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로고

현장소식

충주 숭선사지

2002-12-30 13:29:00
조회 2087
충주 숭선사지 시굴 및 발굴(3차)조사 지도위원회자료 1. 용 역 명 : 충주 숭선사지 시굴 및 3차 발굴조사 2. 조사지역 : 충북 충주시 신니면 문숭리 862-2번지 일원 3. 조사면적 : 사지 11,236㎡(시굴지역 9,236㎡, 발굴지역 2,000㎡) 4. 조사기간 : 2002. 11. 4. ~ 현재 5. 조사기관 : 충청대학교 박물관 6. 조사개요 및 조사경과 숭선사지는 2차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고려 초에 창건되어 17세기 중엽 까지 법등이 이어졌던 대규모의 사찰이었음이 확인되었다. 뿐만 아니 라 금당지, 강당지, 탑지, 동,서 회랑지, 남문지, 동문지 등이 확인되었 다. 특히, 동문지는 사찰의 축선이 남북에서 동서 방향으로 바뀌었을 가능성이 제기 되었다. 금번의 조사는 2차에 걸친 발굴조사에서 확인 된 유구의 규모와 성격을 명확히 규명하고, 더불어 사찰의 축선 변화 를 규명하는데 주목적을 두었다. 조사단에서는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내용에 주안점을 두고 발굴조사 를 진행하였다. 첫째, 금당지 서쪽 대형 건물지에 대한 정밀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유구 의 성격과 규모를 밝히고자 한다. 둘째, 금당지 주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 회랑지에 대하여 정밀 발굴 조사를 실시하여 창건 당시 사찰의 규모 및 중수 연대를 파악하고자 한 다. 셋째, 사역의 동쪽에서 확인된 동문지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유 구의 규모 및 성격을 밝히고자 한다. 넷째, 사역의 남쪽에서 확인된 석축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규모 및 출입시설을 파악하고자 한다. 다섯째, 이상과 같은 발굴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추후 사지의 정비 및 복원 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7. 발굴조사 현황 이번에 진행된 조사에서는 1,2차 발굴조사시 금당지의 서쪽에서 확인 된 대형 건물지, 동문지와 석축 및 서쪽 담장에 대해 집중적으로 발굴 조사하였고, 중심사역의 동편과 석축남단 지역에 시굴 트렌치를 설정 하여 창건 당시의 가람배치와 규모를 밝히는데 목적을 두었다. 1. 창건기 숭선사는 고려초에 건립된 사찰이다. 이 같은 사실은 고려사에 광종 5 년(954) 母后(神明順成王后)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숭선사를 창건하였 다는 기록과 더불어 이번 발굴에서 출토된 연화문 수막새와 당초문 암 막새기와가 고려초기에 편년되어지기 때문이다. 창건기의 가람과 관련 된 유구는 남쪽에서부터 문지, 탑지, 금당지, 추정 영당지와 회랑지, 금 당지 남쪽의 답도, 사역의 남쪽 凸字型 석축, 북,서쪽 담장 석축, 배수 로를 들 수 있다. 이 같은 시설은 삼국시대에 확립된 가람배치의 전통 을 따라 남북자오선상에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다. 회랑지는 동,서,남,북쪽의 사방에서 확인되었다. 남쪽은 동서 12m, 남 북 8m 규모의 문지를 중심으로 동,서쪽에 각 3간 규모로 추정되고, 북 쪽도 동서 12m 70㎝, 남북 6m 규모의 중앙 건물을 중심으로 남쪽 회랑 과 같은 규모로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동쪽 회랑지는 서쪽 회 랑지 보다 약 1m 30㎝ 정도 낮게 조성되었다. 배수로는 회랑 안쪽에 조 성되어 사역 내에서 발생되는 汚水를 동남쪽에 있는 집수구에서 암거 를 통하여 금당지 남쪽 석축 밑으로 배수하였으며, 석축 남쪽 17m60㎝ 지점에서 폭 33㎝, 높이 28㎝ 크기의 출수구가 확인되었다. 창건시 중 심사역의 규모는 동서 40m, 남북 67m의 규모이다. 금당지의 규모는 동서 15m 30㎝, 남북 14m로 정면 3간, 측면 2간이고, 추정 영당지는 영당지 남쪽에 석축을 조성한 후 석축 상면에서 북쪽으 로 약 4m 50㎝ 지점에 동,서 12m 70㎝, 남,북 6m로 정면 3간, 측면 1간 규모을 조성하였다. 이 건물지는 규모로 보아 강당지보다는 신명순성 왕후의 영당으로 조성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고려 광종은 재위 2년에 아버지인 太祖를 위하여 개성의 남쪽에 大奉恩 寺를 세워 太祖願堂으로 하였으며, 또한, 동쪽 교외에 佛日寺를 세워 서 어머니인 先妣劉氏의 원당으로 삼았다. 그런데 개경의 불일사가 있 는데도 3년 뒤인 954년(광종 5)에 다시 母后(神明順成王后)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충주에 숭선사를 창건하였다. 이처럼 충주지역에 숭선사를 창건하게 된 이유는 중부내륙지방의 대표 적인 호족세력이 劉兢達로 대표되는 忠州劉氏이며, 어머니 또한 충주 유씨 가문이었던 것이 주된 원인이라 생각된다. 충주 유씨는 고려 초에 는 외척세력으로 중앙정계에 진출하였고, 정종과 광종의 왕위계승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들은 忠州市 東良面 荷川里에 있는 淨土寺法 鏡大師慈燈塔碑를 통하여 볼 때 왕실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불교계에서 의 역할도 매우 컸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광종과 충주유씨와의 관 련성 속에서 어머니의 고향인 충주에 어머니를 위한 願刹로서 숭선사 를 창건하면서 영당을 조성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상에서 살펴본 숭선사의 창건 배경과 파악된 건물지 규모 등을 종합 해 볼 때 이 건물은 신명순성태후의 영당으로 조성되었던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탑지의 규모는 동서 5m, 남북 5m인데, 탑지의 남북으로 탐색트렌치를 설정하여 토층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결과 탑지 하부의 토층은 황갈 색 풍화암반층으로 금당지와 영당지의 토층과 일치하고 있다. 또한 중 앙의 판석(186㎝×110㎝×36㎝)을 중심으로 104㎝×145㎝, 102㎝×126 ㎝ 크기의 석재와 남쪽에는 841㎝×45㎝ 크기의 석재 5매를 놓아 기저 부를 형성한 후 상면에 자연석을 놓아 형성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 한, 이번 조사에서 석탑부재로 추정되는 석재의 출현으로 석탑이 조성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탑지는 중앙에 심초석으로 추정되는 장방형의 대형 석재를 놓았고, 유구의 현상으로 보아 목탑지일 가능성 을 배제할 수 없다. 왜냐하면, 중앙에 심초석으로 추정되는 장방형의 대형석재를 놓았고, 탑지 북서쪽에 남아 있는 2개의 석재가 초석 및 기 단 석재로 사용되었을 가능이 있으며, 유구 주변에서 기와가 출토되었 기 때문에 목탑이 조성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중심사역 남단의 석축은 전체적으로 凸자형의 평면을 구성하였으며, 석축의 뒷채움은 40㎝×24㎝, 64㎝×68㎝ 크기의 자연석으로 5열의 허 튼층 쌓기하여 축조한 후 장대석으로 조성하여 마무리하였다. 이는 지 금까지 석축 축조에서 처음으로 밝혀지는 기법으로 고려시대 석축 축 조방법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하겠다. 이상의 시설을 창건시의 所産으로 볼 수 있는 이유는 각 건물의 기단 과 답도가 황갈색의 풍화암반층 위에 암갈색 점토다짐층을 조성한 후 건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암갈색 점토다짐층은 창건시의 지표 면으로 추정된다. 뿐만 아니라 건물의 기단 내부에는 풍화암반층과 흑 갈색 점토로 다짐층 위에 바로 적심이 놓여져 있고 그 하부에서 유물 이 발견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2. 1차 중창기 1182년(고려 明宗 6, 大定 22)에 변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明宗年間에 는 충주지방에 미륵리사지, 오갑사지, 의림사지 등에서 대규모 불사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숭선사지에서도 대규모의 불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뿐만 아니라 발굴조사 결과 회랑이 폐기되면서 숭선사의 축 선이 남북에서 동서로 바뀌었을 가능성이 높게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가람을 구성했던 건물로는 금당지, 영당지, 금당지 서쪽 대 형 건물지, 금당지 동쪽 건물지 및 추정 동문지를 들 수 있으며, 사역 은 동서 50m, 남북 67m의 규모로 확인되었다. 금당지는 창건시와 같이 정면 3간, 측면 2간의 규모로 칸수는 동일하 나 규모가 동서 9m, 남북 6m로 축소되었다. 영당지는 창건기의 규모가 유지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건물 규모의 변화는 보이지 않으 나, 건물의 북쪽 기단에 사용된 장대석은 창건시 심방석으로 사용되었 던 장대석을 기단석으로 재활용하여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 면 창건기 건물지에서 사용되었던 심방석과 형태와 석질이 같고, 영당 지 내부의 토층이 적갈색 점토+모래+기와층으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 다. 서쪽 건물지는 동,서 12m 30㎝, 남,북 21m 40㎝의 대형 건물이 조성되 면서 회랑은 폐쇄되었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따라서 창건시 금당지 기 단 또한 상당 부분이 매몰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건물지는 다른 건물에 비해 크고, 내부에는 불단으로 추정되는 시설이 마련되어 있 다. 뿐만 아니라 정면에서 박석을 깔았던 출입시설과 계단지로 추정되 는 유구가 확인되었고, 남쪽기단에서 폭 141㎝ 규모의 계단지가 확인되 어 정면과 남면에 각각 1개소씩 모두 2개의 출입시설이 설치되었다. 특 히 1차 발굴조사에서는 금동보살상의 頭部와 胸部가 2차 발굴조사에서 는 불상의 백호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수정이 출토되었고, 2․3차 발굴조사시 협시보살에 장식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연봉장식과 등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정황으로 보아 창건시의 금당은 용도가 전용되고, 이 건물이 금당의 기능을 지녔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동쪽으로 사역이 확장되면서 이 지역에 정면 3간, 측면 2간 규모의 문 지가 조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 시기에 이르러 숭선사의 축선이 기존의 남북에서 동서방향으로 변화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3. 2차 중창기 1579년(조선 선조 12)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같은 추정은 사 역의 축선이 다시 남,북방향으로 전환되고, 사역의 南端에 석축이 증축 되면서 다시 가람의 면모를 일신하였고, 이 시기의 유물이 전 지역에 서 고루 출토되기 때문이다. 2차 중창기 숭선사를 구성했던 건물은 금당지, 금당지 남쪽 기단 중앙 에 마련된 계단, 강당지, 금당지 동,서쪽의 온돌 건물지, 추정 우물지, 사역의 남쪽에 형성된 一字形 석축과 동쪽 석축을 들 수 있다. 금당지의 규모는 기단 석렬과 초석의 관계를 고려할 때 정면 3간, 측면 2간으로 추정되는데 1차 중창기 건물지보다 규모가 더욱 축소되면서 추정 금당지의 동쪽과 서쪽에 온돌시설의 건물이 창건기의 금당지 기 단 상면에 들어서고 있다. 금당지는 건물의 기단 정면에 계단이 다시 설치되고 있고, 금당지의 동,서쪽에 요사체로 추정되는 시설들이 조성 되고 있으며 남회랑 상면에서 온돌시설을 한 건물지가 확인되고 있다. 따라서 이 건물 이외에는 금당으로 추정되는 유구가 확인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 시기에 이르러 다시 금당의 기능을 회복한 것으로 추정된다. 강당지는 추정 영당지 기단 상면에 적심석이 남아 있으나, 대부분 훼손 되어 전체적인 규모는 파악할 수 없다. 그러나 적심의 조사를 통하여 볼 때 최소한 2번의 개축이 이루어졌다. 이는 금당지가 기능을 회복하 면서 강당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건물이 조성되었던 것이 아닌가 추 정된다. 寺域은 금당의 동,서쪽에 온돌시설을 한 건물지가 조성되었다. 사역 南 端의 석축은 凸자형에서 동,서쪽을 증축하여 一字形으로 변화되었으 며, 석축 상단에는 여러 곳에서 건물지의 흔적이 확인되고 있다. 東端 에서는 자연석 막쌓기한 석축이 마련되면서 사역의 남동쪽이 확장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숭선사의 사역은 동서 48m 남북 67m 규모로 추 정된다. 그러나 현재 경작 중인 동쪽 고추밭지역을 시굴 조사한 결과 건물지의 유구가 확인되어 사역이 동쪽으로 확장되었을 것으로 추정된 다. 이상과 같은 정황을 보아 1479년(成化 15) 및 1551~1561(嘉靖 29 및 40)의 명문은 1479년부터 개별 건물에 대한 소규모의 불사가 진행된 것 을 반증하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 같은 지엽적인 불사가 1579년에 이 르러 대대적인 불사로 발전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이때에 이르러 寺名이 변경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國寺銘 명문기와가 출토되었고, 이 기와가 萬曆年間 己卯年銘 기와와 같은 시기에 조성 된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한편 숭선 마을 노인들은 이곳에 希國寺 가 있었다고 하는 傳言은 명문의 내용과 합치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후 숭선사는 금당지 앞에서 출토된 백자 연봉장식이 17세기 중엽의 건축물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18세기의 백자가 출토되고 있어 18세기 까지는 사찰의 경영이 계속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출토되는 萬曆年間 己卯年銘 기와 대부분은 불에 탄 흔적이 남아 있음을 보아 임 진왜란시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숭선사가 위치한 지역은 왜군의 북상로에 위치하고 있고, 신립장군이 배수의 진을 치고 격전을 벌였던 탄금대가 그리 멀지 않은 지역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2. Ⅱ지구 Ⅱ지구는 중심사역의 동편지역으로 사역의 범위를 가늠하기 위하여 시 굴하였다. 시굴은 6구간으로 나누어 2m×10m 크기의 트렌치를 11기를 조사하였다. 조사결과 ‘가’ 구간과 ‘바’ 구간을 제외하고는 건물지의 흔 적이 확인되었다. Ⅱ지구의 토층은 전반적으로 크게 3개 층으로 나누어진다. 1층 : 부식토층(25㎝) 2층 : 흑갈색 점토+모래+기와층(43㎝) 3층 : 황갈색 점토+모래층 Ⅱ지구에서 확인된 건물의 기단석렬과 배수로 등의 유구는 대체로 황 갈색 점토+모래층에 조성되어 있으며 중복된 유구의 경우는 흑갈색점 토+모래+기와층에 조성되어 있어 최소한 2차례 이상 조성된 것으로 추 정된다. 전체적인 유구의 성격은 차후에 확장조사가 이루어져야 알 수 있다. 3. Ⅲ지구 Ⅲ지구 중심사역의 남쪽지역으로 유구의 존재여부를 확인하기 위하여 시굴하였다. 시굴은 2m×10m 크기의 트렌치를 5기를 설정하여 조사하 였다. 조사결과 전체 트렌치에서 건물지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Ⅲ지구의 토층은 전반적으로 크게 3개 층으로 나누어진다. 1층 : 부식토층 2층 : 흑갈색 점토+모래+기와층 3층 : 흑갈색 점토+모래+불먹은 기와층 4층 : 황갈색 점토+모래층 Ⅲ지구에서 확인된 건물의 기단석렬과 배수로 등의 유구는 대체로 황 갈색 점토+모래층에 조성되어 있으며 중복된 유구의 경우는 흑갈색점 토+모래+기와층에 조성되어 있고 토층 상황으로 보아 최소한 3차례 이 상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 지역은 최소한 2개의 단이 마련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적인 유구의 성격은 차후에 확장조사가 이루어 져야 알 수 있다. 8. 조사 성과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이번 발굴조사는 고려시대 초기에 창건되어 3 차에 걸쳐 가람배치에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였다. 특히 창건시 에는 삼국시대 이래 확립된 가람배치를 따라 남북자오선상에 일직선으 로 배치하고 회랑을 돌렸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 동안 진행된 조사결 과를 바탕으로 조사자의 의견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숭선사지는 충주 劉門과 고려왕실이 관련된 최초의 유적으로 출 토유물 또한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어 역사적, 미술사적으로 보존할 가 치가 높다. 따라서 충주시에서는 숭선사의 사역으로 추정되는 전 지역 의 토지를 매입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현재까지 진행된 발굴조사는 숭선사의 전체사역으로 볼 때 극 히 일부분에 해당하는 지역을 대상으로 하고 있고, 일부 시굴 지역에서 도 건물지의 흔적이 확인되고 있다. 따라서 사역전체에 대한 연차적인 발굴조사 계획을 수립하고, 보다 구체적인 장기 마스터플랜을 작성해 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둘째, 3차에 걸친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숭선사의 중심사역은 삼국시대 의 가람배치를 따르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차후에 발굴조사가 완료되면, 조사된 지역에 대한 정비를 진행해 역사의 교육장으로 활용 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여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셋째, 중심사역 남단에 조성된 석축은 자연석을 사용하여 5열의 뒷채움 을 한 후에 전면에 장대석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이는 고려시대 석축 축조방법이 최초로 밝혀진 것으로 건축사적으로 볼 때 정비해 보존할 가치가 높다. 넷째, 3차에 걸치 발굴조사와 시굴조사를 통하여 볼 때 유구층은 지표 면과 가까워 경작으로 인하여 계속 훼손되어 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 으로 예견된다. 따라서 숭선사지에 대한 보존 방안이 적극적으로 검토 되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twitter facebook me2day 요즘
617개(17/31페이지)
 
현장소식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수
등록일
297 완도 보길도 윤선도유적 발굴조사 운영자 2092 2003.03.24
296 나주 금성관 동.서익헌지 복원 발굴조사 운영자 2114 2003.03.24
295 현장설명회 자료 유병일 2083 2003.02.19
294 울주 신화리유적 운영자 2331 2003.02.07
293 울주 신화리 경부고속철도 언양보수기지내 유적 현장설명회(2/7) 운영자 1121 2003.02.07
292 大田 加午宅地開發事業地區內 加午洞遺蹟 指導委員會資料 운영자 2284 2003.02.05
291 대전 가오동유적 현장설명회(2/5) 운영자 1086 2003.02.05
290 정읍 신정동 유적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2595 2003.01.15
289 울주 남천초등학교 신축부지 발굴조사 운영자 2263 2003.01.14
288 나주읍성 동문지(성벽,옹성지) 발굴조사 운영자 1854 2003.01.10
287 나주읍성 동문지 현장설명회(1/10) 운영자 883 2003.01.10
286 하남 이성산성 발굴조사 운영자 2470 2002.12.30
>> 충주 숭선사지 운영자 2088 2002.12.30
284 충주 숭선사지 시·발굴조사 현장설명회(12/30) 운영자 930 2002.12.30
283 제천 신월동 유적 운영자 2154 2002.12.26
282 제천 신월동 신월토지구획정리사업지구 현장설명회(12/30) 운영자 930 2002.12.26
281 하남 교산동 유적 발굴조사 (제4차) 운영자 2277 2002.12.24
280 하남 교산동 유적 현장설명회(12/26) 운영자 919 2002.12.24
279 밀양시 교동유적 지도위원회 및 현장설명회 개최안내 밀양대학교박물관 1899 2002.12.17
278 울진 덕신리 유적 발굴조사 운영자 2620 2002.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