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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중암리 고려백자요지 발굴조사 현장설명회 자료

2001-10-18 17: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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驪州 中岩里 高麗白磁窯址 現場說明會 資料 Ⅰ. 調査槪要 1. 조 사 명 : 여주 중암리 고려백자요지 발굴조사 2. 조사지역 :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중암리 산 142-1·답 529-4·답 533-1번지 일대 3. 조사면적 : 남북 60m × 동서 40m (800여평) 4. 조사기간 : 2001년 7월 3일∼ 2001년 10월 현재 5. 조사기관 : 경기도박물관 6. 조사의뢰기관 : 여주군 7. 조사목적 여주 중암리 유적은 고려백자를 생산한 요지로 고려초기 백자의 발 생 및 발달과정과 관련하여 우리나라 도자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 를 가지고 있는 유적이다. 이번 발굴조사는 아래와 같은 목적에 주안점 을 두고 실시되었다. 첫째, 유적에 대한 정밀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전체 가마의 규모와 구 조를 파악하고 출토유물의 층위별 분석을 시도하여 가마와 퇴적구의 상관관계 및 그 운영시기를 규명한다. 둘째, 가마구조와 출토유물의 분석을 통하여 그동안 미진하였던 초기 고려백자에 대한 학술적 자료를 제공하며 이를 토대로 현재까지 우리 나라의 도자기의 발생과 변천과정에 대한 제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단 서를 제공한다. 셋째, 유적 주변에 대한 지표조사를 실시하여 도자기의 고장인 여주 지역의 요지 분포 및 범위에 대한 기초학술자료를 확보한다. 넷째, 나아가 고려시대에 조성된 한강 유역에 위치하고 있는 문화유 적과의 상호관련 및 비교검토를 통하여 이 시기 우리나라 중서부 내륙 지방의 지역적 특색과 역사적 성격을 밝히고자 한다. 다섯째, 지금까지 알려진 예가 드믄 고려초기 백자요지인 만큼 이번 발굴조사를 통하여 유적의 범위을 확인하고 이에 따른 유적의 훼손을 방지하기 위한 효과적인 보존대책을 수립한다. Ⅱ. 遺蹟의 位置 및 周邊環境 1. 遺蹟의 位置와 自然地理的 環境 본 遺蹟은 행정구역상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중암리 산 142-1번지, 답 529-4, 답 533-1 일대에 위치한다. 지리적 좌표는 경도상으로 동경 37。19′30"∼ 20′42"이며, 위도상으로는 북위 127。 41′24"∼ 42′00 "의 범위에 해당된다. 유적에 이르는 行路는 여주군 여주읍에서 원주방면으로 향하는 42번 국도를 따라 동쪽으로 진행하여 남한강변에 있는 신륵사 관광지와 소 지개 고개를 넘으면 42번 국도와 331번 지방도와 만나는 천송 삼거리 가 나온다. 여기서 북내면 방향으로 향하는 331번 지방도를 따라 2.8km 가면 북내면 소재지인 당우리에 이르게 되는데 이곳에서 중암 리 방향으로 나있는 9번 군도로 3.4km 진행하여 중암1리 마을회관을 지나면서 다시 약 500m 가면 도로 우측으로 낮은 구릉경사면이 나오 게 된다. 이곳이 중암리 고려백자요지 유적으로 자기편들과 갑발·소토 등이 유적내 다수 산포하고 있다. 유적이 위치한 여주군 북내면은 1914년 北面과 강원도 원주군 池內面 을 병합하고 강천면 가정리를 편입하여 북내면으로 개칭한 곳으로, 동 쪽은 강천면과 양평군 양동면, 남쪽은 강천면과 여주읍, 서쪽은 대신 면, 북쪽은 양평군 지제면과 접하고 있다. 地形을 살펴보면 玉女峯 (419m)·寶金山(367m)·蘇達山(358m)·우두산·고래산 등의 해발 200∼ 400m의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으며 金塘川과 그 지류인 完 長川·曲水川·五今川등의 하천이 흐르고 있어 수원이 풍부하며 그 주변 으로 곡저평야를 형성하여 중앙부에 띠모양의 평야와 서남단에 평야 가 발달되어 있다. 金塘川은 총 연장이 13.5km이며 양평군 지제면 무왕 리에서 발원하여 북내면 중앙부를 지나 당우리에서 유적 앞으로 흐르 고 있는 완장천과 합수하여 북내면 천송리 신륵사 하구에서 南漢江으 로 유입되고 있다. 이 지역은 45% 이상이 경사 5°이상의 구릉지이며 그 중 산지가 60%를 넘는다. 현암리에 고령토광산이 있으며 중암리 주 변에도 백자를 생산하기 위한 질좋은 물토(백토)원산지 등 자기 원료 생산지가 분포하고 있어 도자기·공예품 등의 요업공업이 발달하였다. 중암리 고려백자요지는 서쪽에 소달산을 중심으로 한 해발 200∼ 300m의 봉우리가, 동쪽에 보금산을 중심으로 한 해발 300∼400m의 봉 우리가 남북방향으로 길게 이어지고 있어 좌우로 산세가 형성되어 있 는 협곡부의 중단부에 해당한다. 유적 바로 앞으로 협곡을 따라 완장천이 흘러 남한강으로 유입되며 이를 중심으로 하천로가 형 성되어 교통이 발달하였다. 즉 유적의 입지는 주변에 가마의 화력을 공 급할 수 있는 땔감과 작업에 필요한 수원이 풍부하며, 자기의 원료생산 지가 인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협곡과 하천을 이용한 교통로 가 발달하여 자기의 재료 및 완성된 자기의 이동과 공급이 용이하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자연지리적인 조건으로 인하여 예로부터 이곳을 중심으로 하여 도요지가 발달하였다고 할 수 있다. 2. 歷史的 環境 驪州는 본래 高句麗의 骨乃斤縣인데, 신라 景德王이 黃驍로 고쳐서 沂川郡의 屬縣으로 삼았다. 고려 현종 9년(1018)에 原州의 任內에 속하 였으며 監務를 두었는데, 黃利라고 하였다. 충렬왕 31년(1305)에 驪興 郡으로 승격하였으며 조선 태종 원년(1401)에 중전 閔氏(훗날의 元敬 王后)의 고향이라 하여 府로 승격하였고 동왕 13년(1413)에 충청도의 관할에서 벗어나 京畿左道로 移屬되었다. 예종 원년(1468)에 세종대왕 의 능인 英陵을 여흥으로 천장하면서 명칭을 여흥에서 驪州로 고쳐 부 르게 되었다. 군의 중앙으로 한강이 가로지르고 있어 수로를 이용한 교 통 수단이 발달하였다. 중요 나루터로는 州內津, 楊花津, 龜尾浦津, 丹 岩津, 仰岩津, 梨浦津이 있었으며 驛院으로는 新津과 安平이 있었으며 산업시설로는 중품 陶器所 하나가 북쪽 串山에 있었다. 고고학적 환경은 한강 및 그지류의 하천로를 이용한 교통로와 함께 비옥한 평야가 발달하여 예로부터 사람들의 터전으로 이용되어 군내에 는 수많은 유적들이 자리하고 있다. 먼저 선사시대 유적으로 구석기시대 유적은 여주읍 멱곡리, 점동면 단현리, 능서면 내양리·백석리 등이 있으며 신석기시대 유적은 점동면 흔암리, 여주읍 연양리·상리 등이 있다. 청동기시대 유적으로는 흔암리· 철울말·멱곡리·연양리유적 등과 북내면 석우리, 점동면 처리에 선돌 유 적이, 북내면 신접리, 강천면 도전리, 흥천면 외사리에 고인돌이 분포 한다. 역사시대 유적은 관방유적으로 북성산성, 술천성, 파사성(사적 251 호)이 있으며 고분유적으로 하거리 방기미골 고분군과 상리·매룡리 고 분군을 들 수 있다. 불교유적으로는 상교리에 고려시대 3대선원의 하나 였던 고달사지(사적 제382호)와 천송리에 신륵사가 위치한다. 또 남한 강과 지류하천로를 따라 점동면에 원향사지가 있으며 원주 부론면에 거돈사지와 법천사지 등 대형 사찰터들이 남아있다. 이들은 고려시대 에 크게 번성한 불교유적으로 중암리 고려백자요지와의 수급관계를 상 정해 볼 수 있다. 도요지에 대해서는 1999년 국립중앙박물관에 의해 지표조사가 이루 어져 수기의 가마터가 존재하고 있음이 알려진 바 있다. 그러나 아직까 지 이 지역에는 정밀조사가 실시된 적이 없고 기초자료의 소개 외에는 학술조사보고가 이루어지지 않아 정확한 도요지의 분포나 성격은 밝혀 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번 조사기간내 실시된 주변유적에 대한 지표조사에서 31개소에 이르는 가마터가 여주군내 분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추후 정밀조사가 실시되면 더 많은 유적이 찾아질 것으 로 기대된다. 확인된 도요지는 중암리 7개소, 운촌리 7개소, 상교리 8개 소 등 북내면에 24개소가 강천면에 5개소, 능서면 1개소, 산북면에 1개 소 등이 있다. 이 중 고려시대에 조성된 요지는 2개소이며 나머지는 분 청사기·조선백자가마터이다. Ⅲ. 調査方法 및 經過 1. 調査前 狀況 중암리 고려백자요지는 북서쪽에 솟아있는 소달산(해발 358m)의 정 상부에서 동남쪽으로 흐르고 있는 지맥의 종단부로 해발 100m 내외의 낮은 구릉지대에 해당한다. 유적 앞으로는 금당천의 지류인 완장천이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흐르고 있다. 조사전 상황은 도로(군도 9호) 동 쪽에 접하여 동고서저 방향으로 형성된 경사면에 가마 제작시 폐기된 퇴적층이 지표면에 노출되어 있었다. 지표상의 유물들은 주로 갑발과 해무리굽완편·잔탁편·접시편 등이다. 퇴적구는 자연경사면을 이용하였 으며, 형태는 중앙부가 움푹 들어가고 남북 양 옆이 약간 올라가 있는 단면 형태를 보여주고 있어 중앙의 가마를 두고 좌우 남북쪽으로 퇴적 구가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퇴적구 서쪽으로는 도로와 논경작지 가 형성되면서 이로 인하여 퇴적구의 西端面이 삭토되었으며 현재 논 과 접하여 높이 약 2∼3m에 이르는 절단면이 노출되어 있었다. 퇴적구 남쪽으로는 유적 뒤편에 조성된 경작지와 민묘로 오르기 위한 小路를 형성하면서 퇴적구 위로 토사를 쌓아놓았으며 북쪽 퇴적구에는 봉분 의 형태만 남아있는 민묘 1기가 있어 퇴적구 남쪽의 일부가 훼손되었 다. 또한 퇴적구 중앙부에 둘레가 220cm에 이르는 밤나무가 심어져 있 어 조사의 어려움이 예상되었다. 그러나 유적의 전체적인 잔존상태는 심한 교란이나 훼손은 없었던 것으로 판단되었다. 2. 調査方法 및 經過 조사는 먼저 유적이 위치한 전체 지역에 대한 정리작업부터 실시하였 다. 조사전 유적이 있는 구릉지 경사면의 대부분이 가시덤불 및 잡목으 로 덮여 있었으며 각종 쓰레기와 군시설물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또한 가시덤불사이로 벌집이 산재하고 있어 조사초반에 이를 제거하는데 매 우 어려운 상황이 전개되었다. 우선 유적을 덮고 있는 잡초 및 덤불 제 거 작업을 실시하였으며 이후 중앙에 있는 밤나무의 벌목을 위해 기계 톱을 이용하여 가지와 몸체를 차례로 제거한 다음 인력을 이용하여 뿌 리를 제거하였다. 현장에 대한 정리작업이 완료된 후 유적에 대한 평판측량작업을 실시 하여 1/5000 지형도에 유적이 위치한 지점을 표시한 후 유적내에 남북 방향을 중심축으로 Grid를 설치하였다. 이것은 이후 유구에 대한 도면 작업과 유물이 수습되는 지점의 정확한 위치를 표시하기 위한 것으로 그리드의 규모는 유적의 성격이 가마터임을 감안하여 5×5m(가로×세 로)크기로 설정하였다. 유적의 기준점에 대한 해발고도값은 80.5m이 다. 그리드 번호는 기준점에서 방위에 따라 명명하였는데 기준점을 중 심으로 남북은 N 1∼5, S 1∼5이며 동서는 E 1∼3, W 1∼5이다. 그리드 가 설치된 범위는 동서 40m, 남북 50m이다. 트렌치 조사는 가마벽체 확인을 위한 제토작업을 실시하였는데 중앙 부에 가마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그리드에 대해 탐색구를 설정하여 지표면을 제거해 나갔다. 중앙 상단부의 경사면 조사에서는 지표하 10cm 아래에 너비 1.5∼2m 정도의 석렬과 그 내부에서 흑갈색·적갈색 소토층이 노출되었다. 이 유구는 내부에 점질성이 없는 소토화된 모래 층이 감입되어 있으며 외곽으로는 인위적으로 다진 흔적이 있는 점토 층으로 이루어져 있어 가마 벽체임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최상단면에서 는 굴뚝부로 여겨지는 시설물이 확인되었다. 중앙부 및 하단부에 대 한 조사는 이전에 밤나무 식재 및 전신주 건립에 의해 유적의 일부가 훼손된 점과 퇴적층의 두께가 1m 이상되어 조사를 진행하는데 어려움 이 예상되었다. 따라서 각 그리드 및 토층둑에 대한 실측작업과 사진촬 영을 완료한 후 노출된 가마의 상면 외곽선을 중심으로 트렌치에 대한 확장조사를 실시하였다. 확장된 트렌치의 규모는 남북 10m(너비), 동 서 30m(길이)이다. 조사결과 전체 번조실이 노출되어 가마의 규모가 파악되었으며 하단면에서 아궁이 시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후 가마에 대한 조사는 벽체구조 및 각 시설물에 대한 정밀조사를 실시하였는데 소성실 내부에 대해서는 경사도에 따라 상중하로 나누 어 3개의 지점에 탐색피트를 설정하여 최초가마바닥까지 퇴적된 모래 층을 제거하고 측면의 가마 벽체를 노출하였다. 또한 중앙에 설정한 탐 색피트에 대해서는 가마의 주방향과 직교하는 탐색피트를 설치하여 가 마 외벽에 대한 보강시설의 확인과 층위에 따른 토층조사를 실시하였 다. 조사결과 번조실의 최초 바닥층인 황갈색 점토다짐층까지의 깊이 는 110∼170cm이며 내부에는 소토화된 적갈색·회갈색·흑갈색 모래층 이 40∼50여차례 반복되어 퇴적되었다. 벽체구조에 대해서는 굴뚝부 와 아궁이 시설부에서는 할석재를 다듬어 사용한 석렬로 이루어져 있 으나 나머지 소성실 전체 벽체에서는 점토를 이용한 진흙가마임이 확 인되었다. 조사초기 지표면 및 트렌치 조사에서 벽돌이 다량으로 수습 되어 벽돌가마였을 가능성이 높게 제시되었으나 현재 노출된 가마의 벽체에서는 일부에 재사용한 흔적만이 나타나고 있어 초기에 벽돌가마 에서 이후 진흙가마(진흙+석재+벽돌+갑발)로 변화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굴뚝부에 대한 하부조사에서도 확인되었다. 굴뚝부 중앙 부에 너비 70cm의 탐색피트를 설정하여 바닥면까지 조사한 결과 5차례 에 걸쳐 규모가 축소 또는 확대되는 과정이 이루어 졌으며 이에 따라 굴뚝부의 벽체도 초기에는 벽돌에서 이후 석재+진흙을 이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퇴적구 조사는 경사면과 동일한 동서방향으로 조성된 가마를 중앙으 로 하여 남쪽과 북쪽에 형성된 퇴적구에 대한 트렌치를 설정하였다. 트 렌치는 남쪽에 1개(가), 북쪽에 3개(나∼라)를 설치하였는데 트렌치의 크기는 너비 1m이며 길이는 4.5∼5.5m로 경사면에 따라 다르게 하였 다. 북쪽 퇴적구는 가마의 바닥층인 황갈색과 적갈색 점토다짐층까지 깊이 1.8∼2.3m까지 제토하였으며 남쪽 퇴적구는 점토다짐층 아래 생 토층까지 깊이 2.4m까지 제토하여 전체 폐기물이 퇴적된 층위에 대하 여 판단할 수 있도록 하였다. 유물은 퇴적구 조사를 통해 집중적으로 출토되었는데 완, 발류와 갑 발류가 대다수를 차지한다. 수습된 유물에 대해서는 세척작업을 완료 한 후 층위와 지점에 따라 마킹작업을 실시하였으며, 이후 층위에 따 라 유형과 기종별로 분류작업과 계량화작업을 통한 통계학적인 방법 을 시도하였다. 조사결과 전체 퇴적구에 대한 토층상태는 모두 5개의 층위로 나누어지며 수습된 유물은 층위에 의하여 유형과 기종별로 속 성 및 제작방법의 변화과정의 차이점을 파악할 수 있었다. Ⅳ. 調査內容 1. 유구 1) 가마 조사결과 확인된 가마는 낮은 구릉의 경사면에 굴모양으로 길게 만들 어진 登窯이다. 가마의 주향은 동서방향을 중심으로 하여 남쪽으로 23。 기울어져 있다(W23。S). 아궁이-번조실-굴뚝부로 이어지는 가마 의 경사도는 11∼13。이다. 전체 노출된 가마의 규모는 길이는 20.4m 이며 너비는 번조실 내부공간은 100∼170cm이다. 시설물은 상단과 하 단부에 굴뚝부와 아궁이 시설이 확인되었으며 측면에 출입구가 3곳이 있다. 벽체는 점토를 다져 조성한 진흙가마의 형태이다. 굴뚝부와 아궁 이 시설부는 할석재의 내면을 다듬어 석렬을 이루고 점토를 이용하여 단을 조성한 석축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어 이곳에는 벽체보강을 위해 하부구조는 석축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벽체에 장방형의 벽 돌을 사용한 흔적이 여러곳에서 확인되고 있다. 이점은 굴뚝부 하부조 사에서 초기에 조성된 벽체가 벽돌로 조성되었고 트렌치 조사에서 다 량의 벽돌이 수습되는 점으로 보아 가마 초기에 벽돌가마에서 진흙가 마의 형태로 벽체구조가 변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천정부는 남아있지 않으나 잔존 측면부 형태가 위로 올라가면서 좁아지는 것으로 보아 궁 륭식 천장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번조실 내부는 소토화된 모래층이 색조를 달리하여 50여 차례 반복 퇴적되었다. 전체 퇴적된 깊이는 110 ∼170cm에 이르고 있다. 가마의 수·개축의 흔적은 각 시설물별로 하부에 탐색피트를 설정하 여 조사한 결과 5차례 이상 이루어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가마의 구조에 따른 규모와 현상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 아궁이 아궁이는 가마에서 불을 땔때 이곳의 더운 공기가 불턱을 지나 번조 실로 이어지게 하는 소성실에 해당하는 공간으로 경사면의 西端部인 경작지와 접하여 확인된다. 평면형태는 장타원형으로 잔존규모는 길 이 150∼210cm, 너비 118∼155cm이다. 측면벽과 불턱이 잘 남아있으 며 내부에는 적갈색소토층이 확인된다. 측면벽은 내면을 다듬은 할석 재를 이용하여 석축을 조성하여 벽체를 구성하였다. 벽체의 두께는 50 ∼60cm로 1열 또는 2열의 석재를 반복하여 맞물리게 놓아 단을 형성하 였다. 잔존 석축의 크기는 높이 2∼3단, 40∼50cm이며 석재의 크기는 45×24×14cm, 37×16×15cm, 25×15×10cm이다. 북측벽 내부로 3∼4 단의 석축이 그대로 붕괴된채 노출되어 원래 1m이상 높이만큼 석축이 있었다고 추정된다. 불턱은 아궁이와 번조실 사이에 턱을 두어 직접적 으로 불길을 막은 공간으로 진흙을 이용하여 수직의 벽체를 이룬채로 확인되었다. 잔존하는 불턱의 규모는 너비 90cm, 두께 25cm, 높이 30 ∼40cm이다. 아궁이 입구에서 불턱이 시작되는 경사면의 하단부까지 의 길이는 150∼210cm이다. 불턱 아래 아궁이 내부에는 적갈색사질점 토층으로 이루어졌는데 붕괴된 벽체와 갑발편이 수습된다. 특히 갑발 은 불턱과 아궁이의 측면벽에 일정하게 포갠채로 쌓여져 있어 수·개축 시 아궁이의 공간을 좁히기 위해 측면벽체 또는 바닥의 높이를 올리기 위한 시설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2) 번조실 번조실은 아궁이와 굴뚝부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으로 1차 공정을 마 친 자기들을 구어내는 제작공간이다. 가마 내부시설의 대부분을 차지 하며 전체 길이는 16.5m이며 너비는 번조실 내부공간은 110∼170cm이 며 점토를 이용하여 벽체를 보강한 다짐층까지 포함한 외벽은 570cm이 다. 조사과정에서 가마의 상면에 해당하는 곳에서는 표토층 10cm 아래에 서 벽체 및 내부 에 모래퇴적층이 확인되었으며 아래 경사면쪽으로 내 려가면서 벽체가 1m이상 갑발 및 소토로 이루어진 퇴적구에 매몰되어 있어 트렌치 전체를 확장하여 번조실의 측면벽을 최후 가마의 지표면 에서 30∼50cm 노출하였다. 하부로 갈수록 잔존상태가 양호하여 천정 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원형의 모습으로 확인되었다. 벽체의 구성은 주 로 점토를 이용한 진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일부 벽돌을 사용한 흔적 이 보인다. 조사는 번조실 내부공간과 외벽에 대해 탐색피트를 설정하여 실시하 였다. 번조실 내에는 경사 위치에 따라 3개의 피트를 설정하여 내부에 퇴적된 모래층을 바닥면까지 제토하였으며 측면벽을 노출하였다. 조사 결과 번조실 내부에는 적갈색·흑갈색·회갈색·황갈색 모래층이 반복하 여 50여회 이상 나타나고 있으며 최후에 조성된 마지막 가마의 바닥층 부터 초기 가마의 바닥층인 황갈색 점토다짐층까지의 깊이는 110∼ 170cm에 이르고 있다. 내부 퇴적층에서 수습되는 유물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퇴적층은 가마의 사용기간 동안 번조실 내부를 정비하 면서 형성된 것으로 가마의 수·개축시 벽체를 그대로 이용하면서 시기 에 따라 천정부를 계속하여 높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가장 아래 쪽에 설치한 피트의 남쪽 측면벽에서도 확인되는데 노출된 벽체는 높 이 160cm로 단면과 토층에 따라 4회의 개축흔적이 보이고 있으며 바닥 층의 높이는 1회마다 30cm 내외로 높아지고 있다. 또한 평면상에서도 벽체의 수·개축 사실이 보이는데 중앙부의 북쪽 측벽을 보면 초기벽체에서 갑발과 벽돌을 재사용하여 너비를 좁힌 흔 적이 3회 관찰된다. 이것은 측벽의 단면에 대한 실측조사에서도 확인된 다. 즉 하층에서 상층으로 갈수록 번조실 바닥층의 너비가 170-140- 120cm로 좁아지고 있다. 이것은 가마의 수·개축시 번조실의 내부공간 이 점차 좁아지고 있는 것으로, 번조실이 제작공간이라는 점을 감안하 면 시간이 지나면서 초기에 비해 가마의 규모가 점차 축소됨을 알 수 있다. 벽체를 구성하는 진흙의 표면은 화기로 인해 유리질화되어 있으며 단 면형태는 천정부가 유실되었지만 잔존상태로 보아 궁륭식을 이루는 것 으로 파악된다. 진흙으로 이루어진 벽체의 두께는 50cm 내외이다. 벽 체 외곽부에 대해서는 중앙부에 가마에 직교하는 피트를 설정하여 조 사하였는데 벽체 외곽에는 적갈색 점토와 황갈색 점토층을 반복하여 다져 벽체 하부를 보강하였다. 다짐층은 높이 30∼60cm이며 길이는 150cm이다. 단면은 벽체쪽로 가면서 두께가 높아지는 삼각형 형태를 보이고 있다. 이 다짐층은 가마 주변에서 전체적으로 확인되는 층으로 가마의 외곽선이며 가마운영시 바닥층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가마의 수·개축시과 벽체와 함께 동일하게 높아져 가고 있다. 측면 출입구는 남쪽에 1개소, 북쪽에 2개소 등 3곳에서 확인되었다. 출입구의 너비는 50∼70cm이다. (3) 굴뚝부 굴뚝부는 가마의 최상면에 위치한 곳으로 벽돌과 석재를 이용하여 축 조하였다. 하부에 대한 조사결과 5회에 걸쳐 개축한 흔적이 나타나고 있으며 시기에 따라 규모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굴뚝부의 길이 230cm (1∼5차), 너비 140∼220cm 정도이다. 평면은 " "형이고 벽체는 시기 에 따라 벽돌에서 석재와 진흙으로 변화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초 기 굴뚝부는 최하층에서 확인되고 있는데 기반암층인 화강암반층을 사 선으로 삭토한 후 벽돌을 이용하여 벽체를 조성하였으며, 2차 굴뚝부 는 1차 굴뚝의 동쪽 끝에서 아궁이쪽으로 110cm를 축소하였으나 벽체 구성은 동일한 방법을 사용하였다. 이후 3∼5차(최후 가마의 굴뚝부) 에 걸친 개축에서는 할석재의 내면을 다듬어 석축을 조성하거나 할석 재+재사용된 벽돌을 이용하여 벽체를 구성하였으며 규모면에서도 3차 는 다시 동쪽으로 105cm 확대되고 4차는 서쪽으로 10cm 축소되며 5차 에서는 다시 서쪽으로 80cm 축소하였다. 굴뚝부의 너비는 개축에 따라 서 점차 축소되고 있다. 벽체의 두께는 65cm 내외이다. 사용된 벽돌의 크기는 26×16×6cm, 24×16×6cm이며, 석재의 크기는 58×18×17cm, 30×22×10cm, 20×16×6cm이다. 2. 퇴적구 퇴적구는 가마를 운영하면서 배출되는 폐기물이 쌓여져 하나의 큰 둔 덕을 이룬 것이다. 퇴적구 안에는 생산품인 자기 파편보다는 자기를 굽 기 위해 보조적으로 쓰인 갑발파편이나 가마를 수·개축 하면서 폐기된 진흙덩어리와 벽돌 등이 상대적으로 더 많이 쌓여져 있는 점은 이 시 기 가마의 일반적인 현상이다. 퇴적구는 가마의 좌우(남북쪽)의 경사면 에 형성되어 있다. 규모는 높이 약 2.5m, 길이 20m이다. 너비는 북쪽 퇴 적구가 상단 6.2m, 중단 8.0m, 하단 8.7m이며 남쪽 퇴적구는 상단 3.8m, 중단 8.0m, 하단 8.8m이다. 전체적으로 크기는 남북 16m×동서 20m이며 높이 2.5m에 해당되어 면적은 320㎡이며 퇴적량은 800㎥에 이 른다. 이것은 서쪽과 북쪽에 경작지 및 농로로 인해 퇴적구가 유실된 것을 제외하더라도 상당히 많은 양의 폐기물을 포함한 퇴적구가 형성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출토된 유물은 각각 수습된 지점 및 층위에 따라 구분하는 것을 원칙 으로 하였으며, 나머지 층위를 구분할 수 없는 유물은 지표수습 유물 로 분류하였다. 특히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층위에 따른 출토유물 의 분포와 변화양상을 관찰하기 위하여 모두 4개의 표준퇴적 구간을 선 정하여 층위조사를 실시하였다. 표준퇴적구간으로 설정한 구역은 S3W2·S3W3 동서탐색 Tr., N1W2 남북탐색 Tr., N2W2 남북탐색 Tr., N2W1 남북탐색 Tr. 등 4개 지점이다. 조사의 편의상 각 구역을 위의 순 서대로 남쪽에서부터 가∼라 트렌치로 명명하였다. 조사 결과 각 트렌치별로 3∼4개의 퇴적 층위가 노출되었다. 우선 가 Tr.는 모두 3개 층위로 나뉘어 진다. 가1층은 황갈색모래층으로 가마 퇴적구 오른쪽으로 형성되어 있는 小路와 맞닿은 부분으로 단단하게 다져져 있는 층으로 최근에 소로를 개설하면서 형성된 층이다. 그 아 래 암갈색사질토층이 가2층을 이루고 있는데 여기서는 소량의 자기편 이 수집되었다. 이어서 황갈색점질토층이 가3층을 이루고 있다. 이곳에 서 출토되는 유물은 태토의 치밀성·유약의 광택성·굽깍음의 예리함 등 이 다른 표준 퇴적 구간에서 출토되는 유물과 비교하여 매우 우수한 초 기적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나 Tr. 역시 3개의 층위를 이루고 있다. 나1층은 암갈색사질토층, 나2 층은 적갈색사질토+소토층, 나3층은 황갈색점질토층으로 형성되었다. 특히 나2층의 적갈색사질토+소토층은 가마의 좌우 벽체에 접해서 암갈 색사질토층 아래에 위치하는 층이다. 나3층의 황갈색점질토층은 토양 및 색조에서 같은 층위를 보이고 있더라도 수습되는 유물의 깊이에 따 라 상층과 하층의 유물의 양상이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가3층 에서 보이던 유물의 속성과 동일한 종류가 나3층의 최하 바닥층에서 출 토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초기 가3층에 퇴적되던 자기의 제 작기법 양식이 이후 가마의 출입구를 북쪽으로 바꾸어 사용하던 시기 에도 초기에는 일부 전시기의 유행이 남아 있었던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북쪽 퇴적구 경사면의 아래쪽을 조사한 다 Tr. 역시 총 3개 층위로 이 루어져 있다. 다1층은 암갈색사질토층, 다2층은 황갈색사질토층, 다3층 은 황갈색점질토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3층에서 출토되는 백자의 질 은 나3층의 바닥면에서 출토되는 백자의 질보다는 못하지만 비교적 양 호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북쪽 퇴적구 경사면의 위쪽을 조사한 라 Tr.도 3개의 층위 를 형성한다. 라1층은 암갈색사질토층, 라2층은 황갈색사질토층, 라3층 은 황갈색점질토층으로 바로 아래에서 같은 동서방향의 축선에서 조사 를 실시한 다 Tr.와 동일한 양상을 나타낸다. 분석결과 퇴적구의 층위구별을 위해 설정된 Tr.에서 현상별로 확인되 는 층위에 대해서 살펴보면 확연하게 구분되는 것과 출토유물의 양상 이 유사한 형태를 보이는 층으로 나눌 수 있다. 따라서 위의 각 Tr.별 로 세분한 층위는 출토유물의 양상에 따라 같은 시기에 퇴적된 층으로 판단할 수 있으며 이를 종합하여 전체 퇴적구의 층위를 분류하였다. 즉 각 Tr.의 암갈색사질토층인 가1층·나1층·다1층·라1층을 Ⅰ층으로, 이 어서 황갈색사질토층인 다2층·라2층을 Ⅱ층으로, 다음 적갈색사질토+ 소토층인 나2층을 Ⅲ층으로, 황갈색점질토층인 나3층·다3층·라3층을 Ⅳ 층으로, 마지막으로 가3층을 Ⅴ층으로 구분하고자 한다. 따라서 중암리 유적 전체 층위는 5개층이 되며 퇴적의 순서는 Ⅴ층이 先이 되는 것이 고 Ⅰ층이 後가 된다. 위에서 정리한 것과 같이 4개의 Tr.로 나누어 조사된 표준퇴적구간에 서는 가마의 외벽으로부터 이어지는 여러층의 구지표면과 소토 폐기 층, 그리고 각 층위에서 출토되는 유물의 양상과 퇴적의 방향 등을 고 려하여 전체적으로 5개의 층위로 구분할 수 있다. 3. 출토유물 중암리 요지에서는 이 시기 다른 유적들과는 달리 청자와 백자가 함 께 출토되지 않고 순수 백자만이 출토되었다. 층위에 따라 백자는 태토 의 질과 유약의 시유상태, 굽깎음새, 굽접지면 너비, 측사면의 각도, 번 조받침의 수법 등을 달리하며 나타난다. 아래층일수록 기벽이 얇고 태 토와 유약이 정선되고 담갈색과 담청색 유조로 광택이 강하게 나는 것 이 많다. 반면 위층으로 갈수록 태토가 거칠고 유층이 일정하지 않고 대형기종들이 나타난다. 번조방법은 갑발에 넣어 정성스럽게 굽는 갑번을 일반적으로 사용하였으나 극소수는 원통형의 도지미 위에서 예 번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갑발 내에서 큰 기종 안에 작은 기종을 포개 구운 경우도 일부 나타난다. 위의 경우 모두 굽받침은 고운 백색내화토 나 황갈색내화토를 사용하였다. 현재까지의 출토유물 중 기종분류와 수량 파악이 가능한 개체수는 모 두 2,200여점 정도이다. 기종은 완·발·접시·잔·호·병·대발 등 모두 12종류로 분류된다. 이중 해 무리굽완은 우리나라 자기발생기의 대표적인 기종인데 굽의 접지면이 넓은 형태를 특징으로 한다. 이 해무리굽은 中國 唐代의 자기에서 나 타나기 시작하였으며 吳越이후에는 거의 보이지않기 때문에 그 사용시 기를 비교적 분명히 알 수 있다. 완의 입지름은 12∼15cm, 굽지름은 4.5∼6.8cm, 높이는 7∼12cm, 굽접지면 너비는 0.6∼1.4cm의 크기이 다. Ⅴ층에서 출토되는 완은 우선 기벽이 얇고 태토의 구성입자가 치밀하 며 유약의 광택이 매우 좋은 특징을 보이고 있다. Ⅴ층에서의 굽깎음 양식은 굽이 밖으로 약간 외반되고 예리하게 깎았다. 이러한 굽깎음새 의 비율은 50%로 Ⅰ층과 Ⅱ층에서는 보이지 않는 수법이다. 굽접지면 의 폭에 있어서는 0.8cm 이하의 좁은 굽폭을 가진 것은 비율이 48%로 거의 반을 차지하고 있다. 그릇의 표면은 매우 정선되어 있으며, 내저 면에는 바닥이 곡면을 이루고 있다. 유색은 담갈색과 담록색이 많은 비 율을 보인다. 굽바닥 두께는 평균 0.5cm이며 번조받침은 백색내화토 나 황갈색내화토를 부분적으로 찍은 것이 65%를 차지하였고 나머지 는 굽 전체에 내화토를 찍었다. Ⅴ층에서 보이는 이러한 초기적 양상 은 Ⅰ층으로 갈수록 다른 특징을 보인다. 즉 측사면의 각도가 40°이상 으로 급하게 올라가는 것의 비율이 증가하며, 굽깎음새는 초기 양식인 외반된 굽이 Ⅲ층에서 급격하게 줄어들더니 Ⅱ층부터는 그 모습을 감 추고 있는 현상을 보인다. 굽접지면 폭 역시 0.8cm 이하의 폭이 좁은 것에서 1.2cm 이상의 넓은 굽 폭을 가진 완이 증가하는 추세를 보여준 다. 발은 완보다 입지름이나 굽지름이 비교적 크며 굽의 높이는 높은 편 이다. 발은 완과 마찬가지로 태토가 정선되고 유약의 광택이 매우 좋 다. 유색은 담갈색과 담녹색의 비율이 높다. 발의 입지름은 16∼18cm, 굽지름은 5.5∼8.0cm, 높이는 6.5∼7.5cm의 크기에 측사면의 각도는 대체로 55°이상이다. 측사면은 굽에서 완만하게 올라가다가 기면의 1/3 지점에서 경사가 급해지는 유형과 굽에서부터 바로 직선으로 급하게 올라가는 유형이 있다. 전자는 내저면의 원각이 굽지름 보다 크고 표준 퇴적층의 Ⅰ층이나 Ⅱ층에서 주로 확인된다. 후자는 내저면 원각이 굽 지름과 비슷하거나 조금 작고, Ⅳ층에서 주로 출토된다. Ⅴ층의 발은 완과 마찬가지로 내저 곡면을 이루고 기면이 얇고 태토와 유약이 정선 되었으며 유색은 담갈색과 회청색을 띠며 광택이 강하다. 굽은 대부분 해무리굽보다 높은 편이고 접지면 너비는 좁은데 일부는 굽높이가 1.3cm 정도로 높은 기형도 있다. 한편 Ⅴ층에서는 연판문발 1점이 출토 되었다. 접시는 기형과 크기, 그리고 기법에 따라 4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A 형은 입지름이 14cm∼16cm이며 굽지름은 6∼7cm 정도이다. 구연부분 이 외반되지 않고 측사면이 완만하게 내만하는 기형으로 접시류의 대 부분을 차지한다. B형은 입지름이 11cm, 굽지름이 6.5cm 정도의 비교 적 작은 접시로 측사면이 굽에서 바로 40°내외로 곧게 올라간 형태이 다. C형은 외면의 굽 바로 위에서 구연부까지 도구로 눌러 세로로 홈 이 나게 하였다. 내저면에 원각은 굽지름과 비슷하거나 조금작다. D형 은 외측면은 C형과 같지만 내측면에서 돌출된 부위 양쪽을 다시 눌렀 다. 내저면의 원각은 굽지름보다 크다. 이 D형은 방산동 가마터 출토 화판형접시 C형과 같은 양식을 보이는데 Ⅲ층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 며 Ⅱ층에서도 일부 확인된다. 잔은 기형과 크기로 보아 2가지 형으로 나뉜다. A형는 굽이 높고 밖으 로 벌어져 있으며 몸체는 둥근 곡면을 이루면서 구연부분이 곧게 직립 한 형태로 기벽이 얇고 균형이 잘 잡힌 모습을 보인다. B형은 A형보다 소형으로 측사면이 굽에서 내만하다가 구연에 가서는 외반하여 입지름 은 8∼10cm 내외이다. 굽은 전체 크기에 비해 높은편이며 밖으로 살짝 바라졌다. 호는 구연의 바로 아래부터 최대경을 보이며 어깨에서부터 아래쪽으 로 내려오면서 완만하게 좁아든다. 입지름은 25∼30cm 내외이고 구연 은 바깥쪽으로 휘감은 듯 단면상으로 보아 둥글게 처리하였다. 소호는 구연부가 0.5cm 정도로 직립하였고 동체는 어깨에서 완만하게 밖으로 향한 후 다시 안으로 오므라든다. 소호는 기벽이 얇고 유약이 제대로 고착되지 않은 경우가 많으며 경도가 약한 편이다. 병은 기형이 완전히 복원되는 것은 찾아지지 않았지만 구연부의 형태 로 보아 광구형과 나팔형이 있다. 입지름은 광구형이 7cm, 2.5cm이고 나팔형이 3cm이다. 시흥 방산동가마터 출토품과 비교하여 보면 높이 는 광구형이 28cm, 12cm이고 나팔형은 10cm 내외로 추측된다. 대발은 굽지름이 7∼9cm 정도로 발이나 완보다는 크고 기벽이 두껍 다. 내저원각은 없으며 소성시 굽받침으로 내화토를 두텁게 발랐다. 굽 지름이 큰 것은 태토나 유약이 비교적 깨끗하다. 대반은 태토와 유약이 정선되지 못했으며 녹갈색을 띤다. 저부편만 출토되어 전체적인 크기는 알 수 없으나 대체로 굽지름 25∼30cm이 고, 접지면 폭은 2∼2.5cm로 전체적으로 투박한 편이다. 뚜껑은 연봉형 손잡이의 유무에 따라 분류할 수 있는데 손잡이가 있 는 것은 발이나 접시위에 포개구이를 하여 눌러붙은 경우가 많다. 포개 구이를 한 것일수록 유태의 상태가 좋지 않다. 잔탁은 4점이 출토되었다. 상면에 잔을 놓을 수 있는 공간의 지름은 5.5cm 내외, 굽지름은 8cm 내외로 비슷하다. 유색에 있어서는 녹갈색 과 갈색을 띠는데 갈색은 굽과 상면 잔을 놓는 곳의 면이 보다 높게 남 아있다. 특히 Ⅴ층에서 출토된 잔탁 2점은 태토와 유색이 정선된 우수 한 기형으로 굽과 잔받침 부분의 높이가 낮은 점이 주목된다. 이중 한 점은 연판 15잎이 날개부분에 빼곡히 음각되어 있다. 나머지 한점은 아 무런 문양 없이 깔끔한 표면을 보여주고 있다. 외연 지름은 15cm, 굽높 이는 1.1∼1.3cm이다. 장고는 측면 지름이 20cm 내외로 편만 수습되었는데 태토와 유약이 깨끗하지 못하고 녹갈색을 띤다. 요도구는 시편·갓모·도지미·토봉·갑발 등 5종으로 분류된다. "∪"형의 시편과 지름 12cm 내외의 갓모, 지름 8.5cm의 도지미, 단면이 타원형 또는 방형인 토봉 등이 수습되었다. 토봉의 경우 한쪽 끝에만 불먹은 자국이 남아 있으며 굴뚝부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었다. 갑발은 크게 3 가지 형태로 구분할 수 있다. A형은 원통형으로 안쪽에 자기를 놓는 것 이 아니라 뚜껑처럼 씌워서 사용하므로 윗면 즉 외측의 바닥면에 그릇 을 놓기 때문에 이곳에 그릇을 구운 자국이 남아 있다. B형은 바닥이 편평한 대발형태로 안바닥에 그릇을 놓고 구운 흔적이 보인다. 그러나 A평 갑발도 B형 갑발처럼 사용하였는데 이는 A형 갑발 안바닥에 굽이 놓이 흔적을 보고 알 수 있다. C형은 발형과 비슷하나 보통 기벽이 얇 고 B형 갑발과는 달리 뒤집어서 사용하였다. C형 중에는 비교적 큰 갑 발이 있는데 최후가마바닥에서만 출토되어 가마운영 후기에 대형 기종 을 많이 생산하였음을 알려준다. 한편 갑발받침은 한점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A형 갑발이 가마 내부의 모래바닥에 깊숙히 박힌 채 출토되는 예를 통하여 짐작할 수 있다. 즉 별도의 갑발받침을 만들어 사용하지 않고 높이가 낮은 A형 을 갑발받침으로 대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4. 퇴적층위와 가마의 수·개축과의 상관관계 위에서 가마는 각 시설물별로 3∼5차례 수·개축이 이루어졌으며 퇴적 구에 대한 조사에서는 층위별로 5개로 나누어지며 각 층위에 따라 유물 의 제작양상이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Ⅴ. 調査成果 및 意義 여주 중암리 유적은 고려백자요지로 고려초기 백자의 발생 및 발달과 정과 관련하여 역사적·도자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이번 조사 는 유적의 정확한 규모와 성격을 밝히고 출토유물의 분석을 통한 학술 적 기초자료를 확보하고자 실시하였다. 조사결과 나타난 성과 및 의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고려백자가마의 전체적인 규모와 구조를 파악할 수 있었다. 가 마는 경사면에 굴모양으로 길게 조성한 登窯이며 규모는 길이가 20.4m 이고 내부너비가 100∼170cm이다. 주향은 W23。S 이며 가마의 경사도 는 11∼13。이다. 구조는 아궁이, 번조실, 굴뚝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현재까지 알려진 초기가마 유적중 가장 잘 남아있는 가마구조를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점은 유적의 역사적인 중요성과 더불어 사회교육적 인 측면에서 그 활용성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향후 체계적인 발굴 조사와 지속적인 보존대책이 수립되어져야 할 것이다. 둘째, 가마는 5회 이상 수·개축하였음이 하부조사를 통하여 밝혀졌 다. 가마의 조성초기에는 벽체의 구조가 벽돌가마의 형태였으나 3차 개 축 이후부터 진흙가마로 변화하였으며, 가장 늦은 시기에는 아궁이 및 굴뚝부에 석재를 이용하여 석축을 쌓아 벽체를 조성하였다. 또한 시기 가 지나면서 가마를 축소하여 사용하였음을 확인하였다. 이러한 하부 조사를 통해 인근 용인의 서리와 시흥 방산동 유적과 관련하여 초기가 마의 구조와 변화과정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나아가 한강을 중심으로 한 중서부지역의 지역적·문화적인 특징을 규명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 된다. 셋째, 퇴적구는 모두 5개의 층위로 나누었으며 모두 2,200여점에 이르 는 유물을 수습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층위 및 기종에 따른 분류를 하 였고 이에 따른 속성 및 제작양상의 변화과정에 대해 체계적인 분석을 시도하였다. 출토유물은 12기종으로 나누어지며 아래층에서 위층으로 갈수록 기종이 다양하고 장고·대반과 같은 대형기종들이 나타나고 있 다. 출토 양상은 아래층에서는 내저곡면의 완과 발, 굽이 낮은 연판문 잔탁 등이 수습되며 윗층에서는 내저원각의 완과 발, 화판형잔 등이 주 로 확인된다. 이 자료들은 이후 학계에서 논란이 계속되어오던 자기발 생설 및 미술사적 유물 편년설정에 중요한 데이터로서 학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넷째, 관련유적에 대한 주변 지표조사를 통하여 모두 31개소의 도요 지를 새로이 확인하였는데 이들 도요지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전시기에 걸쳐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까닭은 남한강과 섬강 을 중심으로 발달된 교통로의 합류지점에 유적이 입지한다는 점과 자 기 제작에 필요한 태토와 땔감이 풍부하다는 점이 이 지역에 도요지가 밀집 분포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하였다고 할 수 있다. 추후 보다 정밀 한 조사가 진행되면 보다 많은 도요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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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 오이도 추가단지내 주거 밀집지역 발굴조사 운영자 2283 2001.10.22
156 영월 창원리 나한상 출토지 긴급 수습 발굴조사 운영자 2060 2001.10.22
155 영월 나한상 출토지 현장설명회 (10/21) 운영자 782 2001.10.21
>> 여주 중암리 고려백자요지 발굴조사 현장설명회 자료 운영자 3210 2001.10.18
153 경기도 여주 중암리 고려백자요지 발굴조사 현장설명회 경기도박물관 927 2001.10.14
152 이천 설성산성 운영자 2443 2001.10.12
151 이천 설성산성 현장설명회 (10/13) 운영자 816 2001.10.12
150 울산 사연리 늠네유적 운영자 2659 2001.10.06
149 울산 신정동유적 운영자 2190 2001.10.06
148 울산 사연리 늠네유적 현장설명회 안내(10/5) 울산문화재연구원 960 2001.10.03
147 나주 운흥사지 현장설명회(10/7) 전남문화재연구원 922 2001.09.29
146 경주 황성동 강변로개설구간(3-A공구)내 유적 발굴조사 운영자 2891 2001.09.27
145 고성 송학동고분군 발굴조사 개요(2차) 운영자 2776 2001.09.27
144 아산 명암리 유적 현장설명회(9/14) 충남대박물관 1009 2001.09.11
143 고령 지산동 당간지주(보물 제54호) 운영자 2318 2001.09.04
142 고령 지산동 당간지주 현장설명회 (9/4) 운영자 782 2001.09.04
141 서천 남산성 현장설명회 자료 운영자 1874 2001.09.04
140 논산 원북리유적 발굴조사 운영자 2442 2001.08.30
139 대구 욱수동, 경산 옥산동유적 발굴조사 운영자 2270 2001.08.30
138 울산 신현동유적 1차 발굴조사(육군00부대 이전부지) 운영자 2279 2001.0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