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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혜음원지 발굴조사

2001-12-12 16:13:00
조회 2583
파주 혜음원지 발굴조사 Ⅰ. 조사개요 ㅇ 조사지역 :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4리 173번지 일원 ㅇ 조사기간 : 2001년 8월 27일 - 2001년 12월 12일 Ⅱ. 조사경과 {東文選}과 {新增東國輿地勝覽} 등에는 김부식이 撰한 [惠陰寺新創 記]가 실려있다. 이에 의하면 惠陰院은 개경과 남경 사이를 왕래하는 행인을 보호하고 편의를 제공하기 위하여 창건되었다. 高麗 睿宗 15 (1120)년 2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同王 17(1122)년 2월에 완공되었다. 또한 혜음원에는 국왕의 행차에 대비하여 別院(行宮)이 축조되기도 하 였다. 그 동안 원위치를 알 수 없다가 1999년 동국대학교 학술조사단 에 의해 [惠陰院]이라 새겨진 암막새기와가 수습됨으로써 처음으로 그 위치가 파악되었다. 이후 한양대학교 박물관이 실시한 [파주시 문 화유적 지표조사시] 기초 조사가 진행된 바 있다. 그러나 혜음원지는 1999년 발견된 이래 기초적인 조사만 진행되었을 뿐, 정확한 규모와 구 조 등을 밝힐 수 있는 정밀 조사는 한 차례도 진행된 바 없었다. 이후 발굴조사를 위한 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에 의한 현지 조사 결 과 전체 사지는 남서향을 축으로 모두 5개의 단을 이루며 대지를 마련 한 후 형성했던 것으로 추정된 바 있다. 금번의 조사는 기초조사시 건 물지의 잔존 가능성이 가장 높게 추정된 3 4단지역을 중심으로 조사에 임했다. Ⅲ. 조사내용 혜음원지는 혜음령 북쪽 1.2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혜음령에서 남 북으로 각각 계곡이 형성되어 있는데 혜음원은 북쪽 계곡 입구에 해당 하는 지역이다. 혜음원지는 서·북·동쪽이 산줄기로 막혀 있고 남쪽으로 개방된 계곡에 위치하고 있다. 남쪽으로는 혜음령으로 올라가는 길이 잘 조망된다. 북쪽이 높고 남쪽으로 점차 낮아지는데 경사면에 단을 마 련하고 건물을 축조하는 산지가람의 형태이다. 동·서로는 작은 개울이 흐르고 있다. 북쪽은 현재 군부대 사격장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남쪽으 로는 밭과 논이 펼쳐져 있고 사역 남단 입구로 추정되는 곳에는 현재 청룡사라는 사찰이 있다. 발굴조사가 실시된 지역은 사역의 중심부로 추정되는 곳인데 뒤로는 사격장과 접하고 앞으로는 민묘와 경작지가 있었다. 조사 전 이 곳은 일부 지역은 밭으로 경작하였으나(나지구) 대부분은 잡목이 우거져 있 어서(가지구) 비교적 유구가 잔존할 가능성이 높았다. 가지구와 나지 구 사이에는 도로가 개설되어 있었는데 이 도로를 중심으로 동쪽을 가 지구, 서쪽을 나지구로 명명하고 가지구를 집중적으로 조사하였다. 가 지구와 나지구는 약 2∼3m 정도의 고도차가 있다. 이곳은 예전에 군부 대의 훈련지로 사용되다가 최근에 나지구가 경작지로 되었다고 전한 다. 한편, 기와나 토기편이 수습되는 지역의 범위는 남쪽으로 청룡사 뒷 편 논 일대까지이고 북쪽으로 군부대의 고폭탄 사격장 일대까지이다. 원래 사역의 범위도 이와 비슷할 것으로 생각된다. . Ⅳ. 조사성과 1. 건물지 혜음원지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가지구에서 초창시 혜음원지의 모습 중 일부가 노출되었다. 발굴조사 전 이곳은 잡목이 덮여 있었으며, 주 민들의 전언에 의하면 10여년 전까지 군부대 훈련장으로 사용되었다 고 한다. 그 후 경작지를 개간하는 과정에서 일부는 농업용수를 확보하 기 위하여 굴착되거나 민묘가 조성되면서 훼손되었다. 그렇다해도 현 재 혜음원지에서는 이 지역이 가장 훼손이 덜 된 곳이기 때문에 유구 가 잔존하고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발굴조사 결과 상부 유구는 거의 유실되었지만 다행히도 하부 유구는 남아 있어서 건물지의 구조, 규모, 배치 상태 등을 파악할 수 있었다. 한편, 가지구 건물지는 크게 3단(남쪽부터 하단, 중단, 상단)의 석축 에 의하여 구분이 되고 있다. 조사된 전체 면적은 東西 54m×南北 47m 이다. 이곳의 지형은 북쪽이 높고 남쪽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고도 가 낮아지고 있다. 경사면에 석축을 하고 지반을 다져서 평탄하게 한 후, 그 위로 건물을 축조하였다. 각 단은 계단을 통해서 오르내릴 수 있 도록 하였다. 서술의 편의상 이를 남쪽부터 하단·중단·상단 건물지로 명 명하여 기술하였다. 아직 전체 사원의 규모와 전각의 배치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들이 규명될 때까지 임시로 붙여진 명칭이다. 그런데 이상 3단의 건물지는 중단 석축을 기준으로 다시 2群으로 나 누어 볼 수 있다. 즉 중·상단 建物址과 하단 建物址로 묶을 수 있다. 가. 中·上段 建物址 중·상단 건물지는 모두 유구 하부에서 원토층이 노출되고 있고, 출토 되는 유물도 시기 차이가 없다. 창건 당시의 건물 배치가 그대로 드러 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건물지의 성격을 살펴볼 때, 제일 먼저 주목 되는 것은 건물의 배치 상태이다. 중앙에 대형 건물을 중심으로 부속 건물들이 좌우대칭을 이루며 배치되고 있다. 건물 배치가 일정한 격식 을 가지고 이루어진 것이다. 이 건물지가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특수 한 용도로 사용하기 위하여 축조된 것 일 가능성이 크다. 건물의 구조에 있어서도 특이한 점이 발견된다. B 건물지의 경우 내 부 2열의 초석 간격이 바깥쪽 초석 간격 보다 커서 내부 공간 활용을 극 대화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D 건물지와 G 건물지도 마찬가지 이다. E 건물지와 F 건물지는 초석의 횡렬은 3.5m이지만 종렬 간격은 1.3m로 일반 건물 보다 좁다. 이 경우 내부의 공간이 3부분으로 나누어 져 일반적인 건물의 용도로 구분되는 것이다. 또한 석축과 담장에 의하 여 공간이 완전히 폐쇄된 고립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온돌시설이나 다 른 난방시설도 발견되지 않는다. 출토된 유물도 건물의 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중·상단 건물지를 발굴 하는 과정에서 용두와 치미를 비롯한 다량의 귀목문 막새기와가 출토 되었다. 평기와의 경우에도 태토가 정선되고 분할 상태가 깨끗하며 앞 면을 정면하는 등 고급품이었다. 초석과 기단석을 비롯한 석제품도 잘 다듬어져 있었다. 이상으로 보아 이 건물지는 특수한 목적으로 조성되었던 것으로 판단 할 수 있다. 우선 혜음원이 사원이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것이 법당 공간이었을 가능성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찰과 원이 같이 있을 때 원과 사찰의 공간이 분리되어 있다. 용두와 치미를 비롯 하여 다량의 귀목문 막새기와 등 고급건물에 쓰이는 유물이 출토되었 기 때문에 법당구역으로 볼 수 있기도 하다. [혜음원신창기]에도 의하 면 혜음원에 법당이 있었다고 기록되었다. 그러나 이곳을 법당으로 보 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첫째, 법당 구역 일 경우 전면에 큰 마당이 존재하지만 여기에는 마 당 공간이 좁다. 둘째, 법당 구역일 경우 개방된 구조를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하 지만 이곳은 사방이 폐쇄되어 凡人이 근접하지 못하게 하였다. 통행은 중단 석축에 시설된 3개의 출입문으로 만 가능하도록 하였고, 그것도 중단에서 상단까지 좁은 통로를 거치도록 하였다. 셋째, 출토된 유물과 유구 가운데 불교와 관련된 것이 존재하지 않는 다. 이 같은 사실로 보아 이 곳을 법당 구역으로 보기에 문제가 있다. 그 렇다면 이곳은 어떤 용도로 축조되었을까? 이 문제를 규명하려고 할 때 [혜음사신창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주목된다. "임금께서 남쪽으로 순수하신다면 행여 한 번이라도 이곳에 머무르 실 일이 없지 않으리니 이에 대한 준비가 있어야 한다"하여 드디어 따 로 別院 한 개소를 지었는데, 이 곳도 아름답고 화려하여 볼만하게 되 었다. 혜음원에 행궁이 세워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곳을 바로 혜음사신창 기에 기록된 별원 즉 행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생각된다. 건 물의 배치나 구조가 궁궐 건축에서 볼 수 있듯이 좌우 대칭 구조를 이 루고 있고 각 건물의 구조가 특수한 용도로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또 한 용두와 치미를 비롯한 출토 유물도 행궁이렀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숙종·예종대에는 국왕의 남경 순행이 자주 있었고 그 경로는 혜음원 을 지나가는 것이었다. 혜음원이 예종의 명에 의하여 축조되었던 만큼 빈번한 국왕의 남경 행차를 대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혜음원 은 개경과 남경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고 주변에는 마땅한 국왕의 유숙 처가 없다. 때문에 혜음원에 국왕의 남경 행차시 유숙할 수 있는 공간 을 마련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중·상단 건물지로 생각된다. 따라서 B 건물지가 正殿에 해당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전을 중 심으로 부속 건물을 좌우대칭으로 격식을 가지고 배치되었던 것이다. 또한 행궁이기 때문에 석축과 담장으로 폐쇄하여 하단 건물지와 구분 하고 凡人의 근접을 막았던 것이라 하겠다. 나. 下段 建物址 하단 건물지는 전체가 발굴된 것은 아니지만 현재까지 노출된 상태 로 보아 일단 원지의 일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측면이 모두 1칸으로 동일하고, 잔존하는 상층초석과 심방석으로 보아 각 칸이 벽으로 막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2칸마다 1개씩 화덕시설이 있어서 화덕이 있는 1칸과 없는 1칸이 1쌍을 이루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 곳 은 일반 여행자를 위한 院址의 일부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아직 속단하기는 이르고 더 자세한 구조나 성격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확장 조사를 실시하여야 할 것이다. 2. 출토유물 이 번의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유물은 대부분 고려시대로 추정되며, 당시 건물의 성격 및, 규모, 건립시기를 규명하는 근거를 제공하고 있 다. 여기에서는 출토된 유물을 기와류, 자기류, 토기류, 기타유물로 분 류하여 간략하게 정리하고자 한다. 1) 기와류 기와류는 건물지 외곽부를 중심으로 전 구역에 걸쳐 다량으로 출토되 었다. 특히 건물지 외곽에 설치된 배수로에 집중적으로 묻혀 있었다. 이것은 석축 위에 낮은 기단을 마련하여 건립한 건물들이 화재 등으로 인하여 일시에 기단부 외곽 낮은 지역으로 무너지면서 매몰된 것으로 추정된다. 기와들의 양상을 보면 고려시대 기와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 으며, 그 이전시대로 올라가는 기와들은 출토되지 않았다. 또한 동일층 에서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조사된 지역의 건물들은 고려시대에 창건 되어 경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기와들은 평기와류와 막새류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상당량의 명문기와와 특수기와가 출토되었다. 막새류 중에 명문이 새겨진 것은 암막새이다. 명문암막새는 막새면 좌 우에 귀목문을 두고 그 사이 중앙에 세로로 "惠蔭院"이라 양각하였다. 글자체가 동일한 것으로 보아 하나의 글자판형으로 제작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막새류는 연화문 수막새가 일부 출토되기도 하였지만 고려시대 전형적 인 귀목문 수막새와 암막새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연화문 수막새는 크 기와 문양에 따라 2종류가 출토되었는데, 특수한 용도를 위하여 제한적 으로 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수막새는 막새면 직경에 따라 크게 대 ·중·소 3가지 유형으로 구분되며, 문양이나 용도에 따라 10여종으로 분 류된다. 대형 수막새의 막새면 직경은 15cm이다. 막새면은 테두리에 2 條로 돋을띠를 두르고 중앙에 귀목문을 양각하였으며, 귀목문 주위에 굵은 1조의 돋을띠나 가는 2조의 돋을띠를 정연하게 돌렸다. 암막새도 수막새와 마찬가지로 막새면에 따라 10여종으로 분류된다. 막새면 좌 우에 2개의 귀목문을 장식한 전형적인 고려시대 기와로 외곽이나 귀목 문 주위에 1조나 2조로 돋을띠를 돌렸다. 암막새 중에서는 막새면 외곽 에 윤곽대를 돌리고 낮은 귀목문만을 시문한 것도 있고, 막새면을 자 른 형태도 있어 모서리 등 특수한 용도에 사용하기 위하여 제작된 것들 도 출토되었다. 막새기와들은 막새면의 크기에 따라 크게 대중소 3가지 유형으로 분류 되는 것으로 보아 건물의 규모나 격에 따라 올려졌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막새면의 문양 수법에서 정연한 것이 주류를 이루지만 조잡한 것 도 있어 건물의 지붕부를 부분적으로 번와 또는 보수를 위하여 제작 사 용되었음도 알 수 있다. 평기와의 명문은 제작 시기나 장소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중 에서 간지와 "惠蔭寺" 명이 새겨진 것도 출토되었다. 명문으로 보아 院 과 寺의 공간이 분리되어 있었으며, 寺가 院을 관리 운영하였던 것으 로 추정된다. 평기와는 대형과 소형으로 분류되는데, 대형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수 키와는 무문이 대부분이며, 암키와는 선문·어골문·사격자문·복합문 등 다양하다. 그 중에 등면의 중앙에 띠형태의 문양대를 마련하고 상하대 칭형 어골문이나 집선문 또는 기하학적인 문양을 배치는 형태와 복합 문이 다수 확인된다. 기와 안쪽면에는 모골에 마포를 대고 성형한 흔적 이 역력하며, 주로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와도를 그은 후 분할하였다. 암키와는 기와끼리 서로 잘 맞물리도록 하단부가 약간씩 바깥쪽으로 벌어져 있다. 암키와 중에서 명문기와가 19점 출토되었는데, 마모가 심 하여 정확한 판독은 어려운 상태이다. 명문이 새겨진 암키와들은 돋을 띠를 두고 그 사이에 양각하였다. 명문 암키와는 다른 암키와들과 차이 가 있는 것으로 보아 별도로 제작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특수한 용도에 사용하기 위하여 기와 표면에 파수와 같은 돌출부 를 붙인 것도 출토되었다. 이것은 기와가 떨어지지 않도록 고정하거나 다른 기와가 밀리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되나 추후 검토가 필 요하다. 이외에도 특수한 용도에 사용하기 위하여 별도로 제작된 기와들과 치 미편과 용두편도 출토되었다. 치미편은 몸통·날개·꼬리 부분 등이 일부 출토되었는데, 소형으로 추정된다. 용두편은 입체적이기보다는 평면적 인 조형을 보이며 파손이 심하지만 콧구멍과 한 쪽 눈이 분명하다. 입 아래쪽에 결구 흔적으로 보아 마루부 끝에 장식하였던 것으로 추정된 다. 2). 자기류 출토된 자기류는 주로 고려청자이며 중국산 자기와 분청사기도 일부 나타난다. 청자는 태토와 유약이 정선되었으며 규석을 받쳐 갑발안에 서 정성스럽게 구운 고급청자가 많다. 그리고 지방가마에서 번조한 조 질청자도 드물게 있다. 종류는 완, 대접, 접시, 바리떼, 잔, 뚜껑, 두침 등이 확인되고 있는데, 주로 완, 대접, 접시가 많다. 시문되어진 문양 은 무문, 음각, 양각, 상감, 퇴화 등 다양한 기법이 사용되었지만 대부 분 음각으로 구성했다. 완은 굽에서 구연부에 이르는 측사면이 직선에 가깝고 구연부에서 살 짝 외반하여 전체적으로 단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릇의 외면에 는 아무런 문양이 없고 내면의 구연부에는 음각선대를 둘렀다. 간혹 내 측면에 당초문양대를 시문한 경우도 보인다. 굽받침에 있어서는 작은 규석알갱이를 3∼4개 받치거나 접지면 유약을 닦아내고 고운 모래를 받치기도 하였다. 대접은 굽에서 구연부에 이르는 측사면이 완만하게 곡선을 이루고 있 으며 구연부에 가서 살짝 내만하고 있다. 그릇의 내저면에는 원각을 두 었으며 문양에 있어서는 음각과 양각기법을 사용하였다. 외면은 주로 무문으로 남겨두고 내측면에는 음각대선 아래쪽으로 앵무문을 시문한 경우는 음각으로, 내측면에 화문과 포도덩쿨은 양각으로 표현하였다. 굽은 윤형굽이며 접지면까지 유약을 입힌 후 작은 규석을 받쳐 번조하 였다. 접시는 다른 기명에 비해 여러 형태를 보이고 있다. 구연이 내만, 직 선, 외반한 것으로 나눠볼 수 있으며 굽은 윤형굽과 평굽으로 구분할 수 있다. 문양기법에 있어서도 음각, 양각, 상감, 퇴화 등 다양한 기법 을 사용하였다. 굽받침에 있어서는 윤형굽이나 굽이 별도로 없는 경우 규석을 받쳤고 평굽인 경우는 굽부분의 유약을 닦아낸 뒤 번조한 것으 로 보인다. 바리떼는 5점이 포개진 채 일괄로 출토되었는데 구연이 19cm내외, 16cm 내외 大·小로 나눠진다. 굽에서 구연에 이르는 측사면은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구연은 살짝 내만하고 있어 전체적인 모습이 반달과 흡 사하다. 문양에 있어서는 외면은 무문으로 남겨두었으며 안쪽 구연부 와 바닥면에 음각대선을 둘렀다. 굽은 평굽과 오목굽이며 굽부분에는 유약을 입히지 않고 태토 자체로 내버려 두었다. 잔은 원통형과 반구형이 출토되었는데 원통형은 외면에 연판이 반양 각되어 있고 반구형은 외면 구연부에 음각이나 흑상감으로 뇌문대가 둘러져 있다. 또한 손잡이 있는 뚜껑과 소형 합의 아랫부분이 출토되었다. 뚜껑은 등면에 운문과 뇌문이 있고 안쪽에 내화토비짐이나 규석을 받쳐 번조 하였다. 합의 몸체는 뚜껑과 접하는 면에 뇌문을 백상감하였으며 굽받 침에는 규석을 사용하였다. 중국산 자기는 송대의 백자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접시가 많다. 접 시의 대부분은 구연부에 유약을 입히지 않고 번조시 구연부가 아랫쪽 으로 향하게 하였다. 혜음원지에서 출토된 고려청자는 유약과 태토가 아주 정선되고 비색 을 띠며 굽받침에 있어서도 규석을 많이 사용한 고급청자 일색이다. 문 양에 있어서는 음각 앵무문, 양각 포도문, 상감 뇌문·국화문, 퇴화 국화 문을 사용하였다. 고려청자 중에서 비색에 문양이 들어가고 규석받침 을 사용한 청자는 그 사용시기가 비교적 주로 11∼12C에 한정적으로 나타난다. 전체적인 청자의 기형과 문양을 볼 때 강진군 대구면 용운 리 10-Ⅱ층 출토품과 비슷하지만 규석받침을 한 것으로 보아 강진군 대 구면 사당리 생산품으로 추정된다. 공반 출토되는 중국자기도 기형이나 색, 문양, 번조방법 등으로 보아 송대 定窯와 경덕진 생산품으로 추정된다. 3) 토기류 혜음원지에서 출토된 토기는 호·옹류와 병류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파손되고 결실부분이 많아 복원되는 것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호류는 광견호, 단경호, 편호 등의 기종이 파악된다. 복원된 토기를 통해서 보면, 높이 20㎝ 내외로, 경부가 없거나 아주 짧게 올라가며 외 반되고 바닥이 편평한 평저형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토기질은 아주 무른 연질이거나 경도가 높은 연질이 많다. 편호는 4면이 눌려진 형태 가 확인된다. 옹류는 회청색 경질로, 평저의 바닥에 배가 부른 형태로 추정되는데, 대부분 파편이기 때문에 전체 기형파악은 어렵다. 병은 반구형의 형태를 가진 구연부편들과 매병이 출토되었다. 대부 분 회청색의 경질이다. 매병의 기형을 가진 토기편은 일부 복원이 되 었는데, 제작과정에서 그 형체가 일그러졌으며, 기포가 발생되었다. 잔 존높이는 32㎝로, 구연은 결실되었다. 출토된 토기의 제작기법은 돌려쌓기와 물레를 이용한 방법이 확인된 다. 정면방법은 타날기법이 대형토기편에서 많이 나타나 있는데, 주로 내벽에서 다양한 문양의 박자흔이 관찰된다. 또한 회전력을 이용한 물 손질흔도 잘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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