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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왕궁리유적

2001-11-30 13:55:00
조회 2307
익산 왕궁리유적 발굴조사 1. 조사개요 ㅇ 조사지역 - 서성벽 북편 체성부 및 그 내외측 유구 조사 - 왕궁리유적 남편 전시관건립부지 일대 ㅇ 조사기간 : 2001년 3월∼6월, 9월∼현재. ㅇ 조사목적 : 왕궁리유적의 성벽과 그 내외측 조사를 통해 성벽의 구 조와 축조방식, 축조시기를 규명하고, 주변의 유구조사를 병행하 여 유적의 고고학적 성격과 역사적 의미를 밝힘. Ⅱ. 조사내용 가. 서성벽 북편 일대 1) 유구조사 왕궁리유적은 기본적으로 잔존한 장방형의 성벽(남북 약 495m, 동서 약 235m)과 내부 유구확인을 중심으로 연차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남 성벽과 북성벽은 평면조사와 절개조사를 통해 그 구조적 특성이 어느 정도 밝혀졌으며 동성벽과 서성벽 남편 역시 전체 성벽구간이 완전히 조사되지는 않았으나 대체적인 성격은 파악되었다. 또한 사적 중심에 위치한 사지와 건물지 등을 조사한 바 있다. 금년 조사한 서성벽 북편일대는 유적 북편에 위치한 남북향 능선의 비교적 완만한 서사면의 서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바로 서쪽에는 금 마-전주간 도로가 연접해 있다. 이들 능선과 도로사이에는 후대에 경작 을 위해 비교적 잘 정지된 평지가 있다. 탐색을 통해 조사지역의 층위를 확인한 후 신속한 발굴을 위해 표토 층과 일부 경작층, 그리고 체성부를 덮고 있던 구도로의 바닥층을 제거 하였다. 각 유구에 대한 세부 설명은 다음과 같다. 가) 체성부 서성벽 북편 조사구간은 약 130m이며, 성벽의 남편구간과 달리 북편 은 구도로가 체성부의 상면을 파괴하고 건설되었었기 때문에 지상의 성벽축조물 뿐 만 아니라, 그 하부 역시 그 윤곽만을 겨우 알아 볼 정도 로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또한 구도로를 건설하던 때와 그 이전 어 느 시기 약 두 차례에 걸쳐 체성부의 중심부를 굴착한 것으로 보여 체 성부내부에 대한 상세한 조사는 진행할 수 없었다. 남에서 북으로 올라오면서 약간 서편으로 치우친 서성벽의 구조와 규 모를 알아보기 위해 절개조사한 결과, 생토층인 황갈색점질토층 위에 서 발견된 암적갈색점토층을 체성부 하부구조의 구축토로 삼고, 길이 약 40∼50cm내외의 돌들을 성벽하부의 보강재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체성부 외측은 노출상면에서 약 50cm가량의 깊이까지 암적갈색점토 층이 발견되었고, 현 도로와 접한 지점에서는 백제계 기와편이 도로쪽 으로 퇴적이 깊어지면서 노출되고 있으나 도로로 인해 더 이상의 조사 는 불가능하였다. 각 구간별로 체성부의 잔존규모가 다르지만 가장 양 호한 경우에는 약 3단의 석축이 남아있기도 하며 이는 지표하 약 40∼ 50cm의 깊이에 해당한다. 이들 석축 상면높이의 외측에서 백제계 와편 이 체성부로부터 약 1m가량 떨어져 열을 지어 발견되는데, 이는 성벽 폐기 당시 묻혔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된다. 체성부 내측에서는 암적갈색점토층이 체성부로부터 약 1.5m지점까 지 발견되었다. 이 폭은 기존의 조사내용을 참고하면 부석시설이 놓였 던 폭과 대체로 부합하고 있으나 유구는 발견되지 않았다. 일부 성벽구 간의 내벽으로부터 약 3m정도 떨어진 지점에서 막음시설로 추정되는 석렬이 노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체성부내측은 후대의 교란으로 인 해 층위가 불안정하여 구간별로 다른 퇴적양상을 보여 주고 있다. 특 히 앞서 언급한 석렬은 조사구간 전역에서 발견되지 않으며, 노출구역 내에서도 일부가 유실되기도 하였다. 또한 부분적으로 보이는 괴석과 와편이 산포되어 있는 경우에도 자기편이 공반되어 시기적으로 상당 히 늦다고 판명되었다. 이들 성벽 하부의 성돌을 기준으로 하면 성벽의 너비는 약 3m내외로 추정되며, 이는 기존의 성벽조사 결과와도 일치하고 있다. 나) 서북모서리 거의 직각으로 서성벽과 북성벽이 만나는 서북모서리는 하부 성돌이 바깥면은 비교적 고르게 열을 맞추고 있는 반면, 안쪽은 별다른 가공없 이 자연석 그대로 시설하였다. 모서리 내외측 모두에서 암적갈색점토 층이 비교적 두텁게 채워져 있었고, 내측의 경우는 괴석이 비교적 밀집 되어 노출되었으나 특별한 시설을 위한 것은 아닌 듯 하다. 이 서북모서리의 내외측에서도 서성벽체성부와 같이 각각 와편이 수 습되었으나 교란층을 제거한 층위의 바로 아래에서 수습되어 확실하 게 축성 당시 혼입된 것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다) 공방폐기지 체성부 내측 약 3m지점부터 노출되기 시작한 공방폐기지는 평면상 서편이 돌출된 장방형이며, 규모는 남북 약 15m, 동서 약 9m(돌출부 약 2m포함)이다. 내부에는 소토가 두께 약 30cm로 퇴적되어 있으며, 여기서 유물이 집중적으로 출토되었다. 그 아래에는 생토층인 황갈색 점질토층 바로 위에 퇴적된 갈색점토층이 발견되었는데 유물은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주로 목탄과 자그마한 소토덩어리 그리고 약간의 점 토로 구성된 소토층에서는 간층이 발견 되지 않아 비교적 짧은 기간 에 형성된 듯 보인다. 이 공방폐기지 주변에서 기둥구멍이나 초석 등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돌출부의 남편에 불로 구워져 단단해진 두께 약 10cm내외의 소토층 일 부가 노출되었다. 이 소토층이 당시 공방지였을 가능성은 있으나 잔존 부분이 워낙 작아 현재로서는 단정하기 힘들다. 그렇지만 생토층을 파 서 이들 공방잔해물을 매립하였고, 유구의 동단이 남북으로 일직선을 이루고 있는 점, 그리고 후술되는 소토구의 내부퇴적양상 등을 고려하 면 이 유구의 주변에 공방지가 있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판단된다. 이외에 이 유구의 서남편에는 화강암 석편이 퇴적된 채 노출되었는 데, 성벽의 성돌을 제작할 때 나온 격지편 등으로 보인다. 주의되는 점 은 이들 화강암 격지편이 주변에 넓게 퍼져 있는 소토층 아래에 있다 는 것이다. 이 유구에서는 상당수량의 도가니, 기와, 토기, 금속슬랙, 그리고 당 시 공방지에 사용된 벽체시설 잔해등이 출토되었다. 라) 燒土溝와 그 주변 이 유구는 조사지역의 동단에서 서쪽으로 길게 이어지다 공방폐기지 의 남쪽에 이르러 남쪽으로 S자형으로 굴곡지면서 길게 남편으로 뻗 어 있다. 아직 입수구와 출수구가 조사되지 않아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으나 조사된 길이는 약 70m이다. 소토구는 그 내부구조를 기준으로 크게 두 구간으로 구분된다. 하나 는 폭이 약 1.0∼1.6m인 서남쪽 구간으로서 내부충진토는 소토와 사질 이 섞여 있고, 생토층인 황갈색점질토층을 파고 만들었으며, 바닥과 벽 면에 특별한 시설을 하진 않았다. 토기편과 와편, 그리고 도가니편이 상당수 발견되었다. 다른 하나는 폭이 약 0.20∼0.25m의 폭을 가진 동 쪽 구간으로서 내부에 갈색점토층이 충진되어 있고, 황갈색점질토층 이 벽면을 구성하고 있으며, 바닥에 석영질 돌들을 깔아 놓았다. 특히 이 구간내에서도 서편구간은 바닥돌이 모두 석영질인 반면 동쪽 으로 갈수록 화강암 석편이 많아지고 있어 주목된다. 여기서는 한 두 점의 와편만이 출토되었다. 소토구 서남편구간의 서쪽 약 40㎡의 소토가 섞인 갈색점토층에서 와 편, 도가니편, 토기편 등이 집중적으로 출토되었다. 이 지점은 공방폐 기지의 남단과 아주 가까워 일부 폐기과정에서 흩어진 것이 아닌가 추 정된다. 마) 건물지 남북향의 산자락 서편기슭에서 발견된 건물지일대는 밭으로 경작되 었던 구역으로 2001년도 상반기에 지중레이다 탐사작업을 통해 지하 에 유구가 잔존할 가능성이 높다는 판정이 있어 조사하게 되었다. 표토층을 제거하자 다량의 기와편과 토기편, 그리고 괴석들이 약 20cm 두께로 노출되었다. 이 층위는 갈색사질점토층으로서 일부 자기 편 등도 섞여 있어 후대의 교란층으로 판단되었다. 이들 와적층을 제거한 지표하 약 50cm지점부터는 적색점토층이 노출 되기 시작하였다. 이 층에서는 여러 개의 산돌 혹은 치석된 돌로 구성 된 적심석이 발견되었다. 그렇지만 그 간격은 대략 420cm이며 일부는 300cm내외로 일정한 간격으로 분포하고 있진 않다. 또한 약간 동남편 으로 적심석의 축이 기울어져 있고 적심석의 구성도 달라 동일건축물 로 보기 어려우며 이들 적심석의 축과 대응하는 유구가 발견되지 않아 현재로서는 이 적심석건물지의 구조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기는 어렵 다. 다만 적심석이 매우 정연하게 깔려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그리 고 유물상의 시기적 차이를 고려할 때 건물지가 적어도 두 시기정도로 구분되지 않은가 추정된다. 이들 적심석이 발견된 적색점토층에서는 성벽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장방형의 돌이 발견되고 있으나 그 주변에 일부 갈색사질점토층이 섞여 있어 이는 적심석 노출층위보다 는 다소 늦을 것으로 판단된다. 2) 출토유물 서성벽과 건물지(N20, 21W7, 8, 9)유구에서는 기와류가 집중적으로 출토되었는데, 백제말에서 통일신라기에 해당되는 선문·격자문계 평기 와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또「辰」「申, 布」명 인장와와 대부완류, 선문이 타날시문된 대옹류의 토기파편들이 다량 확인되고 있다. 공방 폐기지, 소토구와 그 주변조사중 소토층에서는 백제시대 후기에 속하 는 기와, 토기를 비롯해 많은 양의 도가니류가 출토되었다. 기와류는 8 엽단판연화문 수막새를 비롯해 「上 乙瓦」「前 乙瓦」명 인장와, 무 문과 단선문의 평기와가 대부분이며 평기와중 내면에 일반적인 평직 의 마포가 아닌 승석포흔이 있는 것이 여러 점 수습되었다. 특히 왕궁 리 유적에서는 아직까지 출토된 바 없던 연목와편이 수습되었는데 미 륵사지 출토품과 같은 형식이지만 표면에 녹유가 시유되지 않은 점이 주목된다. 토기류는 소완이나 뚜껑 등 소형 기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파편 상태로 수습되었으며 기외면에 선문이 타날된 호와 자배기류, 직 구호, 이배라고도 불리우는 전달린 토기, 대부완 등 부여 일대에서 많 이 출토되는 기종들이 확인된다. 출토유물 중 공방과 직접적인 관련을 지닌 것은 도가니류로서 크기 로 보면 대략 대·중·소 세 종류, 용도로 보면 유리도가니와 뚜껑, 금속도 가니, 그리고 발견된 예가 드문 금의 잔흔이 있는 도가니로 구분할 수 있다. 전체 출토수량을 보면 저부 약 40여점, 구연부 200여점, 동체부 170여점 그리고 뚜껑편 30여점으로 약 470여점에 이르며, 이 중 대형 의 유리도가니의 출토수량이 가장 많고, 금의 잔흔이 있는 도가니도 10 여점이 수습되었다. 도가니의 형태 및 재질을 보면 대부분 첨저형으로 저부에 돌기가 있 으며 일부는 돌기가 없는 것, 원저형의 것 등이 있다. 태토는 굵은 석영 질의 사립과 함께 토기의 파쇄편, 그리고 가는 사립이 혼입된 점토로 구성되어 있다. 출토된 도가니 중 금의 잔흔이 남아있는 것의 기내면에 는 얇은 니질의 점토가 발라져 있으며, 유리를 제작했던 것으로 보이 는 도가니의 내면에는 0.1∼0.2㎝ 내외 두께의 유리막이 전면에 남아 있다. 유리의 색조는 대부분 녹색계통을 띠는데 일부 자색, 암갈색을 띤다. 산화되어 하얗게 변색되거나 박락된 상태의 예도 있다. 유리도가 니의 경우 미륵사지출토 예와 마찬가지로 단면상 이등변 삼각형태에 장방형의 손잡이가 달린 뚜껑이 공반되었으며, 이들 뚜껑 내면에도 유 리막이 두텁게 형성되어 있다. 3) 토층조사 이번 조사에서 체성부 내·외측의 토층을 조사하기 위해 두 지점을 절 개한 결과 N36W12지점의 북벽이 비교적 안정되어 있어 이를 기준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체성부 외측의 경우는 토층이 단순하여, 성벽하부 성돌이 시설된 암 적갈색점토층이 약 35cm가량 구축되어 있고 그 아래로 생토층인 황갈 색점질토층이 형성되어 있다. 여기서 암적갈색점토층에서는 유물이 전 혀 출토되지 않았고, 다만 小石이 일부 수습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도 로변쪽으로 와편층이 발견되었는데, 이 층이 체성부 폐기시 퇴적된 것 인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다. 체성부 내측의 경우는 퇴적양상이 수평적으로 단절되어 있어 층위를 일관되게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에 구간별로 나누어 그 수직적 층위배 열을 설명하도록 하겠다. 최상층은 일부 와편이 혼입되어 있으나 자기편 등이 수습되어 안정되 지 못한 층이다. 체성부내측으로부터 약 2m까지는 두께 약 20cm내외 의 암적갈색점토층이 구축되어 있는데 그 상면에 U자형으로 가는 모래 층, 암적갈색사질점토층, 적갈색사질점토층 등 사질성토층이 퇴적되 어 있다. 그리고 그 서편에는 서→동으로 약간 비스듬히 굵은 모래층 이 같은 level선상에 퇴적되었다. 체성부로부터 약 5m지점에는 생토층인 황갈색점질토층이 비교적 높 게 형성되어 있다. 그 서편으로는 최하층이 연적갈색점토층이며, 그 위 에 흑색의 소토층이 퇴적되어 있다. 이 소토층은 출토유물로 보아 공방 폐기지의 소토층과 동일하다고 판단된다. 그리고 그 상면에는 다량의 와편이 포함된 흑갈색사질점토층이 퇴적되어 있는데, 현재 이 층에서 출토된 와편은 대부분 백제계이나 일부 통일신라계도 포함되어 있다. 나. 유적 남편 전시관 부지일대 이 일대에 대한 조사는 유적 남편 유적관련 유구의 존재여부 확인과 향후 건립예정인 왕궁리유적 전시관 부지에 대한 시굴조사로 진행되었 다. 조사지역은 유적의 북쪽에서 남쪽으로 낮아지면서 형성된 낮은 구릉 지대로 동·서 양편은 구릉에서 약 2∼3m가량 낮다. 조사전에는 주차장 과 밭으로 사용되고 있었으며, 일부는 관목과 수풀로 덮여 있었다. 조사는 탐색Tr.(2×9)를 남북향으로 약 100여개를 설치·진행하였다. 1) 토층조사 이 일대는 낮은 구릉이 형성되어 있어 중심부와 동·서 양편의 퇴적양 상이 서로 다르게 나타났다. 중심부는 지표하 약 15∼20㎝까지는 경작 층이며, 이를 제거하자 바로 생토층인 석비례층과 그 사이로 일부 적색 점토층이 긴 띠를 보이며 노출되었다. 동편은 L.B.M을 기준으로 하면 중심부보다 최대 약 3m가량 낮으며, 그에 따라 약간 두터운 퇴적양상을 보인다. 퇴적층은 대략 둘, 혹은 세 층 정도로 구분되는데, 대부분 교란되어 있으며, 일부 안정되어 보이 는 층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유적관련 유구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았다. 특히 동편의 경작지일대는 깊이 약 1.8m정도의 깊이에서 굵은 모래층 이 상당히 깊게 퇴적되어 있었으나 굵은 자갈이외에 유물이 발견되지 는 않았다. 동편의 북쪽에서는 상당한 양의 기와가 발견되었으나 이는 이전의 성벽조사시에 굴토된 흙을 매립하는 과정에서 포함된 유물로 확인되었다. 서편은 퇴적이 깊지 않았으며, 지표하 약 1m이내에서 대부분 생토층 이 확인되었다. 다만 이들 퇴적층내에서 소량의 무문토기편이 발견되 었으나 관련된 유구의 흔적은 없었다. 2) 출토유물 각 탐색pit별로 층위조사를 통해 유물을 수습하였으나 각 퇴적층이 대 부분 교란되었고, 관련유구도 발견되지 않았다. 유물은 경작층과 그 바로 아래층인 적색, 혹은 적회색사질점토층에 서 출토되었는데, 대부분 백제계와 통일신라계이며 종류로는 와편, 토 기편 등이다. 이 중에는 인장와와 벼루편이 포함된다. 또한 극소량 무 문토기편도 발견되었다. Ⅲ. 조사성과 금년 조사는 우리연구소에서는 우선적으로 추진하였던 성벽조사 및 그 내측유구에 대한 조사, 그리고 성벽과의 시기적 관련성여부를 규명 하는데 조사의 목적을 두었다. 조사결과, 서성벽의 체성부는 앞서 밝힌 바와 같이 도로건설로 인해 대부분이 파괴되어 그 하부의 일부만이 잔존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 다. 그 가운데에서도 일부 체성부를 인지할 수 있을 정도의 석축이 잔 존하여 기존의 성벽조사의 결과와 비교할 수 있는 고고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번 조사의 주요내용 중의 하나는 공방폐기지에 대한 조사이다. 공 방지였는지 아니면 공방폐기지로 보아야 할 지는 좀 더 연구해야겠지 만 현재 유물의 출토양상과 유물구성에서 보면 한쪽이 돌출된 장방형 의 이 유구는 공방지로 보기는 어렵고 공방에 사용되었던 용구와 그 잔 해물을 폐기한 장소로 판단된다. 다만 이 유구의 서남쪽에 남아있는 소 토층이 혹시 공방지의 바닥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다. 현 재 이 유구의 형성연대는 출토유물로만 본다면 대체로 백제시대 후기 로 편년할 수 있을 것이다. 공방폐기지의 동·남편에서 발견된 소토구는 출토유물과 소토로 구성 된 내부충진토가 공방폐기지와 거의 유사한 점을 고려하면 같은 시기 에 공존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소토구의 서남편구간과 동편구 간의 내부충진토가 사질성 소토와 갈색점토로 확연히 구분되는데, 이 는 사질성소토의 퇴적이 공방폐기지로부터 소토가 흘러 들어왔을 수 도 있겠으나 그 보다는 부근에서 공정이 직접적으로 이루어져 나타난 현상이 아닌가 추정된다. 또한 바닥면이 생토와 석영석으로 나뉜다는 사실은 의도적인 행위로서 당시의 공정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 각된다. 상기한 공방폐기지와 소토구에서 많은 유리도가니, 금속도가니, 그리 고 금의 잔흔이 있는 도가니가 출토되었다. 이 중에서 도가니의 내부에 서 금의 잔흔이 발견된 사실은 왕궁리유적에서 금을 주물하던 공정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어 주목된다. 이외에 유리도가니 역 시 미륵사지의 예와 더불어 당시 익산지역의 역사고고학적 가치를 새 로운 시각에서 해석할 수는 여지를 제공한다고 생각된다. 이번 조사에서 제기되는 또 다른 문제중의 하나는 서성벽과 공방폐기 지의 시기적 선후관계에 관한 것이다. 공방폐기지는 출토유물이 대부분 백제시대의 후기에 해당하여 대략 적인 연대도 7세기초·중반으로 보고 있다. 만약 이와 같은 공방폐기지 의 연대설정이 맞다면 성벽의 축조시기를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 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를 서성벽 북편의 내외측을 절개한 지점의 북벽 토층을 참고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성벽 하부의 성돌이 놓여 있는 암적갈색점토층은 생토층인 황갈색점 질토층의 직상층에 구축되어 있으며, 그 상면에 모래층과 비교적 두텁 게 암적갈색사질점토층이 퇴적되어 있다. 이 두 층은 하부 구축토인 암 적갈색점토층을 일부 파괴하고 있어 약간 시간적으로 늦다고 판단되 며 아마도 체성부에서, 혹은 체성부로 흐르던 물이 일부 고여 퇴적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달리 동편의 토층에서는 황갈색점질토층위에 회 갈색점토층이 있고, 그 상면에 흑색소토층이 퇴적되어 있다. 이 소토층 은 소토의 구성과 출토물로 볼 때 공방폐기지와 동일시기에 형성된 것 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그 직상층은 비교적 많은 와편을 포함하고 있 는 갈색점토층이 소토층을 파괴하면서 넓게 분포하고 있다. 여기서 출 토된 와편을 보면 백제계와 통일신라계가 혼재하고 있어 소토층보다 는 뚜렷하게 시기적으로 늦으며 이는 소토층이 백제시대 후기임을 층 위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이와 같은 층위구성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점은 체성부 하부 구축 토인 암적갈색점토층을 일부 파괴하면서 퇴적된 모래층과 암적갈색사 질점토층이다. 이 층은 암적갈색사질과 점토가 혼재되어 있고, 단 한 점의 유물도 출토되지 않았다. 이와 대비해서 흑색소토층에서는 금속 슬랙을 포함하여 여러 종류의 유물이 발견되고 있으며, 그 아래층인 회 갈색점토층에서도 일부 와편이 수습되었다. 또한 소토구와, 소토구의 서편에서 다량의 유물이 출토된 점을 생각한다면 앞서의 체성부 하부 구축토와 그 상면의 모래층, 암적갈색사질점토층이 시기적으로 늦는 경우 인근의 유물이 혼입될 개연성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유물이 출토 되지 않아 시기적으로 공방폐기지보다 다소 이른 것이 아닌가 추정된 다. 만약 이 추론이 성립한다면 성벽의 초축시기는 백제시대의 후기에 해당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소토구 동편구간의 바닥돌로 사용된 화강암석편이 성벽 의 성돌제작 후 남은 격지편으로 볼 수 있다면, 그리고 공방폐기지 주 변에 산재된 화강암석편이 역시 같은 과정을 통해 소토층아래에 퇴적 되어 있다면 공방폐기지의 연대는 확실히 성벽초축시기보다 늦을 것이 다. 따라서 성벽은 백제시대 후기 어느 시기에 초축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기존에 성벽과 그 주변 조사연구를 통해 성벽의 축조시기 를 백제시대의 후기보다는 다소 늦은 통일신라 극초기로 보고 있는 견 해가 있고, 특히 이번 조사에서 유구간의 직접적인 층위관계가 밝혀지 지 않았기 때문에 성벽초축시기에 대해서는 다소 시기를 올려 볼 수도 있다는 가능성만을 제기하고자 한다. 유적 남편 전시관 건립예정지에 대한 조사에서는 성벽과 관련된 유구 는 발견되지 않았으며, 유물도 대부분 경작층과 그 아래의 교란층에서 출토되었다. 그렇지만 조사자체가 시굴조사이기 때문에 조사당시 일부 경작지나 비닐하우스가 위치한 지점에 대해서는 조사를 진행하지 못하였다. 또 한 동편의 일부 지역은 모래층에 물이 스며들어 무너지면서 더 이상의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향후 전시관 건립시 굴토 작업을 실시할 경우 미조사지역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려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Ⅳ. 향후계획 '89년부터 우리연구소는 왕궁리유적을 3차5개년계획을 수립하여 연 차조사하여 왔다. 현재까지의 조사실적과 및 향후 계획은 다음과 같다. ◎ 1차년도 발굴실적 ◎ 2차년도별 발굴실적 ◎ 3차년도별 발굴실적 및 계획 : 표 참조(첨부 파일) 이상과 같이 기존의 발굴조사실적과 향후 '03년도까지 발굴계획에 의 해 성벽유구와 성벽내부의 중요지점에 대한 조사는 기본적으로 완료 될 예정이다. 그렇지만 부분적인 탐색조사만 실시된 능선정상부와 서 성벽내측, 그리고 발굴단 사무실일대 등 기 조사지역에 대한 정밀보완 조사 및 아직 미조사지역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가 이루어져야 하기 때 문에 3차년도별 조사가 완료된 이후 4차 5개년 조사가 계획·실시되어 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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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 울산권 광역상수도(대곡댐) 사업 편입부지내 문화유적 발굴조사(2차) 발굴... 운영자 1967 2001.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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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 파주 혜음원지 현장설명회(12/12) 운영자 893 2001.12.12
185 울산권 광역상수도(대곡댐) 사업 편입부지내 문화유적 현장설명회(12/12... 운영자 764 2001.12.12
184 탐진다목적댐 수몰지역내 문화유적 발굴조사 관리자 2232 2001.12.11
183 탐진다목적댐 수몰지역내 문화유적 현장설명회(12/9) 관리자 726 2001.12.11
>> 익산 왕궁리유적 운영자 2308 2001.11.30
181 익산 왕궁리유적 현장설명회(11/30) 운영자 800 2001.11.30
180 연천 신답리고분 발굴조사 현장설명회(12/1) 김충배 942 2001.11.29
179 함평 예덕리 만가촌고분군(2차) 발굴조사 운영자 2032 2001.11.29
178 함평 예덕리 만가촌고분군 현장설명회(11/29) 운영자 802 2001.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