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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곡리 적석총 발굴조사

2002-10-16 15:57:00
조회 2505
백제건국의 의문을 풀어 낼, 고고학적 열쇠 발굴 -연천 학곡리 백제적석총의 발굴로 『삼국사기』 백제초기기사의 신 빙성이 더욱 입증되고, 그 건국주체의 실체를 밝힐 수 있는 단서 확보- 기전문화재연구원(원장 장경호)는 연천군 백학면 학곡리에 소재하는 백제적석총 1기에 대한 발굴조사를 완료하고, 그 결과를 현장지도위원 회의와 함께 공개하였다. 조사지역은 임진강 중류에 위치하고 있는데, 바로 인접한 지역에 백제 북부의 치소로 추정되는 육계토성과 주월리 주거유적이 있어, 수년 전부터 학계의 주목을 받아 왔던 곳이다. 이번 발굴된 학곡리 적석총은 강가에 만들어진 모래언덕 위에 독립적 으로 입지하고 있으며, 축조방식은 사구의 상단부를 일정한 높이로 정 지하여 그 위에 적석부를 쌓았다. 적석부에는 현재까지의 조사로 4개 의 묘곽이 확인되었다. 묘곽들은 서로 연접하고 있고, 특히 두 묘곽이 만나는 벽체는 격벽과 같은 모양으로 외벽으로 되어있다. 이들 묘곽과 의 관계는 주곽과 부곽의 개념으로 보다는, 각각의 묘곽이 시간적인 차 이를 두고서 연차적으로 덧대여 조성된 것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묘곽 의 벽체는 장타원형의 천석을 이용하여 종축하였는데, 한면에 대해서 는 기저부를 따라서 기다란 돌을 세워서 벽체를 보강하였다. 이는 고구 려 적석총에서 확인되는 특징으로 향후 이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요구 된다. 유물은 전형적인 백제토기인 타날문토기를 비롯하여 낙랑계토기 와 경질무문토기가 공반출토되고 있는 점이 특징적이며, 토기 이외에 도 구슬목거리, 청동방울, 관옥 등이 수습되었다. 유적의 축조연대는 전반적인 유물상이 3세기후반 4세기 전반으로 편 년되는 파주 주월리 주거유적보다 상대적으로 빠르고, 토기에서 고구 려계 유물은 확인되지 않는 반면, 낙랑계 토기가 확인되며, 경질무문토 기가 공반 출토되는 점을 미루어 적어도 기원 후 2-3세기 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적석총이 다곽식으로 장기간의 누차적인 축조과정을 거쳤을 것으로 판단되고, 그 묘제가 고구려 적석총의 그것 과 상통하고 있으므로, <<삼국사기>>의 초기기사를 따를 경우, 고구 려 유이민이 남하하는 기원전후에 축조되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 할 수 없다. 이번 발굴에서 서울 석촌동 적석총보다 시기적으로 앞서는 고구려계 통에 속하는 백제의 다곽식 적석총이 확인된 사실은 중요한 역사고고 학적 의미를 지닌다. 우선, 이번 발굴로 적어도 2세기를 전후하여 고구 려유민이 남하하였고, 그들이 한강과 임진강유역을 영역으로 삼을 만 큼 고대국가로 발전하였던 사실이 어느 정도 입증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기원후 3세기까지 백제는 마한의 일 소국에 불과하였다는 『삼국 지』위서 동이전의 기록을 의심케 하고, 오히려 일부 학자에 의해 불 신 당했던 『삼국사기』 초기기사를 신뢰케하는 고고학적 증거로 평가 된다. 다음으로, 전형적인 백제의 타날문토기가 다량으로 수습되어 풍 납토성 출토품과 비교 검토할 경우, 현재 자료 부족으로 체계적인 편년 안이 마련되어 있지 않는 한강유역 백제토기의 편년 설정에 표지유물 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적석총이 고구려의 영역이 었던 북한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고, 특히 임진강 상류의 황해 도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어, 향후 통일의 시대를 맞아 남북한 공동발 굴 및 연구를 위한 우선순위의 유적이라는 점에서도 학문외적인 의미 가 있다. --------------------------------------------------- 연천 학곡제 개수공사지역 내 학곡리 적석총 발굴조사 회의자료 1. 조 사 명 : 연천 학곡제 개수공사지역내 학곡리 적석총 발굴조사 2. 조사지역 : 경기 연천군 백학면 학곡리 발굴조사 현장 3. 조사기간 : 2002년 6월 7일~ 현재 Ⅰ. 유적의 위치 및 환경 학곡리 적석총은 행정구역상으로는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학곡리 20, 20-1번지 일대에 위치하며 지도상으로는 북위 37° 57′47″~54″, 동 경 126° 55′ 58″~57′20″에 해당한다. 유적은 임진강 중류에 형성된 하안 충적대지상에 자리한다. 유적의 남쪽으로는 임진강이 흐르고 반대쪽 강안은 현무암 단애를 이룬다. 유 적의 후방, 즉 북쪽으로는 전답지가 펼쳐져 있으며, 좌우로는 학곡제 개수를 위한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유적이 자리한 충적대지에는 이 적 석총과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된 학곡리 지석묘을 비롯한 선사시대 유 물산포지가 확인되고 있다. 지난 2001년에 실시된 시굴조사 결과 선사 시대 취락유적의 중심부는 현재 학곡리 마을이 자리한 곳에 분포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적석총의 주변에서 조금 떨어진 하류에는 주월리 백제 주거지와 육계 토성이 있으며 그것과 연하여 신라의 칠중성이 구읍지역에 있다. 한 편, 임진강유역에서 학곡리적석총과 동일한 묘제양식을 보이는 것으로 는 삼곶리 적석총을 비롯하여 , 현재 발굴 조사가 계획 추진중인 횡산 리 적석총, 삼거리, 우정리, 동이리, 신답리, 원당리 적석총 등 10기가 분포하는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 이렇듯 이 학곡리 적석총이 자리한 구 릉일대는 한성백제시대 주요유적이 집중 분포하는 지역으로 학술적으 로 매우 주목받는 지역이다. Ⅱ. 조사경과 유적이 위치한 사구는 충적대지의 끝자락으로 임진강변과는 약 50m 정도 떨어져 있다. 그런 까닭에 집중호우 시 강물에 의한 직접적인 피 해가 있어왔다. 이에 서울지방국토관리청은 충적대지의 강 안쪽 가장 자리를 따라서 제방공사를 계획하게 되었고, 본 조사는 그에 따른 구제 발굴의 성격으로 실시되었다. 조사 전 적석총이 자리한 자연사구는 훼 손이 심한 상태로 바로 인접한 교회 수양관의 건립 등 으로 서남쪽의 상당 부분이 훼손되어 있었으며, 적석총의 남사면은 수양관 건립 시 다시 쌓아 축대로 이용하였음이 확인되었다. 또한 북사면도 후대의 삭 토로 인하여 적석부를 제외한 지역이 비스듬히 삭토 되어있었다. 발굴조사는 적석총의 상면과 사면에 위치한 잡목과 잡초들을 제거하 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적석총의 동사면과 남사면을 제외하고는 전반 적으로 강물의 범람과 나무를 심는 과정에서 유입된 교란토가 적석부 를 덮고 있어 이를 제거한 후 우선적으로 평면도를 작성하였다. 평면도 의 작성은 3차원 디지털 스캔을 이용하여 작성한 후 수정 보완하였다. 유구는 잡목 교란토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상면 중앙에서 남북방향의 석렬이 확인되어 이 석렬이 삼곶리 적석총의 경우처럼 동서양분의 경 계부분인 것으로 판단하고, 이를 기준으로 상면을 동서 2개 구역으로 나누었다. 조사는 적석이 두껍게 남아있는 동쪽 면을 먼저 조사하였으 며, 축조재료가 둥근 천석 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매장 주체부의 평면 윤곽선 확인에 중점을 두고 최상단 에서부터 수평을 유지하여 돌을 걷 어 내었다. 매장 주체부의 윤곽이 부분적으로 확인된 유적에 대해서는 유구 윤곽 방향을 고려하여 걷어내는 돌의 두께를 조절하였다. Ⅲ. 조사내용 1. 구릉 적석총이 자리한 구릉은 자연제방상의 모래언덕으로서 남쪽으로는 약 50여m 떨어져 임진강이 북동에서 남서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구릉 의 평면형태는 동서방향이 길고 남북방향이 짧은 장타원형이다. 동단 부가 가장 넓으며 서쪽부로 갈수록 폭이 좁아진다. 원래 자연제방의 역 할을 한 구릉은 동사면 가장자리에서 강과 평행되게 마을 앞쪽의 자연 제방과 연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볼 때 전술한 바와 같이 남쪽이 유실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 구릉의 북쪽에는 잔디가 조 성되어 있었다. 구릉의 동쪽은 집중호우로 인해 구릉이 일부 파괴되어 적석부에서 단이 지는 형태를 하고 있다. 구릉 북동쪽에는 다른 부분에 비해 돌들이 많이 확인되었으며 특히 북동쪽 가장자리에는 적석부에서 이어져 오다가 약간의 단을 두고 쌓 여진 돌들이 확인되고 있다. 적석부 사면에서 흘러내린 것으로 보기에 는 돌들이 일정한 형태를 이루고 있어 이것이 적석총과 동시기에 쌓여 졌는지 아니면 후대에 쌓여진 것인지는 조사가 더 진행되어 보아야 분 명하게 알 수 있겠다. 또한 적석부의 남서쪽은 건물을 지으면서 남동쪽에 비해 구릉이 많이 파괴되어 적석총의 잔존형태가 동쪽에 비해 좁아지는 모양을 띤다. 구릉의 조사는 구릉 북사면의 중앙에 적석부의 윤곽선과 성토여부를 파악하기 위한 폭 2m의 탐색 트렌치에 병행되어 실시되었으며 조사 전 이곳은 홍수피해로 구릉 사면이 절반 이상 파괴되었으며 사면에서 흘러내린 돌들이 어지럽게 노출되어 있었다. 트렌치는 사면의 하단 가 장자리로부터 적석부의 하단으로 부분 진행하였다. 조사결과 토층에 는 판축등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자연적인 모래층으로 확인되었다. 구릉 서쪽부분은 적석부가 끝나면서 자연제방으로 연결된다. 무문토 기편 등이 확인되어 주거지의 부존 여부를 파악하기 위하여 적석부가 끝나는 부분에서 서쪽방향으로 길이 7.5m, 폭 1.5m의 탐색 트렌치를 설 정하였으나 별다른 유구는 확인되지 않았다. 2. 적석부 (1) 현상 적석부의 전체적인 형태는 동서방향이 길고 남북방향이 짧은 장타원 형이다. 적석부의 규모는 25m×10m이며, 동단부가 가장 넓고 서쪽으 로 가면서 좁아진다. 적석부의 상면은 비교적 평탄하며 동쪽이 서쪽에 비해 적석이 두껍게 남아 있었다. 잡목 제거 후 상면 동쪽과 중앙에는 함몰부가 확인되었으며, 중앙의 함몰부는 남북방향으로 동서쪽을 구분 하듯이 움푹 들어가 있는 형태였다. 이 함몰부에서는 남북방향으로 석 렬이 뚜렷하게 보이고 있어 적석총의 동서를 구분하기 위한 경계부분 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판단되었다. 중앙 함몰부의 석렬을 기준으로 편 의상 동서로 구분하였다. 1) 동반부 동반부의 적석은 서반부에 비하여 적석이 상대적으로 두텁게 남아 있다. 특히 동남쪽 가장자리 부분이 가장 두껍다. 조사는 최상단부터 수평을 유지하여 한 겹 정도 돌을 걷어내면서 인위적인 유구의 흔적을 찾는 데에 주력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자연상태의 크기 40-50cm 정도 의 하천석을 길이방향을 따라 면맞추기 한 인위적인 석렬이 일정한 구 역을 따라 확인되었다. 그리고 구획은 3개의 장방형을 방형 내에 모아 서 배치한 형태였다. 즉 동서방향으로 장방형의 석렬이 확인되고 그 남 쪽 선과 바로 접하여 직각으로 두 개의 장방형 석렬이 배치된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이 중 장축 남북향의 장방형 석렬은 남쪽 끝단이 멸실 된 형태를 취하여 기본적인 형상은 ‘ㄷ'모양을 띠고 있었고, 두 개를 연 접했을 때에는 ‘ㅌ’모양이었다. 이에 조사단은 3개의 장방형 석렬이 묘곽 혹은 부장곽의 시설일 가능 성을 염두에 두고 1호곽, 2호곽, 3호곽으로 명명하고 조사를 진행하였 다. 여기서 1호곽은 장축 동서방향의 묘곽을, 2호곽은 장축 남북방향 의 묘곽 중에서 동쪽의 것을, 3호곽은 서쪽의 것을 지칭한다. ① 1호곽 동쪽 상면의 중앙에서 북측으로 치우쳐서 위치하며 남벽에 접해서 2호 곽이 연접되어 있다. 묘곽의 평면형태는 장방형으로 동­서 방향으로 길 다. 규모는 동서 2.7m 남북 1.0m 깊이 0.7~1.1m 내외이다. 묘곽은 강 돌을 이용하여 축조하였으며 남벽이 가장 높게 남아 있으며 벽면도 고 르다. 이에 비해 동․서․북벽은 처음 유구 확인 시에 드러난 최상단의 열을 제외하면 하단부로 갈수록 벽선은 고르지 않다. 남벽은 0.3~0.5m 내외의 긴 타원형 천석을 긴변이 서로 접하도록 쌓 았으며 벽면은 어느 정도 고르게 면을 맞추고 있다. 또한 남벽의 하단 부에는 벽면 전체에 10개의 돌이 세워져 있다. 이처럼 세운 돌로 벽을 조성한 것은 벽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한 것 으로 생각되는데 동․서․북벽에서는 보이지 않고 있어 축조과정에서 구조적인 역학관계를 고려한 시설로 파악된다. 즉 묘곽 조성 시에 남 벽에 한해서만 돌을 세워 벽이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고 나머지 세벽은 남벽과는 달리 0.3m 내외의 돌로서 바깥쪽으로 맞물려 돌을 쌓았을 것 이며, 남벽을 먼저 쌓은 후 나머지 세벽을 쌓은 것으로 판단된다. 북벽은 상단에서 1.5m 떨어져 경사면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소형돌로 무너짐 방지를 위해 서로 맞물려서 벽면을 고려하지 않은 채 쌓다가 처 음 노출된 높이에서 열을 맞춘 것으로 판단된다. 동벽과 서벽은 북벽 에 비해 작은 돌들이 맞물려 있는 현상이 비교적 덜하지만 남벽에서와 같이 면이 고르지 않으며 노출 시 확인된 상단만이 열을 이루고 있을 뿐이다. 현재 남벽은 6~7단 정도 남아 있으며 다른 세 벽은 층단 구분 이 애매하지만 5단 정도로 추정된다. 묘곽의 바닥은 특별한 시설을 하지 않고 모래층(구지표)을 그대로 이 용한 것으로 파악되었는데 조사 당시 원래 바닥시설이 있었을 가능성 을 염두에 두고 상부 압력에 의해 무너지거나 원형이 이그러져 모르고 지나갈 수 있어서 조심스럽게 조사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바닥 면의 바 로 위에서 확인된 돌들이 매우 불규칙하며 높낮이를 달리하여 확인되 어, 이를 통해 볼 때 바닥면에 돌을 사용하여 시상을 마련하지는 않았 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만일 시상을 마련하였다면 납작한 강 돌 등을 사용하여 일정하게 높이를 유지하였을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 이다. 즉 아무리 상부의 압력이 크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원형을 유 지하였을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내부에서는 뼈 조각을 비롯하여 토기편, 구슬이 출토되었다. 뼈는 서 벽 아래 상단하 0.5m 내외의 깊이에서 여러 조각이 집중되어 확인되었 다. 묘곽 내에서 유물은 서벽을 중심으로 하는 서쪽부에서 주로 출토되 었다. 토기는 적갈색연질타날문토기편과 회백색연질토기편, 흑색토기 편이 소량 확인되었다. 흑색토기편은 동체부편으로 횡방향의 침선문 이 동체 상단으로 돌아가며 그 아래쪽에 승선문이 종방향으로 타날 되 어 있다. 적갈색연질토기는 북서벽 모서리의 벽면을 정리하는 중에 주 로 출토되었으며, 구슬은 체질을 통하여 3점이 수습되었으므로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② 2호곽 1호곽의 남벽 동쪽에 연접되어 배치되어 있다. 잔존하는 평면형태는 남쪽에 유실되어 ꡐㄷꡑ자형을 띠고 있으나 장방형으로 추정된다. 잔존 규모는 남북 2.3m, 동서 2.0m 내외, 깊이 1.2m 이다. 곽은 1호곽과 마 찬가지로 0.3m~0.5m 내외의 강돌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동벽의 벽면 안쪽에는 1호곽의 남벽처럼 바닥선을 따라 세워진 돌이 10개가 확인되었다. 이들 세워진 돌은 묘곽의 벽면을 지탱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북쪽 가장 끝에는 2개의 돌이 좌우로 겹 쳐져 있다. 서벽은 남사면의 단면에서 서쪽 바깥쪽에 1기의 세워진 돌 이 확인되어 서벽 바깥쪽에도 세워진 돌이 더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북벽은 1호곽의 남벽으로 벽면 안쪽은 면이 고르지 않다. 돌의 크기는 하층으로 갈수록 넓어진 단면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벽 을 축조할 당시 벽의 안정성을 고려하여 넓게 축조한 것으로 추측된 다. 동벽과 서벽의 경우에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벽면의 안정성을 고려 한 것으로 보인다. 바닥은 1호곽에 비해 납작한 강돌의 등면을 고르게 맞추고 있는 양상 으로 시상의 가능성이 엿보인다. 내부에서는 소량의 토기편을 비롯하여 구슬류 59여점과 청동환 1점 및 다량의 뼈조각들이 출토되었다. 뼈들은 바닥으로 생각되는(구지표) 에서 약 20cm 높이 내의 숯이 섞인 흑색부식토층에서 주로 확인되었 다. 구슬류는 중앙과 남쪽의 뼈와 숯이 섞인 흑색부식토층에서 15점 정 도가 출토되었으며 체질을 통하여 44점 정도 수습하였다. 청동환은 고 리의 일부가 깨진 상태로 동벽의 중앙 바닥에서 출토되었다. 지름 1.8cm, 두께 2mm 정도이다. ③ 3호곽 2호곽의 서측에 연접하여 조성되었으며, 잔존하는 크기는 1.3m×1.8m ×0.7m내외로 현재 조사가 진행 중이다. 동벽 안쪽에서 세워진 천석 6 매가 확인되었으며 소량의 토기편과 구슬 16점이 출토되었다. 토기편 들은 묘곽 내에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었으며, 구슬류는 다수의 관옥을 포함하여, 중앙부에서 집중적으로 노출되었다. (2) 서반부 서반부의 적석은 동반부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얇아 0.6m 정도밖에 남 아 있지 않다. 그리고 원래 ‘⊃’ 모양의 평면형태 였던 것으로 파악되는 데, 후대의 훼손으로 인하여 전체의 2/3 이상이 멸실되어 지금은 매장 주체부의 일부분만이 잔존한다. 조사는 최상단부터 수평을 유지하여 한겹 정도 돌을 걷어내면서 인위적인 유구의 흔적을 찾는 데에 주력하 였다. 그런 과정에서 자연상태의 크기 40-50cm 정도의 천석을 길이방 향을 따라 면 맞추기 한 인위적인 남북방향의 석렬 7개 정도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 모양으로 확인되었다. 이 가운데 동반부와 경계 를 이루는 중앙 석렬과 연접하여 평면 ‘ㄷ’자 모양의 윤곽이 확인되었 다. 이에 조사단은 이를 묘곽으로 추정하고 4호곽으로 명명하고 조사 를 진행하였다. ① 4호곽 동반부의 1호곽 서벽에서 서쪽으로 2.6m 떨어진 곳에 동벽이 위치하 며 1호곽의 북쪽석렬과 같은 선상에 북벽이 위치하고 있다. 묘곽의 형 태는 남북방향이 긴 장방형으로 잔존하는 규모는 2.4m×1.7m×0.6m내 외이다. 묘곽은 2호곽과 마찬가지로 0.3m~0.5m의 강돌을 이용하였고 남벽은 유실되었다. 서벽과 북벽의 경우 1호곽처럼 벽면이 뚜렷하지 않 으며 남아 있는 층단은 3~4단 정도이다. 세워진 돌은 동벽에만 있는 데 6개가 등간격으로 배치되어 있다. 출토유물은 토기편과 청동방울 1점, 구슬 18점 등이다. 3. 출토유물 (1) 토기 대부분 편으로 출토되어 전체 기형은 확실치 않지만, 부위별 만곡의 각도나 경부의 꺽임 등으로 볼 때 타날문 단경호류가 주를 이루는 것 으로 판단되며, 경질무문토기의 제작기법이 사용된 단경호류의 토기편 도 확인된다. 타날문 단경호류는 저부에는 교차승문, 동체부 이상은 승 석문을 타날하였으며 승석문의 경우 동체상단으로 가면서 횡침선의 간 격이 현저히 좁아지는 특징을 보인다. 이밖에 낙랑토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회흑색 호와, 경부하단에서 동체로 꺽이는 부분에 각진 시문구의 끝부분만을 살짝 눌러 거치문의 효과를 낸 승석타날문호, 격 자타날의 연질토기편등이 출토되었다. (2) 구슬류 마노, 유리등과 재질미상의 석제를 사용하였으며, 환옥과 관옥 두가 지 형태가 있다. 마노와 석재를 사용한 환옥의 경우 마연상태가 양호하 지 않아 이그러진 형태의 것들이 많으며, 유리제의 경우 역시 마무리 가 완전하지 않다. 관옥은 대부분이 유리제인데, 원통형으로 중앙부분 에 구멍이 있다. (3) 청동기류 주조품으로 추정되는 청동방울 1점과 청동환 1점이 출토되었다. (4) 철기류 2점이 출토되었는데, 두점 모두 파손되어 정확한 용도를 알기 어렵다. Ⅳ. 조사성과 1. 유적의 입지 연천 삼곶리 적석총 등 임진강 유역과 한강 상류지역에서 확인되는 적 석총 등과 동일하게 하안대지의 자연사구 위에 독립적으로 입지한다. 2. 유구 (1) 기초부 자연사구의 상단부를 일정한 높이로 정지하여 그 위에 적석부를 쌓았 다. 이는 각 묘곽의 바닥면의 높이가 동일하고, 적석부 기저부의 높이 역시 바닥면의 그것과 일치하는 사실로 알 수 있다. (2) 즙석 현재 자연사구의 파괴가 심하여 정확한 실상을 알기 어려우나 집중호 우 시 강물의 흐름에 직접적인 공격을 받는 사구의 동쪽면에 대해서는 즙석 시설이 원래부터 존재하였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3) 부석시설 현재 상태에서는 부석시설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았으나, 사구의 동쪽 끝부분과 서쪽 끝부분이 평탄하고 유구가 없어, 일정한 활동을 위한 공 간이 확보되어 있다. 만약, 부석시설이 제의를 위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면 상기한 사구 동서양단에 있는 평탄지의 쓰임에 대해서도 차후 관심을 갖고 조사를 진행해야 하겠다. (4) 묘곽 현재까지의 조사로 동반부는 3개의 묘곽이 확인되었다. 서로 연접하 고 있고, 특히 두 묘곽이 만나는 벽체는 격벽과 같은 모양으로 외벽이 되어있다. 이들 묘곽간의 관계는 주곽과 부곽의 개념보다는 각각의 묘 곽이 시간적인 차이를 두고서 연차적으로 덧대여 조성된 것으로 해석 된다. 이에 대해서는 차후 좀 더 정밀한 조사를 통하여 검토되어야 하 겠다. 묘곽의 기본적인 평면형태는 장방형이 기본이었다고 생각되나, 남쪽으로 치우친 2호, 3호, 4호는 현재 남벽이 멸실되어 있다. 묘곽의 벽체는 장타원형의 천석을 이용하여 종축하였는데, 한면에 대해서는 기저부를 따라서 기다란 돌을 세워서 벽체를 보강하였다. 이는 고구려 적석총에서 확인되는 특징으로 향후 이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요구된 다. (5) 바닥시설 현재 2호분 에서는 바닥에 천석을 깔아서 특별한 시설을 가한 흔적이 나타나지만, 나머지 묘곽은 모두 정지한 바닥 면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 다. 원래는 유기물질로 바닥 시설을 하였을 개연성은 있으나, 그 존재 를 확인할 수 없다. (6) 기단 현재까지 조사결과로는 기단의 존재여부를 분명히 알 수 없다. 즉 기 단축조를 위한 하부석으로 추정할 수 있는 기단석이 확인되지 않아서 기단의 존재여부를 분명히 알 수 없다. (7) 원상 현재 남쪽 부분에 자리한 묘곽들의 남벽이 모두 잘려있는 사실로 미루 어, 원래는 강쪽으로 적석부가 적어도 3-4m 이상은 있었을 것으로 추 정된다. 따라서 현재의 상태는 전체의 2/3도 남아 있지 않다고 판단되 며, 특히 서반부는 사구뿐만 아니라 적석부 역시 심하게 훼손되었다고 할 수 있다. 3. 축조연대 전반적인 유물상이 3세기후반 4세기 전반으로 편년되는 파주 주월리 주거유적보다 상대적으로 이르고, 토기에서 고구려계 유물은 확인되 지 않고 낙랑계 토기가 확인되며, 경질무문토기가 공반 출토되는 점을 미루어 적어도 기원 후 2-3세기 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적석총이 다곽식으로 장기간의 누차적인 축조과정을 거쳤을 것으 로 판단되고, 그 묘제가 고구려 적석총의 그것과 상통하고 있으므로, 『삼국사기』의 초기기사를 따를 경우, 고구려 유이민이 남하하는 기 원전후에 축조되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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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 장흥탐진댐 수몰지구내 발굴조사 운영자 1959 2002.10.04
246 장흥 탐진댐 수몰지구내 발굴조사(10/5) 운영자 879 2002.10.04
245 부여 관북리 백제왕궁지 운영자 1963 2002.10.04
244 부여 관북리 백제왕궁지 시·발굴조사(10/4) 운영자 857 2002.10.04
243 울산권 상수도(대곡댐)사업 편입부지내 3차발굴조사 조수현 1585 2002.09.25
242 홍천지역 신석기시대 주거지 운영자 2317 2002.09.13
241 음성-생극간 국도 확포장공사 구간내 운영자 2128 2002.09.11
240 이천 설성산성 2차 발굴조사 운영자 2283 2002.09.06
239 경기 이천 설성산성2차유적 지도위원회(9/6) 운영자 878 2002.09.06
238 인천 용유도 유적 현장설명회(9/6) 운영자 927 2002.0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