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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 은대리성 지표 및 발굴조사

2003-05-09 12:41:00
조회 1958
연천 은대리성 지표 및 발굴조사 지도위원회 1. 조사지역 :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은대리 582-14번지 일원 2. 조사기관 : 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 3. 조사경위 은대리성은 한탄강과 漳津川(또는 車灘川이라고도 한다. 여기서는 이하 장진천으로 호칭한다.)의 합류지점에 형성된 삼각형의 河岸段丘 위에 축조되었다. 현재는 은대리성 북쪽을 지나가는 37번 국도와 322 번 지방도를 연결하는 도로에 의하여 전곡 방면과 연결되어 있으나 원 래는 사방이 단애로 고립된 섬과 같은 곳이었다. 은대리성에 대한 문헌기록은 전무하다. 일제시대의 조사기록에도 이 성에 대한 조사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이 같은 은대리성은 1995년 이 후부터는 지금까지 여러 기관에 의해 조사되고 그 내용이 보고서로 발 간되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조사는 정밀지표조사나 발굴조사가 아니 고 대부분 광역조사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성의 축조 및 활용시기나 구체적인 성격을 파악하지는 못하였다. 그런데 이 같이 조사가 미진한 상태에서 성내외부 지역에 택지를 조 성하기 위한 민원이 제기되고있어 연천군에서는 민원에 대한 대책을 수립하기에 앞서 은대리성의 역사적 성격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이에 연천군에서는 본 연구소에 은대리성의 지표조사 및 시굴조사를 의뢰하 였다. 4. 조사성과 은대리성은 한탄강과 장진천의 합류지점에 형성된 삼각형의 하안단 구를 활용하여 축조되었다. 이 같은 형태의 성은 임진강 한탄강 일대에 서 보이는 특이한 성이다. 현재까지 이 같은 형태의 성은 은대리성과 함께 당포성과 호루고루성이 알려져 있다. 이는 임진강과 한탄강의 兩 岸은 단애가 형성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용암대지가 하천의 침식작용 으로 파이면서 수직단애가 형성된 것이다. 따라서 임진강이나 한탄강 은 도강이 불가능한 지역이 많다. 그런데 지류가 흘러드는 곳은 지류 에 의하여 침식된 부분이 통로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통행이 수월하 다. 이런 곳 중에서도 여울이 발달된 곳은 장비가 없어도 도강이 가능 하여 일찍부터 교통로로 활용되었다. 또한 이러한 지역은 수로를 차단 할 수 있는 요충지이기 때문에 군사적 활용가치가 매우 높은 지역이 다. 따라서 이 같은 지역에 성을 축조하는 것은 도강을 통제하고 수로 를 장악하려는 것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이들 성이 모두 고구려가 활용하였다는 공통점에 있어서 고구려의 남진 경 영과 관련하여 주목되어 왔던 곳이다. 은대리성 역시 그 동안 여러 기관에서 대략적인 지표조사를 실시하였 고 여기에서 수습된 고구려토기와 성의 형태와 입지조건을 고려하여 고구려의 활용 문제를 추정하기도 하였다. 대략적인 면에서는 호로고 루나 당포성과 대동소이할 것이나, 구체적인 면에서는 다른 성과 여러 가지 차이도 존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우선 은대리성에서는 기와가 전혀 출토되지 않고, 토기도 비교적 소량으로 출토되었다. 그에 비하 여 성의 규모는 커서 그 활용시기와 성격 문제를 규명하기가 쉽지 않았 다. 지금까지 이 같은 문제에 대하여 합리적인 해명을 하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은대리성과 유사한 호로고루와 당포성도 현재 발굴조사가 진 행 중이거나 발굴조사 결과가 정리되지 않았다. 이 같은 상태에서 은대 리성에 대한 간략한 지표조사 결과만으로 성격 규명 및 타 유적과 비교 분석을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번 조사는 은대리성에 대한 정밀지표조사와 성 내부의 경작지와 훼 손된 성벽 부분에 대한 발굴 조사를 병행하였다. 처음으로 실시되는 정 밀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이기에 은대리성의 현황파악과 축성구조를 파 악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노출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조사 결과 지표조사와 현황측량으로 전체적인 규모를 확인할 수 있었 다. 하지만 은대리성 내부의 경작지에 50개가 넘는 시굴트렌치를 시굴 한 결과 축성시기를 증명해 줄 결정적인 유구와 유물이 동반되지 않았 다. 토층은 교란되거나 경작과정에서 삭토되었다. 다행히도 동벽 내벽 일대에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溝와 개축된 내벽 기저부에서 기형을 확인할 수 있는 토기 등이 쏟아져 나와 대략적인 축성시기를 살펴 볼 수 있는 단서가 되고 있다. 1. 형태 및 내부 시설 은대리성은 한탄강과 장진천이 만나는 지점에 돌출된 단애의 상면 평 탄지에 축조된 평지성으로 볼 수 있다. 성의 평면은 이미 여러차례 조 사에서 언급된 것과 마찬가지로 삼각형 형태로 임진강안에 위치한 호 루고루성, 당포성과 유사한 형태를 하고 있다. 남벽과 일부 북벽은 임 진강과 한탄강 일대에 형성된 자연단애를 이용하고 있으며, 동벽만 평 탄지에 토석혼축으로 축조하였다. 그런데 이전 조사 결과 은대리성은 외성과 내성의 이중구조로 이루어 진 것이 확인되었다. 외성의 전체 규모는 동서 400m, 남북 130m이며, 둘레 길이는 총 1,005m이며, 면적은 26,479㎡이다. 내성의 둘레 길이 는 총 230m이며, 내부면적은 2770㎡이다. 외성 안에 내성을 갖고 있는 것은 당포성과 흡사하다. 하지만 내성에서 유물이 수습되지 않았기 때 문에 내성과 외성 선후관계는 확인할 수 없었다. 이 문제는 내성에 대 한 발굴조사 이후로 유보할 수 밖에 없다. 성 내부 시설물로는 문지 3개소, 대형건물지 1개소, 치성 2개가 확인 되었다. 문지가 개설된 지역은 성에서 지형이 낮은 지역이다. 북벽에 서 확인된 2개의 문지는 성 내부의 배수를 주로 처리하는 위치에 있다. 하지만 남벽을 통한 배수가 부분적으로 이루어 지고 있다. 남벽에서는 8개의 배수로가 확인되는데 이러한 곳은 주변 양성벽을 돌출시키고 있 으며, 단애가 발달한 지형은 그대로 성벽 위로 배수하였던 것으로 확인 된다. 성내부는 현무암이 풍화된 점질토양이기에 우수를 배수하는데 많은 고려를 한 것으로 여겨진다. 북문지 1은 현재 경작되어지는 평탄 지의 전반적인 우수를 처리했을 것으로 추정되어지며, 북문지 2는 내 성 및 대형건물지 북쪽 부분의 우수를 처리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남문 지는 암문과 같은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외부에서 잘 보이지 않으며, 강으로 내려가는 길이 협소하다. 또한 이 곳은 우수가 남문지 로 배출되는 것을 최대한 억제하였다. 대형 건물지는 남벽에 접하여 폭 3m 정도의 석재열로 둘러쌓여 있 다. 석재열이 형성하는 공간은 동서 60m×남북 30m 정도이다. 건물지 가 위치한 지역은 3개의 문지에 둘러 쌓여 있다. 대형 건물지에서는 건 물지 벽체에 사용되었던 소토된 점토가 확인되고 있다. 또한 건물지 서 쪽에서는 석전용 석재로 사용되었을 석재무더기가 2군데나 확인되었 다. 그렇다면 성내부에서 중요한 시설물이나 주거공간이 이 곳에 형성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현재 은대리성에서는 인근 관방유적에서 보이 는 적갈색 고구려 기와 및 신라기와 등 일체의 기와가 출토되지 않았 다. 이러한 사항은 신중하게 인접 성들과 검토해야 할 문제이다. 치성은 2개소에서 확인되었다. 이 들은 북문지 2와 남문지에서 확인 되고 있다. 이 치성은 기존 성벽에서 ‘ㄷ’ 자 형태로 돌출시켜 문지의 방 어력을 높이고 있다. 규모는 8m×5m(돌출길이)로 2개가 같다. 이러한 구조는 문지 주위에 방형치성을 설치하여 문지를 보호하는 것은 고구 려 산성에서 주로 확인된다. 치성은 적대(敵臺) 의 기능을 수행했던 것 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적대가 확인되는 주변의 관방유적은 포천반월 산성을 들 수 있다. 고구려 산성에서 이러한 적대가 나타나는 것은 고 구려 중기 이후부터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고구려 산성에서 보이는 치와 적대가 압록강 이북보다는 압록강 이남에 많으며, 청천강 이남의 성들에서 그 수가 늘어난다고 하고 있어, 치와 적대가 고구려 후기에 발달했을 가능성을 예시하고 있다. 또 다른 북문지 1에서는 문지를 북 벽에서 15m 정도 들어와서 축조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문지 양 성 벽이 돌출되어 곡성을 이루도록 하고 있다. 또한 동벽에서 북벽으로 회절하는 지점에서 북쪽으로 내려가는 석재 단이 확인되었다. 이 단은 폭이 20m 정도 되며 100여 m 북쪽으로 진행 되어, 성 아래 민가와 교회가 있는 곳까지 내려간다. 이 석재단의 용도 에 대해서는 기존에 밝혀진 바가 없다. 여러 가지 추측이 가능하지만 차후에 행정적 조치가 이루어져 이 부근의 조사지역이 확대되어, 전체 적인 현황과 정밀조사가 이루어진다면 이 석단의 용도가 명확해 질 것 으로 여겨진다. 2. 성벽축조방식 이번 은대리성 성벽조사 결과 은대리성에는 호루고루나 당포성처럼 장방형의 석재로 정연하게 축성한 성벽은 찾을 수 없었다. 특히 동벽 은 호로고루와 당포성이 모두 석재로 축성하였고 수차에 걸쳐서 보수 한 흔적도 보이고 있다. 또한 성벽 주변에서는 상당량의 기와편이 출토 되어 성벽 상면에 기와를 시설한 시설물이 존재하였을 가능성도 제기 되고 있다. 그러나 은대리성은 동벽의 높이가 위의 두 성에 비하여 현 저히 낮고 성벽도 토석혼축으로 축조되었으며 기와도 전혀 출토되지 않아 전반적인 면에서 위의 두 성에 비하여 활용시기나 역할에 대한 의 문이 생긴다. 그런데 성벽의 축조방식을 놓고 본다면, 은대리성의 축조방식은 지금 까지 발굴된 토성이나 토석혼축성에서 보기 어려은 독특한 방식으로 축조되어 주목된다. 우선 축조방식을 정리하면은 다음과 같다. 성벽 기저부를 조성하기 위해 구지표층을 정리하고, 황갈색 점토를 30cm~50cm 그 위에 다져 올렸다. 다시 황갈색점토 + 모래를 깔면서 성벽 중앙부에 현무암 부정 형 석재를 활용하여 2열로 석열을 쌓으면서 그 내부에는 현무암파쇄석 과 점토를 섞어서 다져 넣었다. 그 위에는 다시 점토 + 모래를 30cm~ 50cm를 덮어서 성벽을 축조하고 있다. 또한 동벽 1 절개트렌치 내벽 부 분에서는 석열 바깥쪽에서 성벽 축조시 기둥을 설치하였던 흔적이 발 견되었다. 이 기둥은 기둥 내부로 석축을 하기 위해서 설치한 것으로 보이는데 기둥 바깥으로도 석재를 쌓아 올렸다. 기둥이 있던 곳는에 석 재와 주변토사가 밀려든 흔적이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석축 후 기 둥을 그대로 두었는지 아니면 석축 후 기둥을 뺀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 다. 내벽에서는 2차례 이상 수축한 흔적이 보이고 있다. 수축 방식은 기 존 성벽이 붕괴된 상태에서 그 위에 석재나 점토를 덧씌우는 것이었 다. 초축 석축 외부에 기둥을 세우고 성 안쪽으로 석재를 덧붙였던 흔 적이 관찰되고 있다. 동벽 내벽에서는 토성의 내벽 경사면에서 흘러내리는 우수를 처리하 기 위한 시설인 溝가 확인되었다. 溝의 규모는 동서 폭 2m정도이며, 깊 이는 약 30cm정도이다. 이 溝는 동벽을 축조하면서 같이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것은 1차 개축 때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 석심 기저 부 토층의 흐름으로 보아 1차 개축까지는 존재하고 있었으나 2차 내벽 개축시에 폐기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곳 내부에서 다수의 토기편이 수 습되었는데, 1차 개축시 석심 기저부 층에서 수습되고 있다. 성벽 내부 에서도 같은 층위에서 토기편이 수습되고 있다. 이 토기들 분포상황이 나 파손형태로 보아서 구가 폐기되는 시점에서 함께 매몰된 것으로 추 정된다. 이상에서 은대리성 성벽의 가장 큰 특징은 성벽의 중앙 토축부 내․외 부에 일종의 석심과 같은 석축을 한 것이다. 이 석축은 바닥을 고른 후 1~2단 정도 석재를 다져서 기저부를 만든 후 그 위로 막쌓기 형태로 축조하였다. 석축으 바깥에는 기둥구멍이 있는 것으로 보아 축조시 기 둥을 세우고 석축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석축의 두께는 내부가 외부 에 비하여 훨씬 두꺼운데 이는 내부에 회곽도를 시설하거나나 경사를 완만히 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3. 초축 및 활용시기와 성격 문제 은대리성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여 초축 및 활용 시기 문제는 은대리 성에서 출토되는 유물이나 유구를 인근 고구려 유적과 비교하여 추정 할 수밖에 없다. 이번 은대리성 발굴조사는 비록 일부 지역에 대한 한 정적인 것이지만, 출토된 유물이 비교적 그 종류와 시대가 일정한 시기 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즉 출토 유물의 대부분은 토기편이고 철제류도 소량이 출토되었다. 특이한 점은 삼국시대 성에 서 흔히 출토되는 기와가 단 한 점도 출토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유사 한 형태의 호로고루나 당포성의 경우 후대까지 시간적으로 긴 폭을 가 지고 유물이 출토되는 상황과 비교되고 있다. 결국 출토 유물의 상황으 로 보아 이 성은 호로고루나 당포성 등 주변의 유사한 형태의 다른 관 방유적에 비하여 비교적 사용기간이 짧고 그 성격도 차이가 있었던 것 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그렇다면 초축시기는 구체적으로 언제이고 언제까지 활용되었을까? 이 문제는 규명하여 줄 수 있는 것은 출토된 토기편이다. 유구의 경우 성벽 이외에는 출토된 것이 없고 성벽도 지금까지 다른 지역에서 찾기 어려운 특이한 형태의 성벽으로 비교의 대상이 충분하지 못하다. 앞으 로 연차적인 조사가 이루어지면 사정이 변하겠지만 현재로서는 토기편 만이 축조 및 활용시기를 짐작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그러나 이 역시 후술하는 것과 같이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토기편은 크게 백제토기와 고구려토기로 뚜렷이 구분된다. 이중 95% 이상이 고구려토기이고 백제토기는 극히 소량이다. 백제토기는 모두 경질토기로 연질토기는 없다. 파편으로 출토되어 기형은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표면에 승문이 시문된 것으로 한강 유역에서 출토된 백제토기 연구성과를 참조하면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로 편년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 토기들이 초축과 관련된다면 은대리성의 축조시기 는 4세기 후반으로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백제토기의 수량이 극히 적고, 성벽이나 유구와 관련되어 출토돈 것이 아니라 모두 교란층 에서 고구려토기와 섞여서 출토되어 이 토기를 초축과 관련하여 해석 하기에 문제가 있다. 백제토기가 비교적 편년의 어려움이 없는데 비하여 고구려토기는 수 량은 많지만, 연구성과가 일천하여 편년의 폭이 매우 크다. 우선 은대 리성 출토 고구려토기의 양식적 특징을 관찰하여 보면, 지금까지 남한 지역에서 출토된 고구려토기의 양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제작 기법을 살펴보면 태토는 모두 매우 정선된 泥質의 점토를 사용하였다. 대부분 표면이 손에 묻어날 정도의 연질토기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색조는 회색, 흑색, 황색 등으로 나누어진다. 대부분 파편으로 출토되어 기종 을 구분하기 어렵지만 한강과 임진강 유역 일대에서 출토된 고구려 토 기 연구 성과를 고려하여 보면, 대체로 대상파수가 부착된 호(耳附壺, 兩耳附長胴壺)나 長胴壺, 平底壺 등의 호류가 중심인 것으로 추정된 다. 또한 일부 편으로 보아 어깨에 음각선이 시문되고, 평바닥에 비교 적 큰 원형 구멍이 있는 시루도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표면에 문양은 타날문, 암문, 음각선문 등이 확인된다. 그런데 대체로 고구려토기에서 는 타날문 형태의 문양은 그 예가 적지만, 은대리성 출토품에서는 먼 저 승문을 동체부 또는 대상파수 등에 타날하였다가 후에 정면하여 문 양을 지운 흔적이 많이 관찰되는 점이 특징적이다. 암문은 종선문과 횡 선문이 확인된다. 특히 암문은 고구려 중기 후반부터 후기까지 사용되 는 기법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은대리성의 활용시기를 설정하는데 참 고 자료가 되고 있다. 이상에서 은대리성에서 출토된 고구려 토기는 일단은 양식적으로 한 강유역 고구려유적에서 출토품과 유사한 것이 대부분으로 판단된다. 구체적으로는 차이가 있는 것이 있기도 하지만, 기형이 복원되는 것이 드물어 현 상태에서 더 이상의 비교는 불가능하다. 다만 출토품의 구성 이 대형의 호류를 위주로 구성되어 있고, 비록 후에 정면하였으나 타날 문의 형태가 많으며, 다른 유적에 비하여 흑색이나 회색으 토기가 많다 는 것은 은대리성 출토 고구려토기의 표면상의 특징으로 보인다. 그런 데 이 같은 문제는 시기적 차이보다 대체로 기종의 차이에서 발생되는 것들로 볼 수 있어서, 은대리 출토 토기의 구성상의 차이가 편년의 근 거로 활용되기는 어렵다. 따라서 기존의 고구려 토기 연구성과를 참조 하여 은대리 고구려토기는 일단 고구려 중기에서 후기에 이르는 것으 로 편년하고자 한다. 토기에 대한 복원 작업이 진행되고 있어서 구체 적인 기형이 복원된다면 좀더 편년의 폭을 줄일 수 있는 가능성도 있 다. 하지만 이번 발굴이 일부 지역을 대상으로 한 한정적인 것이고 출 토 유물도 저장용기로 한정되어 있어서 은대리성의 전체적인 편년문제 를 거론하기에는 부족하다. 이 문제는 호로고루나 당포성의 발굴 결과 나 은대리성에 대한 연차발굴을 통해서 구체화 될 수 있을 것이다. 유 적의 수 있다. 지금까지 출토된 토기를 살펴보았는데 이 중 초축시기와 관련되는 것 은 고구려토기로 추정된다. 이 같은 근거로 제시할 수 있는 것이 성벽 절개조사 결과이다. 동벽에 대한 절개조사 결과 내벽 전면에 시설된 溝 내부의 퇴적층에서 고구려토기가 집중적으로 출토되었다. 토층 조 사 결과 溝는 초축 및 1차 수축시까지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 이 후에 매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내벽 기저부와 외벽 보강부에서 도 고구려 토기가 출토되었다. 반면에 성벽의 중앙부 내외 석재열 사 이 다짐층에서는 한 점의 유물도 출토되지 않았다. 이 같은 조사 결과 로 보아 이 성벽은 출토된 고구려토기가 사용되던 시기에 축조되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초축시기를 추정하면, 이보다 앞선 시기에 것으로 보이는 소량의 백제토기가 여전히 문제로 남는다. 백제토기가 초축이 나 활용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면 어떤 이유로 은대리성에서 출토고 있 는가 하는 문제도 합리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것이다. 우선 은대리성을 축조하기 이전에 주거지나 백제가 시설한 소규모 방어시설이 있었을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 조사 결과 이를 충족시킬만 한 단서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곳이 외부와 고립되어 군사적 활용가 치는 있어도 주거지로서의 위치는 문제가 있다는 점에서 백제시대 주 거지가 있었을 가능성을 상대적으로 희박하지 않은가 한다. 또한 이 지 역이 4~5세기 백제의 北境에 해당되는 곳으로 소량의 백제토기가 고 구려토기의 사용과정에 섞여 들어갈 가능성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백 제토기와 은대리성의 관계는 아직 여러 가지 의문점만 있을 뿐 무엇이 라 설명하기 곤란한 점이 있다. 이 문제 역시 앞으로 발굴과정을 지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상에서 현재까지의 조사결과로 보아 일단 은대리성의 축조는 고구 려에 의한 것으로 추정하고자 한다. 고구려토기에 대한 편년이나 고구 려가 이 지역에 진출하였던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여 5세기 이후에 축조 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보다 정확한 시기는 아직 제시하기 어렵다. 다 만 신라 유물이 거의 출토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 이후 일단 폐성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 이후 고려나 조선시대에 성 이 일부가 단기간 사용되었을 가능성은 무시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은대리성 성격 문제를 거론하고자 한다. 기존의 조사에 서 은대리성은 유사한 형태의 호로고루나 당포성에 비하여 규모만 클 뿐 활용도 및 전략적 가치는 적었다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 는 은대리성에서 기와가 출토되지 않는 점과 성벽이 석성으로 개축되 지 않았다는 점을 근거로 한 것이다. 이번 발굴조사 결과도 이 같은 기 존의 추정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아무래도 당포성이나 호 로고루에 비하여 은대리성은 교통로로서 중요성이 덜하고 인근에 대전 리산성이나 전곡리토성 등도 있어서 이들과의 관계도 고려하여 그 성 격을 판단해야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은댈성이 호로고루나 당포성과 동시기에 축조되어 활용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아직 고구려토기에 대 한 편년체계가 정교하지 못하여 성급한 결론을 내리기 이르다. 따라서 은대리성의 성격 문제나 고구려의 방어체제에서의 역할 문제도 현재로 서는 유동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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