어 있다. 연도부의 너비는 평균 40㎝로 계측되며, 크기 40㎝×20㎝, 35㎝×16㎝의 할석을 양변에 세워 연도를 조성하고, 크기 60㎝×30㎝, 70㎝×40㎝정도의 판석을 덮개석으로 사용하여 구들을 형성하고 있다. 4. 저수용 목곽고 성내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초기에는 점토를 이용한 토광 저수조 로 판단하였으나, 트렌치 조사 도중 목곽의 흔적이 사방에서 발견되면 서 그 존재를 확인하였다. 목곽은 평면형태가 방형에 가까운 동서 480m, 남북 450㎝의 크기이 며, 잔존깊이는 120m이다. 목곽은 풍화암반 생토면을 수직으로 굴착하 고 일부분은 생토부스러기를 채워 넣었으며, 다음으로 회색의 고운 충 전토(점토)를 사용하여 외곽을 채운다음 목곽을 이용하여 네 벽을 조성 하고 있다. 충전된 회색의 고운 점토는 약 120㎝의 두께로 조성되어 있 다. 목곽內는 다수의 석재와 기와편 그리고 불에 탄 목재가 함몰되어 있 는 상태로 발견되었다. 목곽 중간에는 크기 20×24㎝정도 되는 사각형 의 柱木이 柱木間(중심을 기준으로) 약 150㎝의 간격으로 목곽 내벽에 붙어 있으며, 사각의 각 변마다 4개씩 총 12개가 설치되어 있다. 바닥은 판재를 이용하여 수평으로 조성하고 있으며, 바닥판재 상부 에 크기가 20×20㎝되는 정사각형의 목재를 "十"자로 설치하여 바닥을 4분할하고 있다. 목곽 내에는 다량의 점질토가 채워져 있으며, 다수의 기와편과 토기 편, 그리고 목조유물을 수습하였다. 5. 출토유물 (1) 기와 이번 발굴조사에서 토기편과 다수의 기와편이 수습되었다. 특히 기와 편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양이 수습되고 있다. 백령산성에서 출토되는 기와는 문양을 기준하여 선문, 격자문, 무문 등 3가지로 분류된다. 기와의 대부분은 경질로서 고운 니질토를 사용하 고, 내면에는 대부분 포흔과 함께 통쪽흔적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또 한 내면에는 마포흔 이외에 승석문이 선명하게 남아있는 것이 다수 발 견되고 있다. 측면은 와도를 이용하여 단번에 그어 분리하거나, 재차 정면하여 분리면을 매끄럽게 처리하고 있다. 시굴조사와 마찬가지로 이번 발굴조사에서도 인장와, 명문와가 다수 출토되고 있다. 유물은 “丙”자 인장와 1점과 ‘○○○丁巳瓦’명과 ‘耳○ ○戊午瓦’등이 찍힌 인명와 다수, 그리고 이번에 새로이 발견된 “上阝” 명 인각와 등이 있다. 이중 일부는 약하게 찍혀 명문이 전혀 나타나지 않은 것도 있다. (2) 토기편 백령산성에서 출토되고 있는 토기편들은 모두 무문과 선문, 격자문 이 타날된 것으로 회청색조의 경질토기들이 있으며, 그 외에는 부분적 으로 파상문 토기편도 발견되고 있다. 이들 토기는 남문지를 포함한 주 변과 목곽고 內 등 성내지역 전반에 걸쳐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현재 출토된 토기의 대부분은 삼국말기의 백제 토기로 판단된다. <발굴조사 현황표> Ⅳ.조사결과 및 성과 금산군에서는 백령산성에 대한 정비․복원에 필요한 학술자료를 확보 하기 위해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발굴조사 결과 백령산성의 축조방 법 및 구조에 대한 많은 자료를 얻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백제사 연 구에 있어서 획기적인 자료를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먼저, 조사결과를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백령산성은 栢嶺(일명 잣고개)의 정상부에 축조된 퇴뫼식 석축산성 으로, 성의 둘레는 207m이다. 2. 성의 구조는 현문식의 남문지를 비롯해 배수시설, 보도시설, 내부 석 축, 저수용 목곽고, 구들시설 등이 확인되었다. 3. 출토유물로는 백제시대 명문와 4종류(‘丙’字銘, ‘耳停○ 戊午瓦’銘, ‘○○○ 丁巳瓦’銘, ‘上阝’銘)를 비롯해 다량의 기와편, 토기편 등이 있 다. 다음으로 조사성과를 보면 다음과 같다. 1. 栢嶺山城은 잔존상태가 매우 양호할 뿐만 아니라 銘文瓦가 다수 출 토됨으로써 산성의 축조 시점 및 사용 시기를 파악할 수 있으며, 백제 시대 산성연구에 학술적으로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기와는 백제시대 기와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하 나의 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저수용 목곽은 월평동산성에서 확인된 목곽고와 함께 백제시대 산성 내의 시설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 이다. 2. 이번에 출토된 ‘丙’字銘 印章瓦, ‘耳停○ 戊午瓦’銘 印銘瓦, ‘○○○ 丁巳瓦’銘 印銘瓦, ‘上阝’銘 印刻瓦 등은 성의 축성주체 및 축성시기를 밝힐 수 있는 근거가 될 뿐만 아니라 백제사에 있어서 부족한 문헌자료 를 보완할 수 있는 귀중한 금석문 자료라고 할 수 있다. 3. 특히 ‘上阝’ 銘 印刻瓦는 그동안 부여지역과 익산지역 일대의 유적에 서만 확인되었을 뿐 그 이외의 지역에서는 백령산성에서 처음 확인됨 으로써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왕도 5부제의 문제를 해명하는데 하나 의 근거자료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4. 백령산성은 삼국시대 말기 금산지역의 역사지리적 위치를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한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발굴과정에서 출토된 유물은 모 두 백제시대 사비기의 것으로 한정되는데, 이는 백령산성이 백제시대 말기에 축조되어 사용되다가 백제의 멸망과 함께 그 용도가 폐기된 것 임을 말해준다. 따라서 백령산성은 백제말기 신라 방어의 전초기지로 서 기능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당시 濟羅間 국경선 문 제를 비롯해 신라 5만군의 진격로 및 탄현의 위치를 파악하는데 시사하 는 바가 크다. 5. 명문와 등으로 볼 때 백령산성이 중앙에서 파견된 기술자에 의해 축 성되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는 백제의 營繕體系를 이해할 수 있는 하 나의 근거가 된다.
twitter facebook me2day 요즘
617개(13/31페이지)
 
현장소식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수
등록일
377 사천 선진리성 주변 정비사업부지내 유적 발굴 조사 지도위원회 개최 운영자 1242 2004.06.29
376 보은 삼년산성 지도위원회 운영자 1405 2004.06.28
375 청양 학암리 유적 발굴조사 지도위원회 운영자 1452 2004.06.25
374 청진6지구 신축공사부지 시굴조사 1차 지도위원회 운영자 1252 2004.06.24
373 충주 장미산성 발굴조사 지도위원회 개최 운영자 1181 2004.06.23
372 춘천 천전리 유적 발굴조사 지도위원회 개최 운영자 1570 2004.06.22
371 평택시 일대 5개 관방 유적 지도위원회 및 주민설명회 개최 운영자 1384 2004.06.21
370 청진6지구 신축공사부지 시굴조사 2차지도위원회의 개최 운영자 977 2004.06.21
369 완주 상운리 유적 발굴조사 지도위원회 개최 운영자 1438 2004.06.21
368 청진6지구 신축공사부지 시굴조사 2차지도위원회의 개최 운영자 776 2004.06.21
367 완주 상운리 유적 발굴조사 지도위원회 개최 운영자 771 2004.06.21
366 영월 흥령선원지 지도회의 개최 운영자 986 2004.06.18
365 화성 동탄택지개발사업(9지점) 발굴조사 지도위원회의 및 현장설명회 개최 운영자 1466 2004.06.18
364 화성 동탄택지개발사업(9지점) 발굴조사 지도위원회의 및 현장설명회 개최 운영자 856 2004.06.18
>> 금산 백령산성 문화유적 발굴조사 지도위원회 개최 운영자 1462 2004.06.16
362 남양주 호평구석기유적(3차)에 대한 지도회의 및 현장설명회 운영자 1064 2004.06.15
361 나주 복암리고분군 전시관건립부지 내 유적 발굴조사 지도위원회 개최 운영자 737 2004.06.15
360 나주 복암리고분군 전시관건립부지 내 유적 발굴조사 지도위원회 개최 운영자 1298 2004.06.15
359 화성 동학산유적 발굴조사 지도위원회의 및 현장설명회 개최 운영자 1206 2004.06.15
358 화성 동학산유적 지도위원회의 및 현장설명회 개최 알림 김무중 754 2004.0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