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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소식

이천 설성산성

2001-10-12 16:57:00
조회 2443
이천 설성산성 발굴조사 현장설명회 Ⅰ. 조사개요 ㅇ 조사지역 :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 선읍리 산 115-1번지(경기도 기념물 제 76호) ㅇ 조사기간 : 2001. 8. 1 ∼ 2001. 10. 12일 현재 ㅇ. 조사기관 : 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 Ⅱ. 조사배경 이천은 삼국시대에 신라에 의해 남천정이 설치될 만큼 군사 및 문화 상에 있어 교통의 요지였고, 고구려의 충주 경략에 있어 중요한 거점이 었던 지역이다. 뿐만 아니라 한강유역에 있던 백제 역시 남쪽으로 진출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할 관문중의 하나였다. 설성산성은 삼국시대에 있어 전략적 요충의 하나였던 곳으로 추정되 는 이천시 설성산에 위치하고 있으며, 성내에서는 장호원은 물론 이천 시 일원과 안성 음성군에 이르기까지 넓은 지역이 한눈에 조망되고 있 다. 이 산성에 대해서는 1942년에 발간된 『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 에 소개된 이래 1981년에 단국대학교 학술조사단에 의해 신라시대에 축성된 산성으로 밝혀진 바 있다. 당시의 조사에서는 현존하는 신흥사 와 동·서·북쪽에 개설된 문지와 여러 곳의 건물지를 비롯해 2곳의 샘과 수구지, 정상부에 설치되었던 봉수대 등이 확인되었다. 그간의 연구 결과 설성산성은 확인된 여러 시설물과 성곽의 축성술, 삼 국시대의 상황 등을 고려해 볼 때 신라가 북진을 추진하던 5세기에 축 조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산성이 위치한 지역이 전략 적 요충인 점을 고려할 때 백제 및 고구려에서 활용되었을 가능성 또 한 높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때문에 설성산성은 인근에 위치한 효양 산성과 현재 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에 의해 발굴조사중인 설봉 산성과 관련되어 이천을 포함한 경기도 동남부 지역의 전략 요충지로 주목되고 있다. 설성산성은 1999년 10월∼12월에 걸쳐 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 에 의해 지표 및 시굴조사가 진행된 바 있다. 당시의 조사에서 산성은 전체둘레 1,095m의 포곡식산성으로, 성내에는 건물지 12개소, 장대지 1개소, 우물지 1개소, 문지 2개소 등이 확인되었으며 성벽에서는 기단 보축이 확인되었다. 수습유물과 역사·지리적인 배경을 고려할 때 삼국 시대에 축성되어 고려시대까지 산성으로서의 기능을 유지했던 것으로 판단되며 특히 신라에 의하여 집중적으로 활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 바 있다. 조사단에서는 이 같은 결과를 바탕으로 지도위원회의를 개최 하였고, 위원회에서는 조사 결과를 주목하여 산성에 대한 종합적인 발 굴조사계획의 수립을 지시하였다. 금번의 발굴조사는 이 같은 과정을 거쳐 진행되는 1차 발굴조사이다. Ⅲ. 조사성과 1. 서문지 서문지는 1999년도 지표조사시 성벽 상면이 상단 폭 530cm, 하단 폭 100cm 규모로 함몰되어 있고, 측벽의 면석으로 추정되는 석재가 일부 지표에 드러나 있어서 문지로 추정되었던 곳이다. 또한 주변의 지형으 로 보아 남쪽으로 진입하여 성문을 통과한 다음 다시 남쪽으로 꺾여서 성내부로 들어왔던 것으로 추정하였다. 문의 형식은 성내부와 외부의 고저차가 크기 때문에 현문식으로 추정되었던 바 있다. 그러나 정확한 문지의 형상 및 변화 과정에 대해서는 지표조사의 한계상 확인하기 어 려웠다. 이번 조사는 지표조사시 확인된 서문지의 규모와 시기별 변화상을 파 악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실시되었다. 그 결과 지표조사시 추정한 것과 마찬가지로 서문지는 현문식이었고 통행 방법도 남쪽 계곡에서 성문 을 통과하여 성내부에서 다시 남쪽으로 꺾여졌던 것으로 밝혀졌다. 또 한 서문지는 초축 이후 최소한 2차례에 걸쳐서 개축되었던 것이 파악되 었다. 이를 초축 문지부터 축조 순서대로 각각 1차 문지, 2차 문지, 3차 문지로 명명하였다. 1) 편년 서문지에서는 출토된 유물이 적고 있다고 하더라도 대부분 파편으로 출토되었으며 편년을 설정할 수 있는 표지적인 유물이 없어서 정확한 초축시기 및 개축시기를 파악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다만 2차 문지 가 6세기 후반에서 9세기 사이에 축조되어 사용된 것으로 추정됨으로 1 차문지와 3차 문지는 이와 관련하여 상대적인 편년이 가능하다. 즉 2 차 문지 바닥층에서 네모난 투창이 뚫린 신라 고배굽편이 출토되었는 데, 이는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초반으로 비정할 수 있다. 또 2차 문지 에 사용되었던 초석의 상면 복토층에서 9세기로 편년되는 주름무늬병 편을 비롯하여 9세기경의 유물이 집중적으로 출토되었기 때문에 2차 문지의 폐쇄 시기는 9세기를 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2차 문지에 사용되었던 기와도 와적을 이루면서 출토되었는데 대체로 중심연대는 7세기로 비정된다. 이 같은 사실을 종합할 때, 2차 문지는 신라가 한강 유역에 진출하는 6세기 후반을 상한으로 할 수 있지만 2차 문지 바닥층 의 유물이 7세기까지 걸쳐지기 때문에 하한은 7세기로 할 수 있다. 그 후 2차문지는 9세기경까지 사용되다가 폐쇄되고 그 위로 3차 문지가 축 조되었다. 1차 문지는 2차 문지 이전에 사용되었던 것이기 때문에 축조시기 및 활용시기는 6세기 후반 이전으로 추정하여 볼 수 있다. 1차 문지 바닥 층 및 그 하부에서는 1차문지에 시설되었던 문에 사용되었던 철제류가 출토되었으나 이것만으로 문지의 축조시기를 가늠하기는 어렵다. 그 밖에 토기편이나 기와편은 거의 출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 재로서는 더 이상 축조 및 활용 시기를 구체적으로 규명하기는 것이 불 가능하다. 이 문제는 앞으로 설성산성 발굴이 연차적으로 진행되면서 다른 지역의 발굴 결과와 비교하여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1차 문 지와 함께 축조된 등성시설 점토다짐층에서는 백제토기편이 비록 파편 이기는 하지만 여러 점 발견되고 있다. 1차 문지가 백제와 관련될 가능 성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등성시설이 붕괴가 심하여 상면 은 대부분 교란되어 점토 다짐층 위로는 토층이 명확하지 않다. 등성시 설의 점토다짐층이 초축시의 것은 분명하지만 이후의 변화상(문화층) 을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이에 대한 편년은 신중할 수밖에 없다. 이 문 제 역시 차후의 과제로 남길 수밖에 없다. 3차 문지는 2차 문지가 폐쇄된 이후 축조되었기 때문에 축조 상한시 기는 10세기 이후로 판단된다. 3차 문지 바닥층 상면에서는 고려시대 기와편과 성벽 뒤채움석이 혼재된 채로 퇴적되어 있었다. 인위적으로 와적한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퇴적된 것이었다. 이 기와들은 문지 입 구(성 내부쪽)에서 현재 성지보호 간판이 있는 북쪽 언덕 방향으로 깔 려있었고 문지 입구 남쪽으로는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이 같은 상황으 로 보아 3차 문지가 폐쇄된 이후 3차 문지와 연결된 지표 위에 퇴적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기와들은 문지에 사용된 것이라기 보다는 성지보호 간판이 있는 북쪽 봉우리 주변에 있었던 건물지가 파괴된 후 흘러내린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3차 문지는 고려시대에 축조되어 사 용되다가 성지보호 간판이 있는 지역에 있었던 건물이 폐쇄된 시기에 더불어 폐쇄된 것으로 추정된다. 2) 형상·시설·통행법 일반적으로 산성의 문지는 외부와의 연결이 용이한 지점을 선택하나 동시에 적군에 대한 방어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시설하였다. 주변 지형을 잘 이용하여 방어력을 높이면서 문지를 축조하는 것이다. 설성 산성 서문지도 주변 지형을 잘 이용하여 방어력을 높이고 아울러 통행 에 불편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축조되었다. 서문지 일대 지형은 현재 성지보호 간판이 서 있는 봉우리를 중심으 로 남쪽으로 능선이 흘러가다가 서문지 남쪽 약 30m 지점에서 남서쪽 으로 가지능선이 뻗어나가고 있다. 이 가지능선과 앞의 봉우리 사이에 는 만곡된 작은 계곡이 형성되어 있다. 성벽은 이 계곡을 가로질러 축 조되었기 때문에 외부의 지형은 매우 급하다. 서문지는 이 작은 계곡 의 중심에서 북쪽으로 치우쳐서 축조되었다. 따라서 성 내·외부는 모 두 북쪽은 막히고 남쪽으로 통로가 형성될 수밖에 없다. 또한 성내부 와 외부의 고저차도 크다. 이 경우 ‘二’자형식의 문이나 현문을 조성해 야하는데 여기에서는 현문을 채택하였다. 통로부의 규모와 형태는 각 시기별로 달랐지만 1차와 2차 문지에는 모두 성문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바닥에는 바닥석을 깔고 통 행하였으며 바닥 아래에는 배수시설이 있어서 성내부에서 생겨난 지하 수나 우수를 방출시켰다. 이에 대해서는 문지의 변화 과정에서 후술하 겠다. 성외부에는 통행의 편의를 위하여 등성시설을 마련하였다. 이 등성시 설은 사다리꼴을 반 자른 형태로 문지 전면 외벽에 붙여서 만들었는데 남쪽 진입로 쪽은 좁고, 낮으며 성문으로 오르는 부분은 넓고, 높은 형 태를 하고 있다. 등성시설은 급경사 지역에 시설되었기 때문에 밑으로 부터 위로 약 3단을 이루며 점토다짐층을 시설하고 그 바깥과 상면으로 는 석재를 쌓아가며 축조하였다. 등성시설의 상면 폭은 약 3.5m 이하이 며 진입로 폭도 역시 이와 비슷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등성시설 상면 은 경사를 이루고 있고 폭도 그리 넓지 않기 때문에 많은 병력이 동시 에 올라서기는 어렵다. 다소 통행에 불편함이 따르더라도 성문의 방어 력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로 생각된다. 등성시설의 축조시기는 1차 문지 와 같을 것으로 생각된다. 등성시설의 점토다짐층은 암반층 상면에 시 설되었으며 여기에서는 신라토기나 기와는 출토되지 않고 백제토기편 만 출토되기 때문이다. 또한 개축의 흔적도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등 성시설이 후대에 추가된 것으로 보기 어렵다. 성문의 방어력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는 문지 안쪽에서도 보이고 있 다. 바로 내옹성이다. 내옹성은 문지 안쪽의 지형을 따라 북측벽에서 앞으로 2m 정도 직진하다가 남쪽으로 활처럼 휘어지면서 5.3m 정도 지 속된다. 끝나는 부분이 남측벽에서 성내부로 약 5m 정도 연장된 지점 이기 때문에 북측벽에서 시작된 내옹성이 마치 문지 개구부를 안쪽에 서 감싸고 있는 형태이다. 내옹성은 대체로 석재의 바른면을 앞으로 놓 아 축조하였는데 그 중에는 성벽 면석과 같이 장방형으로 다듬은 석재 도 섞여 있다. 현재는 후대에 시설된 문지에 의하여 훼손되어 북측벽 에 접하는 부분만 비교적 원상태를 유지하고 있고 나머지는 기단석 또 는 토층으로 구분되고 있다. 내옹성의 뒤채움은 삭토한 암반과 면석사 이에 주로 점토를 충진하였기 때문에 성벽 뒤채움 방식과 구별된다. 하 지만 내옹성 기저부를 구성하고 있는 다짐층이 1차 문지의 바닥층과 연 결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내옹성도 역시 1차 문지가 축조되면서 동시 에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내옹성의 기능은 성문으로 진입한 적 이 성내부로 순식간에 진입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내옹성과 서문지 남측벽의 폭은 5m 정도로 1차 문지 폭과 동일하다. 이상의 조사 결과를 종합하여 서문지의 통행방법을 추정하면 다음과 같다. 성 외부에서 성내부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서문지 외부 남쪽 가지 능선을 타고 올라와 성벽 아래에 좁은 통로를 따라서 북쪽으로 약 30m 정도 진행한 다음 등성시설로 올라서게 된다. 그 후 경사진 등성시설 을 올라오면 북쪽 끝부분에서 동쪽으로 90°회절하면서 사다리 같은 시 설을 이용하여 문지 통로부로 올라오게 된다. 통로부로 올라온 다음 성 문을 통과하고 다시 남쪽으로 90°회절하며 내옹성과 문지 남쪽 내벽 사 이에 형성된 통로를 따라서 성내부로 진입하였다. 3) 변화 전술한 바와 같이 서문지는 총 3차에 걸쳐서 변화되었다. 1차 문지는 초축시의 문지이다. 이 문지와 동시에 축조된 시설은 1차 배수로, 등성시설, 내옹성 등이다. 길이는 6m, 폭은 5m 정도이다. 통로 부 바닥은 성벽 뒤채움석을 정리한 후 모래를 깔고 그 위에 바닥석을 올려놓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바닥석을 깔때는 사이사이에 점토를 충 진하였다. 현재 1차 문지 바닥에는 당시 바닥석이 일부 남아 있다. 그러 나 현재 바닥석은 수평을 맞추어 고르게 놓여있지 않고 울퉁불퉁하다. 그 원인은 화재시 문이 무너져 내리고 그 열기에 의하여 바닥석이 튀 어 올랐기 때문이며, 2차 문지 축조시 1차 문지 바닥 상면에 다량의 석 재를 놓아 바닥을 높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바닥의 석재와 흙은 강하 게 불에 탄 흔적이 역력하다. 외벽에서 2m 지점에는 두께 12cm 정도 의 판문이 시설되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 부근에서는 판문에 사 용하였던 철제류가 다수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모두 목탄과 소토층 사이에서 출토되었는데, 문지 통로부를 가로지르며 폭 1m 내에 서 모두 출토되었다. 철제류이 대부분은 판문에 철판을 고정시키기 위 하여 사용되었던 못 종류이다. 모두 폭이 12cm로 일정하다. 그러나 판 문을 고정하였던 흔적, 즉 문확석이나 다른 고정시설은 찾을 수 없었 다. 바닥에서는 일부 기와 파편이 출토되었으나 극히 소량이고, 모두 소토층 상면에서 출토되었으며, 작은 파편이기 때문에 1차 문지에 시설 되었던 기와편으로 보기 어렵다. 따라서 문의 상부 구조나 성문의 정확 한 형태 및 고정 방법은 알 수 없다. 1차 문지는 여러 정황을 보아 화재에 의하여 소실된 것으로 생각된 다. 그런데 소토층이 문지 안쪽으로는 얇거나 없고, 성문이 있었던 곳 에서 문지 외부, 즉 외벽 방향으로는 두텁게 형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 아, 1차 문지의 판문은 밖으로 무너진 것이 아닌가 한다. 1차 문지 바 닥 하부에는 남측벽으로 치우쳐서 배수로(1차 배수로)가 있었으며 배 수로의 입구는 무너진 채 노출되었다. 입수구 주변에는 고운 모래가 퇴 적되어 있었으나 집수시설의 흔적은 없었다. 현재 배수로 안쪽에는 고 운 모래가 가득차 있다. 이 배수로는 2차문지 조성시 폐쇄되어 사용되 지 않았다. 2차 문지는 1차 문지 보다 약 90cm 높아지고, 폭도 약 2m 정도 축소 되었다. 먼저 1차문지의 남측벽을 약 1m 정도 내어 쌓아 문지 폭을 줄 이고 1차 문지 바닥 위, 1차 문지의 남측벽 전면에 붙여서 2차 배수로 를 축조하였다. 또한 배수로와 북측벽 사이에는 약 90cm 정도 할석과 토사를 충진시켜 폐쇄하고 그 위에 바닥을 축조하였다. 바닥에는 네 모 서리에 초석을 놓았는데 초석 아래 적심은 1차 문지 바닥부터 할석과 점토로 원형을 그리며 다져 올려 다른 부분의 폐쇄 상태와는 차이를 보 이고 있다. 바닥 부분에는 일부 바닥석으로 사용되었던 석재로 추정되 는 것이 남아 있어서 바닥석을 깔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대부 분 탈락되어 원 위치를 잃었고 남아 있는 것이 많지 않아서 할석 다짐 위에 점토를 다져서 바닥으로 이용하였을 가능성도 부인하기 어렵다. 2 차 문지 바닥층에도 소토층이 두껍게 형성되어 있었고 이 소토층은 남 동 10°방향으로 문지 안쪽 옹성 근처까지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2 차 문지도 화재에 의하여 소실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문지 안쪽 에는 2차문지에 상부에 사용되었던 기와가 화재로 문이 붕괴되면서 떨 어진 내린 형태로 와적되어 있었다. 2차 문지 초석은 전열이 외벽에서 통로 안으로 약 2m 정도 들어왔고 후열은 내벽선에 맞추어져 있었다. 이 같은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외벽 에서 2m 후방에서 내벽선에 이르는 곳에 樓門이 시설되었던 것으로 추 정된다. 초석간의 거리는 3.5m 문지의 평면형태는 정사각형을 이루고 있다. 누문의 상부는 기와를 올렸던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에 사용되었 던 기와와 목재가 소토층과 혼합되어 내벽선에서 약 3.6m 지점까지 남 동 10°방향으로 무너져 있었다. 樓門의 지붕 형태는 평면형태가 정사각 형인 것으로 보아 우진각 지붕이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또한 전열 기 둥과 후열 기둥 사이에는 석재를 쌓아서 막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는 북쪽 초석열 사이에 남아 있는 심방석열로 추정할 수 있었다. 따라 서 2차 문지의 폭은 최종적으로 1차 문지에 비하여 2m 정도 줄어들어 약 3m 내외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측벽을 구성하였던 석재는 모두 붕괴되어 원형을 찾을 수 없었다. 2차 문지가 사용될 때 외부 등성시설은 변함없이 그대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내옹성은 1차 문지 때 보다 약간 매몰된 상태 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2차 문지 바닥은 1차 문지 보다 바닥이 약 90cm 정도 높아졌기 때문에 성벽 안쪽 문지 입구도 이에 비례하여 높 아졌다. 그런데 문지 입구는 1차 문지 때에도 통로부 바닥에서 점차 경 사를 이루며 성내부로 높아졌다. 때문에 1차 문지 때보다 시작 부분 하 단은 약 50∼90cm 정도 매몰되었지만 거의 매몰되지 않은 채, 재사용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2차문지와 관련된 배수로는 입수구와 출수구가 무너진 채로 노출되었 다. 입수구는 후열 남쪽 초석 하부에 위치하고 있고 출수구는 전열 남 쪽 초석 하부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간 부분은 양호한 상태로 노출되었다. 입수구 주변에서는 집수시설이 발견되지 않았고 1차 배수 로와 마찬가지로 고운 모래층이 형성되어 있었다. 3차 문지는 2차 문지 초석 상면까지 암갈색 점토+모래층에 석재를 섞 어 성토한 다음 축조되었다. 외벽 쪽에서 바닥석으로 보이는 석재가 일 부 노출되어 역시 바닥은 흑갈색모래+점토 위에 바닥석을 놓아서 축조 하였다. 측벽은 모두 붕괴되어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성벽 안쪽 문지 입구 부분에는 측벽 사이를 가로질러 2단의 석렬이 지나가고 있었다. 문지 쪽에 놓여진 석렬(전열)이 성내부 쪽 석렬(후열)보다 한 단 낮고 단의 폭이 20cm 내외이며 후열 뒤로는 후열 높이까지 흑갈색모래+점토 (3차 문지의 지표층)가 다져진 것으로 보아 이 석렬은 3차 문지 입구에 시설된 계단으로 추정된다. 또한 3차 문지가 사용될 때에는 문지 안쪽 도 거의 내옹성 높이까지 매몰되어 내옹성은 사용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외부 등성시설은 이 때도 여전히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3차 문지는 붕괴가 심하여 형태와 규모를 짐작하기 어렵다. 무 너진 형태로 보아 폭은 2차 문지와 거의 유사한 것으로 보이나, 길이는 2차 문지 보다 약 1∼2 m 정도 줄어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3 차 문지와 관련된 외벽이 문지 북쪽에서 노출되었는데 이 성벽은 원래 성벽의 중단, 즉 2차 문지 초석 하단부부터 안으로 들여쌓기를 하였기 때문이다. 이 성벽은 현재 상단은 거의 무너지고 기단부만 조금 남아 있고 무너진 부분은 약 45°정도 경사를 이루고 있다. 2. 성벽축조방식 이번 조사에서 발굴된 성벽은 크게 협축과 편축으로 나눌 수 있다. 협 축 부분은 문지를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성지보호 간판이 있는 봉우리 까지 남쪽으로는 남 측벽(1차 문지)에서 14m 지점까지이다. 서문지 주 변으로는 협축으로 축조하였고 나머지 부분은 편축으로 축조하였다. 체성의 축조방식은 지표조사보고서에서 상술하였기 때문에 여기에서 는 발굴조사 결과 드러난 기저부, 외벽기단부보강시설, 외벽기단보축 을 중심으로 서술하겠다. 내벽과 외벽의 기저부 암반층까지 제토한 결과, 먼저 급경사를 이루 는 암반층을 유단식으로 삭토하고 성벽을 축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성 벽에 대한 절개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기저부를 정확히 몇 단으로 삭토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3단∼4단 정도로 추정된다. 외벽의 경 우 지형에 따라서 외벽 기단석 전면에서 약 1m∼2m 정도까지 평탄하 게 삭토하였고 성벽 진행방향으로도 지저부의 고저에 따라 계단식으 로 삭토하였다. 비교적 단단한 풍화암반층 위에 기단석을 바로 올려놓 았는데 기단석이 밀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1∼2cm 깊이의 턱을 형 성한 곳도 있다. 대체로 기저부의 축조 방식은 설봉산성 1차 성벽(백제 성벽)과 유사하여 주목된다. 기단석부터 3단 정도까지는 할석을 가로 세로로 겹쳐 올려놓으며 기 단부를 보강하였다. 석재 사이에는 황갈색 점토+모래를 충진시켜 석재 를 고정하였다. 전면에도 황갈색점토+모래를 덮어 다져 놓았다. 폭은 약 1.5m∼2m 정도이다. 기단부 보강시설은 체성과 동시에 축조된 것으 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체성 기저부를 삭토할 때 이 보강시설이 놓일 부분까지 동시에 평탄하게 깍았으며 보강시설 상면에 1차성벽의 지표 층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보강시설은 협축성벽이나 편축 성벽에서 모두 보이고 있다. 그러나 외벽 기저부가 급경사를 이루는 곳 에서는 보강시설 대신에 보축성벽을 시설하였다. 보축성벽은 라-1트렌치에서 노출되었다. 현재 5단이 남았고, 높이는 70cm 이다. 추정 단수는 6∼7단이다. 보축 기단석은 체성 기단석에서 80cm 떨어져 있다. 암반층을 삭토하고 그위에 5cm 정도 황갈색 점토+ 굵은 석립을 깐 다음 그 위에 장방형의 기단석을 올려 놓았다. 보축성 벽을 절개하자 각각 단면이 삼각추 형태를 이루도록 가공한 면석을 차 례로 쌓아올려 보축의 단면 역시 삼각형을 이루도록 하였다. 때문에 전 면에서 볼 때, 마치 장방형 석재를 뒷심을 기울여 쌓은 것처럼 보인다. 기단석 뒤 뒷채움 석재 또한 삼각형이나 마름모형의 석재를 세로방향 으로 놓고 있다. 그 위로는 뒤채움재를 가로, 세로 교차하게 쌓고 있 다. 한편, 지표조사시 조사된 설성산성의 보축은 주로 성벽 기저부가 급 경사를 이루거나 성벽이 계곡를 통과하는 지점에 부분적으로 시설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번의 발굴조사 결과도 이와 일치한다. 즉 전체 60m 정도 외벽을 노출하였으나 보축은 가장 경사가 급한 라-1트렌치 부근에서만 노출되었고 나머지 구간은 모두 기단부보강시설이 설치되 어 있었다. 따라서 기단보축은 제한적으로 시설되었으며 급경사구간 에 국한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문제는 기단보축과 기단부보강시설 사이의 선후 관계이다. 양식적으 로 기단부 보강시설이 선행하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고 이 같은 시설 이 기단보축으로 발전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만 이번 조사에서 이를 확인하여 줄 수 있는 근거는 충분하지 않다. 이 문제는 좀더 시간 을 두고 검토할 필요가 있다. 3. 출토 유물 설성산성에서 출토되는 유물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은 백제토기라 고 할 수 있다. 이에 축조시기와 관련하여 주목된다. 하지만 등성시설 의 하부 판축층과 같은 안정된 층에서나 지표 또는 교란된 층에서 모 두 파편으로 수습되었기 때문에 분석이 어렵다. 따라서 설성산성과 백 제토기의 관계를 규명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백제토기는 거의 이천 전역에서 확인되고 있으며, 인근의 안성 지역에서도 백제 토기가 꾸준히 조사되고 있다. 이들은 출토 지역에 따라 다소 편년의 차이는 있으나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후반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 한 문헌기록을 볼 때도 백제가 늦어도 4세기경에는 이천 지역까지 영역 을 확장하고, 5세기까지 지배하에 두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특 히 설봉산성의 경우 4세기 후반 경에 백제가 축조했던 것으로 추정되 어, 이와 비슷한 시기나 보다 조금 늦은 시기에 설성산성이 백제에 의 하여 축조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설성산성에서 가장 많이 확인되는 유물은 신라시대 유물이므로, 이 시기에 가장 활발하게 이용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三國史記』 기록으로 보아 설성산성에 신라가 진출한 것은 550년 대로 볼 수 있다. 이는 문지조사를 통해 출토되는 유물에서도 확인된다. 신라토기는 출 토되는 유물의 양상과 양식상의 특징을 통해 크게 두 시기로 구분된 다. 6세기 후반에서 7세기로 편년되는 투창 뚫린 고배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9세기에서 10세기로 편년되는 기종이 많이 출토되고 있는데, 목 에 파상문이 있고 동체부에 돌대가 돌려진 대형호, 줄무늬토기, 덧띠무 늬토기, 4면 편병, 편구병 등이다. 기와류에 있어서도 선조문 평기와가 가확-1트렌치에서 와적층을 이루며 출토되었다. 이 와적층의 출토된 신라시대 기와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문양은 전체적으로 직선문과 사선문으로 이루어진 선문이 주종 을 이루고 있다. 둘째, 색조의 경우 환원염 소성으로 제작된 회백색, 회청생, 회갈색 이 많은 비율을 차지한다. 셋째, 경도의 경우 전체적으로 연질의 기와가 우세하나 암키와에서 는 경질과 연질의 비율이 비슷하게 나타난다. 또한 태토는 비교적 정선 된 점토를 사용하여 제작되었다. 넷째, 와도흔의 경우 모든 기와에서 분할 방향이 배면에서 등면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분할두께가 1/3, 1/4이 많은 편이다. 이상 문지 내부 와적층 출토 기와는 출토된 상황으로 보아, 문지에 시 설된 구조물에서 함께 사용되다가 화재에 의한 소실로 인하여 붕괴되 어 형성된 것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이 기와들은 동시대에 거 의 동일하거나 비슷한 시기에 제작·사용되었을 것으로 설봉산성이나 반월산성 출토기와와 비교하여 볼 때, 그 중심연대를 7세기로 볼 수 있 다. 고려시대의 유물은 기와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지표상에서 수습되 고 있다. 그리고 1점이기는 하지만 마-1트렌치에서 청자완편이 출토되 었다. 한편, 소수에 불과하나 조선시대 백자편도 수습되고 있다. 이번 조사에서 출토된 유물은 지표조사에서 밝혀진 것처럼 백제토기 부터 조선시대 백자편에 이르기까지 전시대를 망라하고 있다. 그러므 로 이 산성은 삼국시대에 축조되어 고려시대까지 지속적으로 사용되었 던 것으로 판단되며, 일부 조선시대 유물은 산성의 활용보다는 성내부 에 있었던 절터와 관련된 것이다. 4. 초축국 문제 1차 발굴조사에서 역점을 두었던 것이 성벽 및 문지의 초축시기를 규 명하는 것이었다. 1999년 지표조사시부터 성내부에서는 다량의 백제토 기가 수습되었고, 이 때문에 설성산성을 백제가 축조했을 가능성도 조 심스럽게 제기되었다. 하지만 이와 관련된 유구가 없어서 백제 초축 문제는 발굴조사 이후로 유보되었다. 이번 조사에서 출토된 유물은 크게 백제, 신라, 고려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백제 유물로 명확한 것은 토기류이다. 백제 토기가 층위를 가지 고 출토되는 곳은 등성시설 점토다짐층, 나지구 육각건물지 주변 등이 고 나머지는 교란층이나 지표에서 수습된 것들이다. 따라서 유구와 관 련성을 논할 수 있는 곳은 등성시설과 나지구 건물지 밖에 없다. 이 중 등성시설은 1차 문지나 초축 성벽과 동시에 축조된 것이 분명하 기 때문에 초축국을 규명할 수 있는 단서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와 관 련된 1차 문지, 1차 배수로, 성벽 기저부 등에서 백제토기가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초축 성벽이 백제에 의하여 축조되었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부족하다. 하지만 성벽축조방식이 설봉산성 백 제 성벽과 유사하고 성내부에서 전체에서 백제토기가 출토되고 있다 는 것은 백제가 어떠한 형태로던지 설성산성을 이용하였다는 반증이 다. 앞으로 발굴이 연차적으로 진행되는 만큼 이 문제는 해결될 수 있 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신라 유물은 가장 많은 빈도수를 보이며 출토되고 있는데 그 중 에서도 9세기 경의 유물이 상대적으로 풍부하다. 또한 6세기 후반에서 7세기대에 해당되는 유물도 빈도수가 높다. 반면에 8세기대에 해당되 는 유물은 찾기 어렵다. 지표조사와 1차 발굴조사 결과만을 놓고 볼 때, 7세기와 9세기에는 설성산성이 활발히 활용되었으나 8세기에는 상 대적으로 활용도가 약하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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