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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소식

청양 장승리 고분군

2002-10-18 10: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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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양 장승리 고분군 발굴조사 Ⅰ. 조사개요 1. 조사기간 : 2002. 2. 16 ~ 2002. 10. 20 2. 조사지역 : 충남 청양군 청양읍 장승리 발굴조사 현장 3. 조사범위 : 백제시대 분묘 등 약 20,100㎡ 4. 조사기관 : 충청매장문화재연구원 Ⅱ. 遺蹟의 立地와 環境 遺蹟이 위치한 곳은 靑陽郡 靑陽邑 청송초등학교 앞 삼거리에서 36번 국도를 따라 보령방향으로 약 1㎞ 정도 西進하다 보면 청양읍 長承里 마을로 들어서는 입구가 나오는데 유적은 그 반대편의 야산 경사면에 위치한다. 이 지역은 現地 地名으로는 말구랭이로 불리는 지역으로 천마봉의 지 맥이 동쪽으로 뻗어가면서 형성된 능선과 학당리에 위치한 해발 163.3m의 야산지맥이 남북으로 길게 뻗으며 형성된 산줄기의 남향사면 에 해당한다. 현장조사과정에서 유구 조사와 기술의 편의상 조사지역 중앙부의 계곡을 중심으로 동쪽을 A지구, 서쪽을 B지구로 구분하여 조 사를 진행하였는데, 조사 당시 A지구는 주로 잣나무와 소나무 등이 식 재되어 있었으며, 남향사면 하단부 일대에는 지형을 일부 삭토하여 구 기자밭이 자리잡고 있었다. B지구는 밤나무 및 고추밭 등으로 경작되 고 있었다. 청양지역 일대의 지형적 특징을 살펴보면, 충청남도의 중앙부에 위치 하고 있으며, 공주와 부여, 보령 및 예산과 인접하여 있다. 차령산맥이 郡의 북동에서 남서방향으로 달리다가 칠갑산(560.6m)에서 높이 솟아 자연적으로 정산을 중심으로 한 동남부지역과 청양읍을 중심으로 한 북서부 지역으로 郡域을 양분하고 있다. 이렇게 칠갑산을 필두로 비교적 험준한 산지가 발달된 관계로 청양읍 에서 사방에 접해 있는 다른 郡으로 통하기 위해서는 동쪽으로 한티(大 峙), 서쪽으로 여드재(餘峙), 남쪽으로 싸리티, 북쪽으로는 아리고개 와 같은 높은 고개를 넘어야 한다. 청양의 중남부에는 之川, 동부에는 仍火川과 같은 주요 하천이 형성되 어 있는데, 이들은 각각 南流하여 군의 남동부를 돌아 흐르는 금강에 유입된다. 이들 하천유역을 중심으로 비교적 넓은 평야가 전개되어 있 다. 『三國史記』券36에 보면 청양은 본래 백제 古良夫里縣으로, 경덕왕 때 靑正으로 개칭되어 任城(백제의 任存城)의 영현에 속해 있었다. 이 후의 문헌기록에서 백제시대 또는 그 이전의 청양지역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알 수는 없으나 지리적으로 볼 때 백제시대에는 熊津의 서쪽 에, 泗沘의 북쪽에 인접한 곳이 바로 청양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청양 지역은 정치․군사적 요충지이면서 서해안으로 진출하는 중요한 교통 로에 위치한 지역이었음이 분명하다. 청양지역에는 행동 고분군, 산수 골 고분군, 여우실 고분군, 좌동 고분군, 군량리 토성, 갓골 토성, 퇴뫼 토성, 제미재 토성 등 다수의 古墳群과 關防遺蹟이 분포하고 있는 것으 로 공주대학교 박물관의 지표조사에서 확인된 바 있다. 이들 유적들은 주로 보령, 공주, 부여 등으로 가는 주요 고대 교통로상에 위치하고 있 어서 청양지역이 중요한 내륙의 거점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청양군은 칠갑산을 비롯하여 험준한 산악지형을 이루는 곳이 많아 주변 지역에 비해 지역개발이 미진한 편이며, 이와 더불어 청양지 역 문화유적에 대한 조사 예 또한 거의 없었다. 청양지역에서 확인된 문화유적의 수는 여타 지역에 비해 결코 적지 않으나 정식 발굴조사가 진행된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지역적인 역사,문화상을 복원할 만한 고고학적 자료가 태부족한 실정이다. 발굴조사된 유적으로는 공주대학 교 박물관에서 조사한 청양군 정산면 학암리유적 公州大學校博物館, 1999,『忠淸南道農業技術院畜産試驗場敷地 發掘調査略報告』. 과 대전 보건 전문대학교에서 조사한 청양군 장평면 관현리유적 大田 保健專門大學校博物館, 1996,「靑陽 冠峴里 기와가마터 發掘調査 約報 告書」. 을 들 수 있다. 학암리유적에서는 신석기시대 수혈주거지 1기와 청동기 시대 전기 주거지 8기가 조사되었다. 관현리유적에서는 백제시대 기와 가마터 1기가 조사되었다. 또한 청양읍 장평면, 목면 지곡리, 대평리 등 지에서는 청동기시대의 마제석검이 지표수습된 바 있다. 조사지역의 주변으로도 아직은 이렇다할 유적이 조사,보고된 적은 없지만, 청양읍 주변으로 넓은 충적지가 발달되어 있고 그 주변으로 낮은 구릉들이 분 포하고 있으며, 특히 지천 주변으로는 하안단구와 제4기층이 일부 존재 하는 것으로 확인되어 구석기시대~청동기시대에 이르는 선사유적이 확인될 가능성이 상존하고 있다. 따라서 청양지역은 앞으로의 문화유 적에 대한 조사노력과 그 결과에 따라 역사,문화상을 규명할 수 있는 풍부한 고고자료의 확보와 지역적 연구가 심화될 수 있는 지역이라고 하겠다. Ⅲ. 調査內容 금번 發掘調査에서 확인된 遺構는 百濟時代~統一新羅時代 墳墓 51 基, 埋納遺構 1基, 溝狀遺構 1基, 石築遺構 3基, 朝鮮時代 숯가마 2基, 기와가마 2基, 土壙墓 3基 등 총 63基이다 2002년 6월 11일 개최한 중간 보고회 자료집에는 A地區에서 百濟時代 墳墓 43基, 朝鮮時代 숯가마 2 基, 기와가마 2基, 竪穴住居址 1基, 民墓 2基 등 總 50基와 B地區에서 橫穴式石室墳 1基, 橫口式石槨墳 11基, 石槨甕棺墓 1基, 埋納遺構 1基, 朝鮮時代 民墓 2基 등 16基의 遺構가 확인되는 것으로 보고하였으나 내 부조사가 완료되면서 유구의 성격 및 수량에 많은 변동이 있었다. . 이중에서 본 유적의 성격을 대변하는 유구는 백제시대부터 통일신라시 대까지 장기간에 걸쳐 조성된 분묘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분묘는 橫穴式石室墳, 橫口式石槨墳, 石槨甕棺墓, 竪穴式石槨墓, 土壙墓 등의 다양한 묘제로 구성되어 있었다. 地區別 축조양상을 개관하면, A지구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분묘들이 백제시대의 분묘들 사이에 축조되어 있었으나 B지구에서는 모두 백제 시대의 분묘만 확인되었다. 동일한 횡혈식 또는 횡구식 묘제의 경우에 도 B지구의 분묘들이 A지구 보다 상대적으로 이른 형식의 특징을 보여 주는 것들이 많아서 크게 보아 B지구→A지구의 순으로 묘역의 조성이 진행된 것으로 판단되며, 각 지구내에서는 능선 하부에서 상부쪽으로 조성된 경향성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아직은 각 분묘들의 축조시기와 세부적인 형식 변천상까지 파 악하기는 무리이므로, 여기서는 A,B 2개 지구에서 조사된 백제시대~ 통일신라시대 분묘의 묘제별 특징과 출토유물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으며, 분묘 외 기타 遺構는 간략하게 설명하도록 하겠다. 1. A地區 A지구의 야산지대는 기반암인 편마암질풍화암반의 풍화 정도가 심하 고 능선 줄기에는 암맥이 노출되어 사면에 토사와 塊石이 붕적되어 있 었다. 또한 유구가 밀집된 남동쪽 경사면은 경사가 급한 편이었다. A地區에서 확인된 遺構는 百濟時代~統一新羅時代 墳墓 36基, 石築遺 構 3基, 溝狀遺構 1基, 朝鮮時代 숯가마 2基, 기와가마 2基, 土壙墓 1基 등 총 45基의 遺構가 확인되었다. 1) 百濟時代~統一新羅時代 墳墓 A지구에서 조사된 墳墓들은 야산의 동남쪽 경사면에 밀집 축조되어 있 었으며, 이러한 분묘들의 분포는 본 조사지역의 동쪽으로 연결된 야산 경사면 일대까지 광범위하게 연결된 것으로 생각된다. 본 조사지역에 서 약 1㎞정도 떨어진 청송초등학교 뒤편에서도 盜掘이 있었다는 주민 들의 전언을 토대로 한다면 이 일대에 조성된 고분군은 상당한 규모인 것으로 판단된다. A지구의 분묘들은 조사 전에 지표상에서 분묘의 존재를 추측할 만한 封墳의 외형은 확인되지 않았다. 유구 조사를 위해 현 표토층을 얇게 걷어내자 부분적으로 분묘의 蓋石과 石壁이 노출되었는데 사면 유실 이 심하여 대부분 석실 상부가 교란된 상태로 노출되었다. 또한 경사 면 위쪽에서 흘러내려 재퇴적된 할석층과 잔존된 유구의 구조물이 뒤 엉켜 분묘의 형태나 중복관계를 파악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이에 표토 층의 제토 깊이를 최소한으로 한 후 유구의 존재가 의심되는 부분은 먼 저 탐색 pit를 설치하여 유구의 유무를 파악하는 방식으로 유구 확인조 사를 진행하였다. 그 결과 비교적 잔존상태가 양호한 백제시대 고분군을 확인할 수 있었 으며 아울러 統一新羅時代 遺物이 부장된 분묘들도 조사되어 이 일대 의 고분군은 백제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는 장기간에 걸쳐 조성 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百濟時代~統一新羅時代 墳墓의 墓制는 橫口式石槨墳 본 글에 서 횡구식과 횡혈식의 구분은 연도부의 존재 유무를 기준으로 하였다. 따라서 문틀시설이 설치되었더라도 연도좌우 벽석이 없이 곧바로 폐쇄 석으로 막음된 경우는 횡구식으로 분류하였다. 이 17기 이상으로 주류를 이루며, 그 다음으로 橫穴式石室墳이 5기가 확인되었으며, 石槨甕棺墓도 1기 확인되었다. 또한 유물이 출토되지 않 아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는 竪穴式石槨墓도 2基가 조사되었다. ◈ 橫穴式石室墳 橫穴式石室墳으로 분류할 수 있는 墓制는 A지구에서 모두 5基(A-3호, 11호, 17호, 22호, 28호분)가 조사되었다. 이들 횡혈식석실분은 봉분 상 부를 제외하곤 잔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였다. 封墳의 상부는 대부분 유실되었으나 A-11,28호분에서는 石室 천장 위 로 15~25㎝ 두께로 封土가 덮인 상태로 확인되었다. 봉토 축조시 정연 한 版築技法이 사용되진 않았으나 암갈색사질토와 적갈색사질토, 황갈 색사질토 등을 3~5㎝ 정도 두께로 순차적으로 쌓아 올린 양상이 확인 되었다. 또한 개석의 상면에는 황갈색점질토를 이용해 2~5㎝ 정도의 두께로 피복하여 개석의 틈을 密封한 것이 확인되었다. A-17,28호분에서는 묘광의 주위로 圓形의 周溝가 돌려진 것이 확인되 어 봉분의 형태는 원형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중 A-17호분은 주구 가 2중으로 돌려져 있었다. 1차 주구는 평면 원형으로 내부 지름이 660 ㎝로 계측되어 봉분의 규모를 짐작케 하였다, 굴착된 주구의 너비는 최 대 144㎝, 깊이는 66㎝였다. 2차 주구는 1차 주구의 안쪽에 돌려져 있었 는데 묘광의 서쪽 일부를 파괴하고 반원형으로 남아 있었다. 잔존 규모 는 길이 535㎝, 너비 98㎝, 깊이 40㎝였다. 이 2차 주구는 분묘의 축조 가 완료된 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 봉토의 일부가 유실됨에 따 라 이를 補修하는 과정에서 재차 굴착된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이러 한 자료들로 볼 때 被葬者 안치 후에 지속적으로 封墳과 墓域에 대한 整備․補修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A-28호분의 주구 역시 평면 형태는 원형이며, 규모는 내부 지름 640~ 740㎝, 굴착된 주구 너비 100~140㎝, 깊이 60㎝로 토층조사 결과 원래 의 봉토를 일부 굴착하여 조성한 것으로 확인되어 A-17호분의 2차 주 구와 마찬가지로 무덤축조 당시보다는 후대에 봉분을 정비,보수하는 과정에서 재굴착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墓壙은 화강암풍화암반층 또는 암반층의 일부를 장방형으로 굴광하여 조성하였다. 장축방향은 모두 남북 방향으로 등고선과 직교하였다. A- 17,22호분의 경우 묘광의 깊이가 170~290㎝로 지하식이고 나머지는 천정이나 연도부의 일부가 구지표 보다 위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A-11,22호분에서는 묘광의 벽면에서 삽과 괭이 등의 굴지구흔이 관찰 되었다. 壁石의 축조재료는 판석과 할석을 이용하였다. 할석은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석재를 사용하였고 판석은 모두 치석한 후 사용하였다. 石室의 규모는 대체로 길이 188~265㎝이고, 너비가 81~130㎝로 장단 비는 1.65~3.19:1로 비교적 다양한 편이다. 원형이 비교적 잘 남아 있 는 A-11,28호분의 경우 석실 내부는 단면 육각형의 고임식천장의 구 조이고 장단비가 1.83:1과 1.65:1로 다른 횡혈식석실분들에 비해 너 비가 넓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러한 석실은 모두 치석된 판석을 사용 하였다. A-17호분은 장단비가 2.65:1로 A-11,28호분보다 세장하고 석실은 할 석으로 길이모쌓기로 하단부를 쌓고 상단부는 작은모쌓기로 축조하였 다. 상단부로 갈수록 약간씩 내경시킨 평천장으로 A-22호분 역시 이와 유사한 단면 형태를 보였다. A-11호분에서는 조사 당시 盜掘되지 않은 처녀분으로 개석 상면에는 점토를 발라 밀봉한 것으로 확인되었고, 石室 입구와 羨道가 판석으로 완전히 閉鎖된 상태로 노출되었는데 석실 내부는 蓋石 아래까지 모두 암갈색사질토로 완전히 메워진 특이한 예가 확인되었다. 석실 내부에 서 노출된 인골의 흔적과 관고리의 형태로 보아 2기 이상의 목관이 안 치된 흔적이 역력하였음에도 함몰된 부분이 없이 석실 내부가 모두 흙 으로 메워진 것은 석실분 조성이 완료된 이후에 행해진 修葺 과정에서 석실 내부를 의도적으로 메운 후 천장 개석을 전면적으로 재축조하였 다고 밖에는 보기 어렵다. 바닥施設은 모두 할석 또는 작은 판석을 이용해 전면에 부석하였다. A- 11․22호는 20~30㎝ 정도의 할석으로 사용하였고 A-28호분은 길이 60 ㎝ 내외의 판석을 부석하고 빈틈을 작은 할석으로 채웠다. A-11호분은 바닥에 20㎝ 내외의 할석을 부석하고 그 위에 황갈색점질토를 약 2㎝ 의 두께로 깐 것이 확인되었다. 또한 A-28호분도 문지방석에서 약 50 ㎝ 정도 안쪽까지 점질토를 깐 것이 확인된다. 문틀시설은 대부분 석실 좌우 장벽과 직교하여 돌출된 門支柱石을 세 우고, 그 위로 門楣石을 수직으로 세워 올렸으며, 바닥에는 門地方石 을 두었다. 그러나 A-22호분의 경우 석실 좌우 양벽이 연도벽으로 그대 로 연장되고 문미석과 문지방석만을 부가한 형태여서 구조적으로 특이 한 형태를 취하였다. 羨道는 A-28호분의 경우 높이 78㎝, 너비 53㎝ 정도의 판석을 세우고 그 남쪽에 다시 할석으로 1열을 더 쌓아 연도부를 조성하였다. 연도는 밖으로 약간 벌어져 있으며 길이 94㎝, 너비 81㎝, 높이 82㎝이다. A- 3,11,22호분도 거의 같은 축조방법을 따르고 있다. A-17호분은 다른 석실과는 약간 다른 형태로 연도가 축조되었는데 할 석으로 남벽을 1열 정도 축조하고 연도는 석실의 남동쪽에 우편재한 형 태이다. 따라서 이 A-17호분은 퇴화된 형태이긴 하나 평면 ‘ㄱ’자형 장 방형 횡혈식석실분의 전통을 잇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연도 내부는 대부분 할석이나 판석을 이용하여 폐쇄하였고, A-11호분 의 경우 羨道 閉鎖石과 門扉石 사이의 공간을 흙으로 채웠다. 墓道는 특별한 시설 없이 생토면을 파고 조성하였다. 봉토가 일부 잔존 하는 A-11,28호분의 경우 봉토를 일부 절개하고 묘도를 조성한 것으 로 확인되었다. 또한 A-22,28호분에서는 묘도의 토층단면에서 추가장 의 흔적을 확인하였다. 出土遺物은 많지 않으며 대부분의 석실분에서는 관고리와 관정만이 노 출되어 목관을 사용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다만 A-17호분에서는 석실 의 남동쪽에 치우쳐 短頸壺 1점, 蓋杯 3점, 바리 1점과 중앙부에서 直口 壺 1점이 출토되었다. A-11호분에서는 석실 중앙부 서쪽에 치우쳐 冠 帽 장식용 철테(鐵心)가 출토되었고, 부식이 상당히 진행된 인골이 일 부 검출되었다. A-22호분에서도 석실 내부에서 男,女로 생각되는 두개골, 팔, 다리뼈 등의 인골 2개체분이 노출되었다. 인골의 부식정도와 중복상태로 보아 약간의 시기차를 두고 追加葬이 이루워진 것으로 추측된다. A지구에서 조사된 橫穴式石室墳들은 석실 斷面이 六角 또는 사각형의 平天障으로 확인되었고 벽석은 대부분 板石을 사용한 것이어서 이러 한 축조수법으로 볼 때 백제 사비기 중,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 다. 다만 A-17호분의 경우 남벽이 남아 있고, 우편재한 연도를 취하며 여타 횡혈식석실분과 달리 토기류가 부장된 점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 어 A지구 내에서는 약간 이른 시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 橫口式石槨憤 橫口式石槨憤으로 파악된 분묘는 17기이며, 나머지 석실의 파손이 심 한 11기도 대부분 횡구식석곽분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A지구 남동사 면 전체에 분포하고 있으며 墓室의 規模는 길이 83~290㎝, 너비 33~ 97㎝, 장단비 1.40~2.99로 다양한 편이다. 이들 橫口式石槨墳 중에는 길이 83~130㎝ 정도의 소형 석곽분들이 12기가 확인되었고 나머지는 대부분 길이 200㎝ 내외에 속한다. 소형 횡구식석곽분들은 할석과 작은 판석을 이용해 벽면을 축조하였 고 축조수법이 백제시대 분묘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A-18,24,31호분은 통일신라시대 유물이 출토되고 있으며 북벽 이 할석으로 조잡하게 축조되어 다른 것과는 차이를 보여 소형 횡구식 석곽분 중에는 통일신라 이후에 조성된 것들이 여러 기 포함된 것으로 판단된다. 封墳은 모두 유실된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대부분 벽석 상부나 천장석 이 지표면 가까이에 노출되어 있었다. 墓壙의 장축방향은 거의 모두 남북방향으로 등고선과 직교하며 평면형 태는 장방형이다. 화강암풍화암반층과 그 위에 자연퇴적된 암갈색사질 토 및 할석퇴적층을 거의 수직으로 파서 조성하였다. 대부분 벽석 상부 와 蓋石이 굴광 어깨선의 위에 노출된 것으로 보아 반지하식으로 추정 되며 A-32호분의 경우에는 地下式으로 조성되었다. 壁石은 割石을 사용한 것이 많으며 A-13,30,32호분 등은 동서 1단 을 작은 판석으로 세우고 그 위에 할석을 길이모쌓기 하여 개석을 올 린 것으로 확인되어 백제 횡혈식석실분에서 확인된 축조수법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통일신라시대 분묘로 확인된 A-18,24,31호분은 북벽을 비롯한 모든 벽면을 할석으로 축조하였고 벽면이 고르지 못해 백제시대 횡구식석곽 분보다 조잡한 특징을 보였다. 石室은 대체로 장단비가 1.93~2.36:1 사이에 많이 분포하고 있으며 A-1,4,15호분은 2.63~2.99:1로 세장한 편이다. 천장의 형태는 납작 한 蓋石을 덮은 평천장이나 일부 횡구식석곽분의 경우 북벽을 안으로 약간 내경시킨 형태가 확인되었다. 바닥施設은 대부분 납작한 할석을 이용해 전면에 부석하였으며 A- 10,20호분은 생토면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A-15호분은 묘실 장축방향 으로 중앙에 길이 25㎝ 내외의 할석으로 이용해 1열로 부석하였고 그 주변으로 작은 할석을 깔았다. 이 석실 중앙의 부석열은 배수로로 확인 되었다. 橫口部는 대부분 할석을 이용해 길이방향으로 동서 벽면 안으로 15~ 30㎝ 밀어 넣어 폐쇄한 경우가 많았다. 墓道는 생토면을 그대로 이용하였으며 묘도 끝으로 갈수록 바닥이 높 아지는 형태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橫口式石槨墳은 묘도가 유실된 상 태로 조사되어 정확한 구조를 알 수 없었다. 出土遺物은 蓋杯(A-15,25호분), 瑪瑙製구슬(A-15호분), 統一新羅時代 의 甁․臺附盌․盌(A-18,24,31호분) 등이 소량 출토되었으나 대부분의 횡구식석곽분에서는 관정 외에 특별한 유물이 출토되지 않았다. 그런 데 통일신라시대 직후의 것으로 보이는 甁과 臺附盌이 부장된 A-24호 분을 파괴하고 조성된 A-25호분에서 백제양식의 蓋杯 뚜껑이 부장된 것이 확인되었다. 표 1 ) A지구 분묘 일람표 - 첨부 파일을 참조 하십시오. ◈ 石槨甕棺墓 石槨甕棺墓 1基는 A지구 고분군의 가장 서쪽에 위치하였다. 묘광은 암 반층 위에 퇴적된 부식토층을 말각방형으로 얕게 굴광하였다. 내부 석 곽의 벽면은 25~30㎝ 정도의 할석으로 1단석을 세우고 그 위로 작은 할석을 올렸다. 바닥에는 옹관이 닿는 부분에만 5㎝ 정도의 작은 할석 으로 동그랗게 받쳤으며, 圓底短頸壺를 옹관으로 안치하였다. 석곽 내 부의 길이는 65㎝이다. 2) 朝鮮時代 가마 금번에 조사된 가마는 모두 4基로 A지구의 서쪽 경사면 아래쪽에서 숯 가마 2기와 남동쪽 경사면 아래에서 기와가마 2기가 확인되었다. 숯가마 2基(A-1,2호가마)는 A지구 서남쪽 사면의 기슭에 나란히 축조 되어 있었다. 소위 黑炭窯로 분류되는 것으로 가마의 장축은 경사면 방 향을 따르고, 평면 형태는 逆梯形이다. 연소실 북쪽 중앙부에 半圓形 의 연통부가 밖으로 설치된 구조로 연소실에서 연통부로 연결되는 부 분은 할석으로 쌓고 점토로 틈을 막았다. 2기 모두 아궁이 부분은 유실 이 심하다. 내부에는 벽면과 천정부가 함몰되어 소토덩어리들이 가득 채워져 있었으며 바닥에서 재층이 확인되었으나 숯은 노출되지 않았 다. 표토를 제토하는 과정에서 다량의 백자편, 옹기편 등이 출토되었는 데 일단 숯가마와 관련된 유물로 추정된다. 규모는 1호가마가 잔존길 이 365㎝, 너비 190㎝, 잔존깊이 45㎝이고, 2호가마는 잔존길이 320㎝, 너비 190㎝, 잔존높이 76㎝이다. 기와가마 2기(A-3,4호가마)는 평면형태가 장타원형으로 약 1m 정도로 인접하여 나란히 축조되었다. 기와가마는 남동사면의 하단부에 조성되 었는데 근래에 農路 개설과 밭 개간 과정에서 일부 유실되어 가마의 상 부와 아궁이 등은 모두 멸실된 상태였다. A-3호가마 내부 바닥에서는 소성된 기와들이 다량 퇴적되어 있으며 바닥에 수키와와 암키와를 번 갈아가며 한열씩 가로 방향으로 깔아 높이를 맞춘 후 기와들을 재임하 고 소성한 것이 확인되었다. A-4호가마에서는 내부에서 기와들이 일정 한 퇴적양상을 보이지 않고 북동쪽과 북서쪽 모서리에 기와편들이 일 정한 형태 없이 쌓여 있었다. 다만 내부 토층에서 천장부가 함몰된 모 양이 확인되었으며 벽체에서 보수한 흔적이 관찰된다. A-4호가마에 인접해 동쪽으로는 기와편이 너비 108㎝, 잔존길이 550 ㎝, 깊이 15㎝로 열을 이루며 남북방향으로 길게 퇴적되어 있는데 배수 로시설인 것으로 생각된다. 기와가마 내외부에서 기와편이 상당수 출토되었는데, 수키와의 경우 미구의 길이가 대단히 짧아 늦은 시기의 것으로 판단되며, 주변에서 백 자편과 옹기편들이 소량 수습되었다. 규모는 A-3호가마가 잔존길이 660㎝, 너비 260㎝, 잔존깊이 50㎝이고, A-4호가마는 잔존길이 880㎝, 너비 265㎝, 잔존깊이 71㎝이다. 3) 其他 위에서 조사된 백제시대~통일신라시대 분묘와 가마터 이외에 A지구 분묘군의 하단부에서 3기의 石築遺構가 확인되었다. A-1호 石築遺構 의 경우 평면 형태는 ‘ㄱ’자형으로 남아 있었는데 원래는 방형의 石壇 과 같은 형태를 취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석축의 외측 잔존 길이는 420㎝, 잔존 너비는 550㎝였다. 석축유구 중앙에는 방형의 공간이 있었 던 것으로 판단되는데, 바깥쪽 석렬에서 안쪽으로 190㎝의 간격을 두 고 다시 ‘ㄱ’자 형태로 할석열이 남아 있었다. 이 안쪽과 바깥쪽 석렬 사 이는 작은 할석들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중앙의 방형 공간은 너비가 대략 240㎝ 정도로 추정되는데 특별한 시설이나 다짐흔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나머지 2호와 3호는 유실이 심해 특별한 평면 형태를 파악하기 가 어려우며 鋪石된 형태로 잔존되어 있었다. A-1호와 3호 石築遺構에 서는 각각 石製 紡錘車 1점이 석축 상면의 할석 틈 사이에서 출토되었 다. 이들 석축유구의 정확한 성격은 알기 어려우나 고분군과 밀접한 관 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며, 일종의 祭壇施設과 같은 용도로 축조되었 을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제시해 본다. 이외에 A지구 서남쪽 사면의 기슭에 위치하는 숯가마 하부에서 잔존길 이 1,145㎝, 너비 110㎝, 깊이 33㎝ 정도의 구상유구 1기가 조사되었 다. 이곳에서 백제시대의 개배편, 시루편 등의 유물이 출토되고 이보 다 후대 유물이 전혀 없어서 일단 구상유구의 축조시기는 백제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2. B地區 B地區는 조사지역 동쪽의 작은 야산 남향사면에 해당하는 곳으로 이곳 에서는 百濟時代 墳墓 15基, 埋納遺構 1基 및 朝鮮時代 이후의 土壙墓 2基 등 總 18基의 遺構가 조사되었다 중간보고회 자료집에는 百濟時代 墳墓가 13基로 보고되었으나 후에 내부조사를 마무리 하면서 경사면 하단부에서 百濟時代 土壙墓 2기가 새로이 조사되었다. . 百濟時代 墳墓의 墓制는 土壙墓, 橫穴式石室墳, 橫口式石槨墳, 石槨 甕棺墓 등이다. 토광묘 2기와 B-2호 횡혈식석실분과 B-1호 석곽옹관묘 를 제외하고는 모두 횡구식석곽분이며, 장축방향은 모두 남북 방향으 로 등고선과 직교하였다. B지구에서 조사된 백제시대 분묘의 수가 적어 여기서는 묘제별로 대표 적인 유구를 중심으로 간략하게 설명하도록 하겠다. 표 2 ) B지구 분묘 일람표 - 첨부 파일을 참조 하십시오. ◈ 橫穴式石室墳 B-2호분은 B지구의 최정상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조사 당시 봉분 및 개석은 이미 유실되어 있었다. 내부에는 크고 작은 할석들이 가득 채워 져 있었는데 자연 붕괴라기 보다는 후대에 의도적으로 파괴된 것으로 생각된다. 석실의 장축은 남-북 방향으로 등고선과 직교한다. 묘광의 규모는 길이 300㎝, 너비 154㎝, 잔존깊이 110㎝로 화강암풍화암반을 거의 수직으로 굴광하여 조성하였다. 석실의 규모는 길이 192㎝, 너비 75㎝, 잔존높이 80㎝로 평면형태는 장방형이다. 벽석은 북벽은 1매의 판석을 이용해 축조하였고, 동서벽은 3매의 판석을 연접하여 축조하였 다. 벽면에 세운 판석 위에는 다시 판석형 할석을 작은모쌓기로 平積하 였는데, 이 제2단 벽석의 뒤는 묘광과 1단 판석 사이에 充塡土를 채워 수평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석실 상부의 구조는 훼손이 심해 분명치 않 으나, 북벽의 판석이 소위 단면 6각형인 것으로 보아 제2단 벽석부터 점차 안으로 내경시킨 후 최종적으로 개석을 올려 천장을 축조한 것으 로 생각된다. 석실의 바닥은 작은 잡석들로 정연하지 않게 부석하였 다. 석실 남쪽으로는 문틀시설을 설치하였다. 양 장벽의 남쪽 끝에 문 주석을 돌출시켜 세우고, 그 밑에 문지방석을 놓았으며, 판석 1매를 문 비석으로 이용하였다. 문비석을 세워 입구를 막은 후 할석으로 연도부 전면을 폐쇄하였다. 연도는 대단히 짧은 편으로 판석 1매씩만을 좌우 에 세운 형태였다. 연도부의 남쪽으로는 길이 174㎝의 墓道가 설치되었 다. 묘도는 화강암 풍화암반층을 단면 ‘U’자형으로 석실 입구쪽으로 점 차 낮아지게 굴광하여 조성하였다. 묘도 내부는 황갈색 사질토에 작은 할석과 암반부스러기 등이 많은 부식토로 채워져 있었다. ◈ 橫口式石槨憤 B-5호분은 석실의 규모가 길이 277㎝, 너비 80㎝로 다른 석곽보다 비교 적 큰 편이다. 벽석의 축조시 1단은 장방형의 석재를 길이모쌓기 하였 고 2단부터는 작은모쌓기하였다. 횡구부는 할석을 길이 방향으로 밀어 넣어 폐쇄하였다. 석실의 바닥은 약간 세장한 할석을 이용해 비교적 정 연하게 전면에 부석하였으며, 석실 남쪽 폐쇄석 앞에 개배 3점을 부장 한 것이 확인되었다. 이외에 석실 중앙부 동쪽에서 길이 약 32cm 정도 의 鐵刀 1점, 서쪽에서 鐵刀子 1점과 鐵鎌 등이 수습되었다. 이밖에 B-6호분에서는 金銅製細鐶耳飾 한쌍이 출토되었으며, B-8,10 호분에서는 短頸壺, 短頸小壺, 直口壺, 鉢, 鐵刀子, 鐵斧片, 鐵鎌 등이 출토되었다. B지구 횡구식석곽분들의 특징은 A지구 횡구식석곽분들에 비해 석실 의 규모가 크고, 천장의 높이가 상대적으로 높은 특징이 있다. B-9호분 의 경우 석실 북벽의 내경이 뚜렷하여 지리적으로 가까운 保寧 保寧里 古墳과 유사한 형태를 취한 것도 있었다. 이는 어느 시점에서는 청양지 역과 보령지역에 거의 동일한 형태의 백제 지방양식의 묘제가 공유되 었음을 보여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 土壙木棺墓 B-1호 토광묘는 능선의 하단부에 조성되어 있었으며 장축은 동,서 방 향으로 등고선과 평행하다. 墓壙은 길이 240㎝, 너비 120, 잔존깊이 48 ㎝ 이고 내부 목관의 규모는 길이 192㎝, 너비 94㎝ 잔존높이 44㎝이 다. 내부 중앙에서 兩耳附壺, 盌, 鐵鎌이 출토되었다. B-2호 토광묘 역 시 목관이 안치된 것을 확인하였는데, 목관 장판과 단판이 ‘ㅍ’자 형태 로 결구된 組立式 木棺을 사용하였다. ◈ 埋納遺構 B-12호분 남서쪽으로 약 5m 떨어진 지점에서 평면 원형의 小形 埋納遺 構 1기가 조사되었다. 수혈의 지름은 45㎝이고, 깊이는 약 20㎝이다. 바 닥에는 작은 할석 몇 개를 부석하였으며, 내부에서 구연부가 결실된 臺 附鉢 1점이 출토되었다. ◈ 石槨甕棺墓 石槨甕棺墓는 B지구 조사범위 밖의 서쪽 경사면에서 확인되었는데, 절 반 정도는 유실되었다. 내부에 원저호 1점을 옹관으로 안치한 후 납작 한 할석 1매로 옹관의 입구를 막은 것이 확인되었다. Ⅳ. 調査成果 本 調査는 大田地方國土管理廳에서 시행하는 靑陽迂廻道路 築造 및 鋪 裝工事 구간내에 위치한 靑陽 長承里 古墳群에 대한 발굴조사이다. 유적에 대한 조사 결과 百濟時代~統一新羅時代 墳墓 51基, 溝狀遺構 1 基, 石築遺構 3基, 埋納遺構 1基, 朝鮮時代 숯가마 2基, 기와가마 2基, 土壙墓 3基 등 總 63基의 遺構가 확인되었다. 금번 발굴조사로 청양지역에서 처음으로 百濟時代 墳墓가 정식 발굴조 사되어 熊津․泗沘期에 청양지역이 가진 위상과 지방세력의 규모 및 문 화상을 구체적으로 밝힐 수 있는 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원형 이 거의 그대로 잔존된 분묘들이 조사되어 백제시대 지방 분묘의 墓制 와 葬制의 일면을 파악할 수 있었다. A지구에서 조사된 백제시대~통일신라시대 墳墓의 墓制는 橫穴式石室 墳, 橫口式石槨墳, 石槨甕棺墓으로 이 중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처녀분 은 모두 4기가 확인는데, A-11,28호분에서는 봉토까지 일부 잔존하는 것이 확인되었다. 특히 이 중 A-22,28호분에서는 묘도에서 추가장의 흔 적을 확인하였고 22호분의 경우 석실 내부에서 2구의 인골이 노출되었 다. 22호분에서 출토된 인골의 枕向은 모두 北向을 취하였다. 입구에 서 볼 때 좌측의 인골은 여성으로, 우측은 남성으로 추정되며, 좌측의 인골이 법의학적 소견으로는 약 8~10년 정도 먼저 安葬된 것으로 파악 되고 있다(동아대학교 김재현 교수 분석). 이러한 자료는 백제인을 형 질인류학적으로 접근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며, 한편으로 追加葬 과 같은 백제 후기 葬送儀禮의 한 측면을 규명할 수 있었다. A-11호분에서는 출토유물과 인골로 보아 2인 이상의 피장자가 안치된 후 石室 입구와 羨道가 판석으로 완전히 閉鎖된 석실 내부가 천정 蓋 石 아래까지 모두 흙으로 메워진 특이한 예가 확인되었다. 이는 분묘 조성이 완료된 이후에 행해진 修葺 과정에서 석실 내부를 의도적으로 메운 후 천장 개석을 전면적으로 재축조하였다고 밖에는 보기 어렵다. A-17․28號墳은 百濟時代 橫穴式石室墳으로 封墳 주위에 돌려진 周溝 가 확인되었는데, 이 중 17호분의 경우 1차로 封墳 주위로 지름 660㎝ 정도의 원형으로 周溝를 조성한 후 그 안쪽의 서쪽 일부에만 주구가 다 시 파여져 이중으로 돌려진 것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자료들은 被葬者 안치 후에 지속적으로 封墳과 墓域에 대한 補修․整備 행위가 있었음 을 증명해 주는 것으로 주목되며, 그 補修의 정도는 A-11호분에서 확인 한 바와 같이 필요할 경우 피장자가 안치된 석실에 이르기까지 적극적 으로 이루어졌음을 확인하였다. 또한 고분군이 조성된 능선 하단부에서 埋納遺構(B지구)와 方形의 石 築遺構 3기(A지구)가 조사되었는데, 일종의 祭壇과 같은 용도로 축조 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상의 자료들은 백제인의 死 後 世界觀과 祭禮儀式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 판단된 다. 그리고 통일신라시대 초기의 토기가 부장된 A-24호분을 백제시대 蓋杯 가 부장된 A-25호분이 서벽의 일부를 파괴하고 조성된 사례가 확인되 었다. 이는 현재 학계에서 백제 멸망 후 百濟遺民들의 묘제 변화상이 구체적으로 파악되지 않고 있는 실정에서 왕실의 교체라는 시대적 상 황에서 백제유민들의 물질문화가 어떻게 계승,변천되었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A지구의 백제시대 분묘들은 크게 보아 B지구에서 조사된 것들과 각 묘 제별 축조수법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A지구는 B지구와는 달리 분묘가 보다 밀집되고 중복된 양상이 확인되며, 분묘들이 A지구 동쪽 야산지대로 연장되는 점을 감안할 때 규모면에서도 B지구에 비 해 훨씬 큰 群集을 이루고 있었다. A지구 분묘군의 가장 큰 특징은 B지 구의 분묘들이 분묘군 내의 규모면에서 차등이 적고 일정한 간격을 유 지하는데 비해, A지구의 분묘들은 같은 백제시대 분묘 내에서도 大小 의 차이가 뚜렷하고 대형보다는 소형 석곽들이 상당수 축조되어 있었 다. 비교적 대형에 속하는 A-11,17,22,28호분은 석실 내부의 너비가 100~130㎝이고, 길이는 200~265㎝로 B지구에서 조사된 것보다 대형 에 속한다. 이러한 점은 분묘 축조 집단 내에서 위계차가 심화되는 양 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B지구에서 조사된 분묘들은 백제 지방양식 분묘의 특징을 잘 보여주 고 있으며, 북쪽 단벽이 내경되어 조여드는 형식은 인접한 보령 보령 리 고분군 등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이는 어느 시점에서는 청양지역 과 보령지역에 거의 동일한 형태의 백제 지방양식의 묘제가 공유되었 음을 보여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B지구 분묘의 축조순서는 능선 아래에서 위로 진행되는데, B지구 정상 부에는 사비기 판석조 석실분이 축조되어 있어 시기적인 묘제의 변천 과정을 엿볼 수 있다. 또한 도굴이 진행되었음에도 부장된 유물이 남 은 것들이 많아서 분묘의 형식변천과 유물의 변화상을 유기적으로 파 악하기가 용이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상의 A,B지구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直口壺, 甁, 蓋杯, 短頸小壺, 鉢 등의 토기류와 鐵斧, 鐵刀子, 棺釘 등의 철기류 및 석제방추차가 출토 되었다. 裝身具류로는 B-6호분에서 金銅製細鐶耳飾 1쌍과 A-11호분에 서 冠帽 장식용 철테(鐵心) 등이 출토되었다. 이 중에서 금동제세환이 식이나 관모 장식용 철테 등은 피장자의 위계를 반영하는 유물로 보아 무리가 없을 것으로 생각되며, 이는 장승리 고분군 축조집단의 지역적 위상을 반영하는 자료라고 판단된다. 이러한 점은 B지구의 금동제세환 이식이 부장된 분묘보다 A지구의 철테가 부장된 분묘가 후행하는 것으 로 판단되므로 시기적인 흐름에 따라 장승리 고분군 축조집단의 위상 변화 또는 중앙정부에 의한 지방세력의 편제과정을 유추해 볼 수 있는 자료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장승리 고분군의 전반적인 조성시기는 4세기대 백제시대 토광 묘들이 가장 먼저 조성되었고, 이후 백제 사비기~통일신라시대 중,후 기까지 이르는 장기간 동안 석실분과 석곽분을 주묘제로 한 분묘들이 지속적으로 조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A지구에서 조사된 조선시대의 숯가마와 기와가마의 발굴은 당 시 청양지역의 사회,경제상의 일면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며, 최근 청양지역에 대한 지표조사에서 자기 및 기와 가마터가 다수 확인되고 있음에 비추어 향후 이들 유적의 조사 자료와 대비하여 보다 종합적인 검토가 진행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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