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로고

현장소식

반월산성

2001-08-17 13:45:00
조회 2852
Ⅰ. 조사개요 1. 조사지역 : 포천군 군내면 구읍리 산 5-1번지 반월산성 (사적 403호) 2. 조사기관 : 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 3. 조사기간 : 2001. 5. 21 - 2001. 8. 10 현재 4. 조사 목적 반월산성은 1995년 1차 발굴조사가 실시된 이후 연차적인 발굴조사 가 진행되어 지금까지 총 5차례에 걸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먼저 장대지와 헬기장 부근 건물지에 대한 조사를 시작으로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면서 주로 산성 내부 평탄지에 대한 발굴조사와 일부 성벽 및 문지 등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또한 조사 결과를 수용하 여 연차적인 정비도 이루어지고 있다. 금번 조사도 이와 같은 연차적인 발굴조사의 하나로 이루어진 것이 다. 금번 발굴조사는 5차 발굴시 일부 노출되었던 동문지에 대한 전면 적인 발굴과 성벽 정비 과정에서 노출된 추정 내성벽을 확인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다. 이 밖에도 5차 발굴에서 확인된 대형건물지 서쪽 경 사면과 북쪽 건물지에 대한 보강조사도 계획되었다. 이를 상술하면 다 음과 같다. 첫째, 5차 발굴조사시 동치성 부근에서 존재가 확인된 추정 동문지에 대한 정밀조사를 실시하여 통해 문지의 성격 규모를 파악하고 그 성격 및 축조시기를 규명한다. 둘째, 5차 발굴조사시 애기당지 아래에서 노출된 성벽의 성격을 밝힌 다. 셋째, 5차 발굴조사시 확인된 대형건물지 서쪽 경사면 및 대형건물지 북쪽에 위치한 평탄지를 조사하여 또 다른 건물지의 흔적을 찾는다. . 넷째, 동벽 미복원 구간을 절개하여 성벽 복원의 기초자료를 확보한 다. 다섯째, 산성 전체에 대한 정밀 측량을 통해 산성의 현황을 보다 명확 히 파악한다. 여섯째, 이상과 같은 발굴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추후에 이루어지는 산 성 정비를 위한 정비안을 제시한다. Ⅱ. 조사내용(2001년 8월 10일 현재) 금번 조사 지역은 크게 5 구역으로 나누어진다. Ⅰ지구는 동문지 일대 이다. Ⅱ지구는 5차 발굴조사시 설정되었던 Ⅰ확-3트렌치를 포함하여 서쪽으로 형성된 완만한 경사면이다. Ⅲ지구는 5차 발굴지역 북쪽에 위 치하고 있는 평탄대지이다. Ⅳ지구는 5차 발굴시 내성으로 추정되는 성 벽이 발견된 애기당지 남쪽과 서쪽의 경사면이다. Ⅴ지구는 동문지 남 쪽의 성벽 절개트렌치이다. Ⅰ지구는 먼저 5차 발굴시 드러난 동문지 등성시설과 개구부 일부를 노출시키고, 이에 대한 전면 발굴을 위하여 동문지 내부, 통로부, 외부 에 각각 탐색트렌치를 설정하여 조사한 후 유구의 출토 상황에 따라 확 장하여 조사하였다. 최종적으로 확장트렌치는 '工'자형을 이루게 되었 다. Ⅱ지구는 5차 발굴시 Ⅰ확-3 트렌치를 노출시킨 후 이를 서쪽으로 확 장하여 조사를 실시하였다. Ⅲ지구는 평탄지 중앙에 6m×6m의 구획을 정하고 남북방향을 장축으 로 각각 2m×6m의 트렌치 3기를 설정하였다. 이를 동쪽부터 Ⅲ-1∼3 트렌치라 명명하고 홀수번 트렌치를 시굴조사하였다. Ⅳ지구는 애기당지 남서쪽 능선에 지형에 따라서 종으로 2m×8m∼ 14m의 트렌치 3기를 설치하였다. 동쪽부터 Ⅳ-1∼3 트렌치로 명명하 고 각 트렌치를 암반까지 제토하였다. Ⅴ지구는 성벽 상부에서 확인된 내벽선에서 하부의 외벽선을 직교하 는 폭 3m의 트렌치를 설정하여 붕괴된 석재와 뒤채움석을 드러내고 성 벽 단면 조사를 실시하였다. 다시 내벽선 안쪽으로 3m, 외벽선 밖으로 2m를 더 돌출시켜서 내벽 및 외벽의 토층조사를 실시하였다. 구체적인 조사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Ⅰ지구 1)토층 동문지 일대는 원래 계곡이 형성되었던 곳이다. 기저 암반은 북쪽, 서 쪽, 남쪽에서 비교적 완만하게 진행되어 오다가 동문지 주변에 급격히 낮아지고 있다. 이 같은 지형적 여건 때문에 성벽을 축조하기 위해서 풍화암반을 상당부분 삭토한 후 그 위로 진흙을 다져서 수평을 맞춘 후 성벽과 문지를 축조하였다. 문지 및 성벽 내·외부의 축조방식을 알 아보기 위하여 성벽 내외부에 피트를 설정하여 토층을 조사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1)Ⅰ- S 피트 문지 남쪽 내벽 하단부의 토층을 조사하기 위해 4m×5m의 구역을 설 정하여 시굴 조사하였다. 내벽 기단석 40cm 아래에서 풍화암반층이 노 출되었다. 풍화암반층을 포함하여 모두 4개의 토층이 확인된다. 1층 : 황갈색 점토+모래+목탄층(10cm) 2층 : 황갈색 점토+암반풍화토(10cm) 3층 : 회갈색 점토+모래+암반풍화토(20cm) 4층 : 풍화 암반층 이 중 3층에서는 백제 토기편이 수습되고 있다. 한편, 이 피트의 북쪽에 위치한 동문지 등성시설 뒤편에서는 등성시 설 상단석재에서 75cm까지 암갈색 점토+모래층에 와적이 되어 있으 며, 그 아래로 20cm 정도 암반까지 갈색점토+모래층이 형성되어 있다. 등성시설을 만들면서 형성된 층이기 때문에 Ⅰ-S 피트의 토층과는 차 이가 있다. (2)Ⅰ- N 피트 문지 북쪽 내벽과 성벽 상단을 조사하기 위하여 동문지 북측벽에서 북쪽으로 3m를 확장하여 조사하였다. 부토층을 제거하자 내벽 앞으로 (서쪽) 2m 지점까지, 성벽 상단에서 하단까지(150cm) 와적층이 형성되 어 있었다. 이 와적층은 갈색점토+모래+잡석 등과 섞여져 있었다. 와적 층은 마치 기와편, 흙, 잡석 등을 솟아 부은 것처럼 정교하지 않았다. 내벽 기단석에서 200cm 지점에서 풍화암반층이 노출되었다. 그 사이 에는 모두 9개의 토층이 형성되어 있었다. 1층 : 암적갈색 점토+모래(10cm) 2층 : 갈색 점토+모래(30cm) 3층 : 암갈색 점토+모래(50cm) 4층 : 황갈색 암반풍화토(10cm) 5층 : 목탄층(10cm) 6층 : 회갈색 점토+모래(30cm) 7층 : 암반풍화토(10cm) 8층 : 적갈색 점토·회갈색 점토·갈색 점토+모래(60cm) 9층 : 풍화 암반층 (3)Ⅰ-E 피트 문지 외벽 및 외벽 기저부의 토층 조사를 위해 2m×4m의 구역을 설정 하여 조사하였다. 토층은 위로부토 아래로 다음과 같이 형성되어 있었 다. 1층 : 부토층 2층 : 황갈색점토+잡석+기와층(70cm) 3층 : 암갈색모래+점토층(20cm) 4층 : 적갈색 점토+모래층(30cm) 5층 : 암갈색 점토+모래층(60cm) 6층 : 황갈색 점토+모래층(20cm) 7층 : 풍화암반층 2층은 문지 축조 후 진입로를 개설하고 또 문지 외벽을 보호하기 위하 여 인위적으로 축조한 것이다. 외벽 3단까지 채워져 있었다. 3층은 문 지 축조 이전에 지표층으로 보이며 여기에서는 백제토기와 신라토기 가 섞여서 출토되고 있다. 4층은 외벽 기단석 하부에서부터 2단까지 걸 쳐있었다. 신라 토기편은 3층 이상에서 출토되며 4층 이하에서는 백제 토기편만 출토되고 있다. 2) 동문지 동문지는 5차 발굴조사시 등성시설, 배수시설, 측벽 등이 확인된 바 있 다. 이번 조사에서는 동문지의 전체 규모와 축조시기 및 변화 과정 등 에 중점을 두고 조사하였다. 지금까지 조사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통로부 성벽의 두께는 약 6m정도이다. 따라서 문지 통로부의 길이도 이와 일 치할 것으로 생각된다. 문지의 폭은 이미 5차 발굴조사에서는 최대 3.9m 내외로 추정되었다. 당시 문지 통로부는 와적층으로 폐쇄되어 있 었다. 이번 조사에서는 측벽을 따라서 와적층을 제거하면서 다시 바닥 석과 측벽을 정밀 조사하였다. 그 과정에서 동문지가 1회 이상 개축되 어진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와적층을 제거하자 문지 통로부의 규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남측벽 은 외벽 쪽 2m 정도가 유실되었다. 길이는 4.1m, 높이는 1.3m이다. 개 축의 흔적은 확인이 되지 않고 있다. 외벽 쪽 2m는 문지를 폐쇠하고 외 벽을 축조하는 과정에서 유실된 것으로 판단된다. 북측벽은 개축의 흔적이 있었다. 이미 5차 발굴에서 북측벽은 내벽에 서부터 2.5m지점까지 확인되었다. 문지를 폐쇠한 와적층도 이 부근에 서 끝났다. 따라서 이 벽이 문지 폐쇠직전에 북측벽으로 사용된 것은 분명하다. (이를 이하 2차 측벽이라 칭한다.) 그런데 내벽과 등성시설 사이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2차 측벽 안쪽 60cm 되는 지점에서 1차 측 벽이 확인되었다. 2차 측벽을 제거하자 문지 초축시 조성된 1차 측벽 이 나타났다.(이하 1차 측벽으로 명칭한다.) 1차 측벽의 길이는 4.5m이고 높이는 1.5m로 8∼9단이 남아 있다. 떼 어낸 할석재의 편편한 면을 문지 안쪽으로 두고 있으며, 석재 틈 사이 에는 바닥부분과 마찬가지로 갈색 점토+모래가 채워져 있었다. 따라서 바닥석 축조시 동일하게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내벽에서 외벽 쪽으로 1.5m 되는 지점까지는 일정한 단을 이루고 있으나, 여기부터 다시 1.5m 지점까지는 측벽의 면석들이 외벽 쪽으로 쓰러지면서 무너졌다. 이 같은 상황으로 보아 1차 측벽은 외벽이 앞으로 무너질 때 같이 무너 졌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후 다시 문지를 개축할 때는 북측벽을 앞으 로 60cm 내어서 축조하였던 것이다. 그 후에 다시 문지 통로부를 와적 으로 폐쇄하고 통로부 전면에는 외벽이 축조되었으며, 이 외벽은 다시 조선시대에 개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동문지 규모는 처음에는 길이 6m, 폭 4m, 높이는 1.5m∼2m 정 도였다. 그 후 개축되면서도 길이와 높이는 변하지 않고 폭만 약 60cm 정도 줄었던(폭 : 3.4m) 것으로 생각된다. 문지 바닥에서도 같은 선상에 중복되어 2개의 배수로가 확인되었다. (상단이 2차 배수로이고, 하단이 1차 배수로이다.) 2차 배수로는 내벽선에서 1.6m되는 지점부터 시작된다. 시작부분의 폭은 23cm이나 중간부분은 넓어지고 다시 끝 부분은 좁아진다. 배수 로 남쪽 석렬은(크기는 35cm×18cm×35cm, 52cm×16cm×23cm 등이 다.) 4매로 구성되어 있으며 외벽 방향으로 일직선으로 나가지만, 북 쪽 석렬은(크기는 35cm×19cm×32cm, 32cm×21cm×17cm 등이다.) 두 번째와 세번째 석재가 북동쪽으로 벌어졌고 네 번째 석재는 원 위치 를 유지하고 있다. 덮개돌은 확인할 수 없었는데, 아마 동문지가 폐쇄 되면서 유실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바닥석은 1차 배수로의 덮개돌을 이용하였다. 2차 배수로는 내벽선에서 0.7m되는 지점부터 외벽 방향으로 덮개돌 7 매가 3.8m 진행된다.(석재크기: 128cm×42cm, 58cm×42cm) 역시 출수 구가 확인이 되지 않지만 외벽쪽에서 붕괴된 단면을 보면 덮개돌을 받 치고 있던 양 측벽이 서로 안쪽으로 붕괴된 것을 볼 수 있다. 1차 배수로는 초축시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1차 문지가 축조된 후 에도 계속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2차 배수로는 2차 문지가 축조되 면서 1차 배수로를 대치하기 위하여 축조된 것으로 판단된다. (3) 내부 문지의 내부에는 등성시설과 남북 내벽이 있다. 등성시설에 대해서 는 5차 발굴조사 보고서에서 상술하였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내벽을 중 심으로 서술한다. 내벽은 문지 통로부를 기준으로 나뉘는데 Ⅰ-S 피트에서 확인된 남쪽 내벽과 Ⅰ-N 피트에서 확인된 북쪽내벽이 있다. 남쪽내벽은 5차 발굴조사에서 상단으로부터 2∼3단까지 길이 4.5m 정도가 확인되었다. 당시에도 내벽은 축조시기가 다른 두 벽이 공존하 고 있었는데, 두 벽은 선은 문지에서 남쪽으로 2.1m 되는 지점에 서 'X'자형으로 교차되고 있었다. 이 같이 각각 시기를 달리하는 내벽 이 있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1차례 이상 개축이나 보수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번 조사에서는 이곳에 피트를 설정하여 암반층까지 제토하였다. 그 결과 내벽의 전체모습이 노출되었다. 잔존 내벽은 최대 8∼9단으 로, 높이는 140cm 정도이다.(석재 크기 : 66cm×28cm, 36cm×14cm, 57cm×29cm) 내벽은 할석의 바른면을 바깥으로 놓아 축조하였다. 크 기가 다양한 할석을 사용하여 축조하였기 때문에 조잡하다. 내벽은 축 조 후 상단 2∼3단 정도를 제외하고는 점토와 모래를 섞어 다져 올리면 서 모두 매몰하였다. 이 다짐층 상면에는 점토+잔돌을 깔아서 성벽 상 면으로 통하는 보도를 만들었다. 남쪽 내벽은 시기를 달리하면서 최소 한 3차례 정도 축조되었다. 선후 관계 및 축조 시기에 대해서는 현재 조 사가 진행 중이다. 다만 내벽 기저부 암반층 상면에서 백제토기가 출토 되고 있어서 내벽이 처음 축조된 것은 백제시대였다는 것을 알 수 있 다. 또한 나머지 두 번은 문지의 개축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쪽내벽은 문지 바닥 하부에서 발굴된 초축 내벽선과 연결되고 있 다. 기단석은 원위치를 유지하고 있으나 그 상단으로는 외벽 쪽으로 급 격하게 기울어져 있다. 내벽을 노출하는 과정에서 내벽의 전면으로 2m 되는 지점까지 높이 1.3m 정도로 와적층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 와 적층은 문지 통로부를 폐쇄한 와적층과 동일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한 편 이 와적층 아래에는 황갈색점토가 사이사이에 들어있는 와적층이 있다. 이 와적층은 5차 발굴조사시의 와적층과 동일한 성격을 띠고 있 다. 전자는 와적이라기 보다는 기와와 점토를 쓸어넣은 듯한 느낌을 주 고 있다. 내벽의 상면이 외벽 쪽으로 기울어지자 이를 보강하기 위하 여 시설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반하여 후자는 동문지 서쪽의 대형건물 지와 관련되어 조성된 것이다. 노출된 내벽의 잔존 단수는 9∼10단이고, 높이는 1.3m이다. 상단이 하단보다 외벽쪽으로 약 1.5m 들어갔다. 기울어진 것을 제외한다면 축 조방법은 남쪽 내벽과 차이가 없다. (석재 크기 : 52cm×23cm, 36cm× 10cm) 내벽을 구성한 면석은 등성시설에 쓰인 잘 치석된 질 좋은 화강암이 보이지 않으며, 주로 편마암 할석을 사용하고 있다. (4) 외부 Ⅰ확E 피트에서 확인된 외벽은 10단, 높이 154cm가 확인되고 있다. 노 출과정에서 상단에서 3∼4단 하부까지 두께 70cm 정도 황갈색 점토+할 석+기와층이 외벽 전면 약 4m 지점까지 이어지고 있다. 통로부와 접하 는 외벽 부분이 가장 두꺼우며 여기에서 멀어질수록 얇아지고 있다. 3 단을 기준으로 축조 방법의 차이가 보여진다. 게다가 2단 아래로는 적 갈색 점토+모래층으로 매몰되어 있어서 4단 이상은 개축되었을 가능성 도 무시할 수 없다. 기단석에서 3단까지는 주로 편마암 할석을 바른면 을 앞으로 놓아 축조하였다. 따라서 면과 모가 맞지 않고 단도 분명하 지 않다. 하지만 4단 이상은 삼각추 형태로 치석된 화강암을 일부 사용 하여 축조하였다. 따라서 비교적 단이 정확한 편이다. 할석재를 사용하 여 쌓은 부분도 고임돌을 놓고 단을 맞추고 있다.(석재 크기 : 50cm× 22cm, 65cm×27cm, 45cm×18cm, 45cm×15cm) 노출된 외벽은 대부분 황갈색점토+할석+기와층에 의하여 매몰되어 있었다. 이 층이 문지로 통하는 진입로 바닥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짐 작된다. 그런데 문지 바닥과 진입로의 고저차이는 60∼70cmdp 이르고 있어서 사다리를 이용하거나 별도의 출입시설이 있었을 거으로 추정된 다. 이에 대해서는 아직 조사가 진행 중이다. 2. Ⅱ지구 Ⅱ지구는 6m×9m 크기의 트렌치로 확장을 한 후 서벽 중간지점에 동 서로 3m×7m의 경사면을 따라서 트렌치를 이어 확장하였다. 이곳에서 는 5차 발굴조사시(Ⅰ확-3 트렌치) 남북 방향으로 부정형 석재로 이루 어진 길이 290cm인 석렬이 노출되었다. (석재크기 : 19cm×39cm× 4cm, 16cm×18cm×9cm) 이다. 이 외에도 다른 석렬이 앞의 열과 110cm 간격과 60cm의 높이차를 두고 평행하게 진행하고 있었다. (석 재 크기 : 7cm×29cm×5cm, 17cm×20cm×4cm) 이 두 석열 사이에는 회갈색 모래층이 충진되어 있었고 여기에서 완류와 회백색 연질의 구 연이 외반된 발(鉢)이 수습되었다. 또한 이 두 석렬의 밖으로는 고운 모 래가 퇴적되어 있었다. 이 같은 토층 상황으로 보아 배수시설의 흔적 으로 추정하였다. 확장 조사된 결과는 다음과 같다. 1)토층 트렌치 동쪽벽에서 서쪽 벽까지 암반은 1.5m 정도 높이 차이를 두고 낮아지고 있다. 동서로 연장한 경사면 트렌치의 토층을 보면 상단에서 90cm 갈색 점토+모래+기와+토기편 다짐층(1층), 15cm 목탄층+소토된 점토층(2층), 적갈색 점토+모래 다짐층(3층), 암반층(4층)이 형성되어 있다. 1층에서는 신라 대부발저부나 토기편등 대체적으로 신라유물이 수습되 고 있으며, 2층과 3층에서는 백제토기편 등이 수습되고 있다. 2)유구상황 트렌치를 서쪽으로 확장하자 5차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석렬과 다른 또 하나의 석렬이 35cm의 간격을 띄며 서로 마주보고 남북으로 지나 고 있다.(석재 크기 : 41cm×11cm, 22cm×14) 석재열 사이에는 굵은 모 래들이 채워져 있다. 석렬은 모두 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남쪽에서 덮개돌로 보이는 판석 5매가 확인이 되었다.(석재 크기 : 40cm×23cm ×4cm, 51cm×24cm×5cm) 이 같은 상황으로 보아 이 유구는배수시설 로 추정된다. 배수로의 벽을 이루고 있던 석재들이 모두 서쪽으로 기울 어져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서쪽 방향으로 유실되어진 것으로 추정 된다. 이 시설을 하부에는 암반위로 70cm 정도 다짐을 하였다. 3. Ⅲ지구 5차 발굴조사시 확인된 대형건물지 북쪽 위편에 동서 10m, 남북으로 8m의 평탄지가 있어 6m×6m의 구획을 선정하여 2m×6m의 트렌치 3기 를 선정하여 동쪽으로부터 Ⅲ-1∼3트렌치로 명명하여 홀수 트렌치를 시굴 조사하였다. 지표하 30cm 지점까지 부식토를 걷어내자, 풍화 암반이 확인이 되었 다. 별 다른 유구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4. Ⅳ지구 5차 발굴조사시 애기당지로 오르는 경사면에서 내성벽으로 추정되는 성벽이 노출되었다. 이 성벽은 애기당지 남쪽 경사면 중간지점까지 연 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중간부분에서 갑자기 성벽이 사라져서 인위적 으로 헐어내었을 가능성이 제시되었다. 이번 조사에는 이것이 내성벽 인지 확인하기 위하여 이와 연결되는 성벽을 찾으려 하였다. 따라서 성 벽이 회절할 것으로 추정되는 애기당지 남·서쪽 경사면에 2m×8·14·10m 의 트렌치를 설정하여 Ⅳ-1∼3트렌치로 명명하여 조사하였다. 조사 결 과 내성벽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이에 다시 내성벽의 끝나는 지점 과 인접하여 Ⅳ-4트렌치를 설정하여 시굴하였으나, 역시 내성벽의 흔 적은 확인할 수 없었다. 5. Ⅴ지구 Ⅰ지구에서 남쪽으로 3m되는 지점에 성벽 절개 트렌치를 설정하였 다. 성벽 절개 트렌치는 상부에서 확인된 내벽선과 외벽선을 직교하는 폭 3m의 트렌치를 설정하여 내벽선 안쪽으로 3m, 외벽선 밖으로 2m 나 와서 내외벽 밖의 토층조사를 병행하였다. 조사 결과 성벽은 편축식 성 벽으로 확인이 되었다. 조사된 사항을 상술하면 다음과 같다. 1) 토층 내벽 트렌치에서는 암갈색 점토+고은모래층으로 일괄되게 나타나고 있다. 외벽 트렌치에서는 기단석 하부로 모두 5개의 토층이 형성되어 있다. 1층 : 암갈색점토·황갈색점토+모래+잡석(40cm) 2층 : 암회갈색 점토+모래+잡석(10cm) 3층 : 명갈색 점토+모래(50cm) 4층 : 암적갈색 점토+모래(40cm) 5층 : 풍화암반층 2) 내벽 풍화암반층 위로 암갈색 점토+고은모래층이 30cm 있고, 그 위로 2단 의 석재가 놓여 있다. 내벽의 높이는 55cm 정도로 부정형의 할석재를 사용하고 있다.(석재 크기 : 83cm×38cm×25cm, 57cm×45cm×31cm) 3) 절개부 암반층을 2단으로 삭토하였고 그 위에 암적갈색 점토+모래다짐층을 50cm∼60cm 정도 다졌다. 그 위로 뒷채움석을 쌓았다. 뒷채움석은 한 단은 세로로 그 위에는 가로로 방향을 바꾸어가며 쌓아 앞으로 밀리는 것을 방지하였다. 특히 세로부재는 약간의 뒷심을 기울여 놓고 있다. (석재 크기 : 75cm×32cm, 45cm×27cm, 30cm×27cm, 23cm×18cm) 외벽하단 기저부는 초축된 후 2차례이상 보수가 되어진 것으로 보인 다. 초축된 성벽 위로 앞으로 더 돌출시켜 기단석을 놓았으며 그 위로 는 다시 안쪽으로 들어가 기단석을 놓고 성벽을 축조하였다. 안으로 들 여진 면석 위로 조선시대 개축된 성벽이 올라서고 있다. 이 부분에 대 해서는 현재 조사가 진행중이다. 절개면에서 보이는 조선시대 성벽은 1차 혹은 2차 외벽이 무너진 부 분을 기저부로 삼아서 그 위로 외벽을 축조하였다. 뒤채움도 하지 않 고 대형 면석을 사각추 형태로 다듬어 뒷심을 기울여 쌓고 있다. 잔존 조선시대 성벽은 높이 3m, 하단부에서 상단부까지 들여쌓은 폭은 1.7m 이다. 6. 토광 Ⅰ- S 피트 하단에서 3기의 토광이 확인되었다. 내벽하단 다짐층에 서 백제토기가 확인되어지고 있으며, 토광 내부에는 점토+모래로 다져 져 있었다. 내부에서는 백제토기편이 수습되는데, 특히 1호 토광 상단 부에서 장란형토기와 심발형토기편이 출토되었다. 내부의 토층 상태 로 보아 이 토광들은 모두 내벽 축조시 매몰되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상면과 내부에서 발견되는 토기는 이 때 쓸여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이 토광의 용도는 짐작하기 어렵다. 조사된 토광의 현황은 다음과 같다.(단위 : cm) <표 1. Ⅰ확S 피트 토광> Ⅲ. 출토유물 이번 발굴조사에서는 동문지와 성벽주변 트렌치에서 다량의 토기류 와 기와류가 출토되었다. 출토된 토기류는 크게 신라토기와 백제토기 가 구분되지만, 대부분 파편상태이다. 기와류는 지난 발굴조사에서 조 사된 기와와 같은 양상의 선문평기와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 외 소 량의 철제류와 토제품이 출토되었다. 특히 Ⅰ지구에서는 확실한 층위 를 갖는 유물이 출토되어 문지의 성격 및 규모, 축조시기를 규명하는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이 장에서는 출토된 유물을 기와류, 토기류, 철제류로 분류하여 각 유 물의 특징을 정리하고자 한다. 1) 기와류 이번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기와류는 주로 동문지의 와적층에서 출토 되었다. 출토된 기와들의 시문 문양은 종선문, 사선문 등의 선문계열 의 평기와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색조는 대부분 황갈색·회갈색 등이 다. 반면에 막새류와 명문기와류는 한 점도 출토되지 않았다. 특히 동문지의Ⅰ지구 확장트렌치에서 출토된 암키와는 배면에 분할 돌대 흔적이 있어 주목된다. 잔존하는 편이 작아 전체적인 형태파악은 불가능하지만, 등면에는 직선문이 시문 되어 있고 배면에는 세밀한 포 흔이 정연하게 찍혀있다. 색조는 황갈색이고, 경질이며, 태토는 약간 의 가는 석립이 포함된 점토질이다. 또한 적색무문평기와가 동문지 하단의 점토층에서 출토되었다. 이 기 와는 암키와로, 배면에 포흔이 없고, 여러 방향으로 이루어진 빗질흔 이 남아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측면에는 두께의 1/2정도로 한번 에 그은 와도흔이 있다. 깨어진 단면에서는 두 장의 점토판을 붙여 만 든 접합흔이 관찰된다. 이밖에도 회갈색의 복합문 평기와류가 출토되었고, 이러한 출토 양상 은 대체적으로 기존의 5차 발굴조사 출토 기와류와 유사하다. 2) 토기류 출토된 토기류는 백제토기와 신라토기로 크게 구분이 가능하다. 하지 만 대부분 파편상태로 전체기형을 파악하기 어렵다. 출토된 토기류는 동문지 주변 Ⅰ지구 트렌치와 Ⅱ지구 트렌치, Ⅳ지구에서 다양하게 출 토되었다. 기종별로 분류하면 고배류, 호류, 뚜껑류, 완류, 장란형토기 로 구분되며, 시루편, 심발형토기편도 소량 출토되었다. 먼저 백제토기류는 대표적으로 장란형토기편, 원저발편, 심발형토기 편 외 각종 토기의 동체편이 출토되었다. 그 중 주목되는 것은 동문지 Ⅰ확 트렌치 토광에서 출토된 장란형토기편이다. 여러 조각의 파편으 로 수습되었는데, 복원이 일부 가능할 것으로 추정된다. 동체에는 굵 은 승문이 타날되었으며, 저부에는 굵은 격자문이 타날되었다. 구연부 는 외반되었으며, 구순은 자르듯 매끈하게 처리되었다. 태토는 굵은 석 립이 많이 혼입되었으며, 갈색이고 부분적으로 짙은 흑갈색을 띠고 있 다. 내면과 외면의 경부이상 구연부까지는 가로방향으로 물손질하였 다. 특히 굵은 승문은 기존의 가는 승문 장란형토기의 타날문양과는 구 별되어 주목된다. 원저발은 구연부편만이 남아있지만, 5차 조사 당시 출토된 Ⅰ확-3트 렌치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한 기형이다. 이와 같은 기형은 설봉산성 3 차 조사에서도 출토된 예가 있다. 구연부는 안쪽에 얕은 홈을 돌리며 내만하였으며, 구순은 둥글게 처리하였다. 구순 바로 아래부터 동체의 전면에는 선문이 타날된 흔적이 있는데, 물손질하였기 때문에 시문문 양은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돌려쌓기 방식으로 제작하였기에 내면에 점토띠 흔적을 없애기 위해 손끝으로 누르고 물손질한 것이다. 고운 점 토로 만들어진 회백색 연질토기이다. 그 외 승문, 승석문, 유사승문, 교차문, 격자문이 타날된 각종 백제토 기편이 출토되었다. 신라토기는 지금까지 6차에 걸친 조사를 통해 반월산성에서 가장 많 이 출토되었고, 기종도 다양하였다. 고배는 굽다리 높이가 낮은 단각고배와 투창이 뚫린 고배가 함께 출 토되고 있다. 유개고배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구연부의 형태는 안쪽 으로 내만한 것, 뚜껑받이턱과 구순부가 거의 수평을 이루며 그 사이 에 둥글고 얕은 홈이 돌아간 형태 등으로 분류된다. 대부분 배신의 깊 이가 얕고 구경이 넓은 양식이다. 그리고 투창이 뚫린 고배는 크기가 아주 작거나 없는 경우가 많고, 기대편으로 추정되는 저경이 넓고 투창 이 뚫린 굽다리편도 출토되었다. 뚜껑은 대부분 개신부에 인화문이 시문되어 있다. 시문내용은 점열 문, 화엽문, 원문 등이다. 드림부는 그 형태가 매우 다양하며, 뚜껑꼭지 의 형태는 보주형, 굽도치형, 고리형 등이 있다. 모두 고운 점토로 만들 어진 회청색의 경질토기이며, 부분적으로 자연유약이 흘러 광택이 있 는 것도 있다. 완은 다량으로 출토된 기종 중의 하나이다. 구연부는 대부분 45°정도 외반되었으며, 바닥과 동체부를 나누어 만들어 접합시키는 제작방법 을 사용하여 내외면이 고르지 못하다. 회갈색·회백색의 연질이 많으 며, 그 외 회청색 경질도 다수 점하고 있다. 구연부는 외반된 형태와 광구형이 많으며, 대부분 고화도로 구운 회 청색경질이다. 그 중에 주목되는 것은 장경호로 추정되는 회청색 경질 구연부편이다. 이 토기는 경부를 길게 올려 구연부 밖으로 약간 외반시 키고 구순을 둥글게 마무리하였다. 경부에는 선문을 돌려 문양대를 구 획하고 파상문을 음각시문하였고, 견부에도 한줄의 파상문을 돌렸다. 내벽에는 가로방향의 물손질흔적이 남아있으며, 일부 내박자흔도 남아 있다. 동체편은 대부분 회청색경질의 무문이나 돌대가 돌려진 편이 많다. 또한 사각편병으로 추정되는 동체편도 출토되었다. 그 외 주목되는 것은 회갈색 연질토기편과 우각형 파수가 달린 동이 류가 있다. 회갈색 연질토기편은 견부의 일부로, 외면에는 음각의 花紋 이 시문되었는데, 표현기법이 매우 돋보인다. 우각형파수가 붙은 동이 는 Ⅱ지구 확장 트렌치 경사면에서 출토되었다. 황갈색의 색조에 고운 점토로 만들어졌으며 동체에는 선문이 타날되고 그 위를 물손질하여 시문문양을 지웠다. 파수가 붙는 부분에는 1줄의 음각선이 돌려졌는 데, 양쪽에 붙는 파수의 위치를 잡기 위한 선으로 보인다. 이 토기는 공 반 출토되는 신라토기들과는 양식적 차이를 보이고 있어 양식적 계류 가 주목된다. 파수류는 우각형 파수 2점과 고리형 파수가 출토되었다. 고리형 파수 는 동체의 일부와 함께 남아있는데, 동체에 붙는 점토띠의 끝을 3부분 을 분할시켜 장식성을 살렸다. 회청색경질이며, 내벽에는 격자흔과 물 손질흔적이 남아있다. 토기류 이외에도 고운 점토로 만든 동물상, 어망추, 원판형 토제품과 납석제 소형단지 구연부편도 출토되었다. 토제동물상은 길쭉한 몸통 에 붙은 한쪽 발과 꼬리로 추정되는 부분이 남아 있고, 표현이 매우 단 순하다. 어망추는 넓적한 점토판을 말아 붙여 만들었으며, 원판형 토제 품은 지름 4㎝로, 지표에서 수습되었다. 납석제 단지는 복원구경 9.6㎝ 소형으로 내만된 경부에서 구연은 짧게 외반되었고, 견부에는 두줄의 음각선이 돌려졌다. 3) 철제류 이번 조사에서는 소량의 철제류도 출토되었다. 모두 결실된 부분도 많고 표면의 부식이 심하다. 출토된 철제류는 주조철부, 낫, 도자, 솥편 이다. 주조철부는 Ⅰ- N 피트 하단부에서 수습되었다. 전체 형상은 ∪자형 으로 부식이 매우 심하며, 공부의 일부는 결실되었다. 날과 공부의 구 별없이 몸통 안으로 공간을 마련했다. 공부의 단면은 사다리꼴이다. 측 면은 이등변삼각형으로 공부 쪽으로 갈수록 점차 넓어진다. 크기는 잔 존길이 15.6㎝, 폭 6.5∼7.8㎝, 높이 18∼3.8㎝ 철판두께 0.5∼0.9㎝이 다. 철제도자는 Ⅰ지구에서 출토되었다. 부식이 심하며, 손잡이와 날의 일부는 결실되었다. 크기는 잔존길이 11.6㎝, 경부 잔존길이 2.7㎝, 폭 1.7㎝∼2.7㎝, 두께 0.2∼0.5㎝이다. 철제낫은 단조품으로 2점이 출토되었다. 모두 Ⅰ지구에서 수습되었 다. 벌낫으로 추정되며, 공부나 경부를 만들지 않고 자루의 미끄러짐 을 막기 위해 끝부분을 꺾어 세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낫의 폭은 일정 하며, 안쪽으로 완만하게 휘었다. 잔존길이 24㎝, 폭 1.5㎝∼2.7㎝, 두 께 0.3∼0.6㎝이다. 다른 1점은 밀낫으로 소형에 속하며, 경부가 결실되 었다. 낫의 폭은 중앙부에서 최대폭을 이루며 경부쪽으로 갈수록 체감 되어 나무자루에 끼어서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날의 단면은 이 등변삼각형이다. 크기는 잔존길이 13㎝, 폭 1.5㎝∼2.5㎝, 두께 0.2∼ 0.5㎝이다. 철제솥편은 지표에서 수습되었다. 솥의 구연부편으로 직립하였다. 구연일부만이 남아있어 전체기형은 파악하기 어렵다. 그 외 용도 불명 의 철제편도 지표에서 수습되었다. Ⅳ. 종합고찰 1. 동문지 동문지 일대는 원래 성벽이 지나가고 있어서 지표상에서는 문지의 존 재를 확인할 수 없었다. 5차 발굴조사에서 동문지의 등성시설이 노출되 어 그 존재가 파악되었다. 등성시설 전면을 확장조사한 결과 동문지 측 벽도 일부 파악되었다. 또한 동문지가 통로부에 와적하여 폐쇠되었던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의 조사는 여러 가지 여건상 불 가능하여 전면적인 발굴조사는 6차 발굴조사로 미루어지게 되었던 것 이다. 한편, 5차 발굴조사보고서에서는 동문지는 현문으로 추정된 바 있다. 이는 문지 바닥과 성벽 외벽 하단부의 고저 차이가 크기 때문이었다. 또한 문지의 폭은 3.9m 내외로 추정되었다. 이는 일부 노출된 측벽을 근거로 한 것이었다. 문지의 폐쇄 시기는 와적에 의하여 폐쇄되었다는 점에서 대체로 8세기 이후로 추정된 바 있었다. 그러나 5차 발굴조사 는 동문지에 대한 전면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한 계가 있었다. 따라서 정확한 형상과 규모 및 성격 문제는 전면적인 조 사 후로 미루었다. 이번에 동문지 전체에 대한 전면적인 발굴을 시행하 였고 그 결과 동문지와 관련된 새로운 사실들을 규명할 수 있었다. 먼저 동문지는 크게 내부, 통로부, 외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내부에 는 문지 바닥에서 올라오는 5단의 등성시설이 있다. 이 등성시설 은 'ㄷ'자 형태로 시설되어 있다. 각 단은 폭이 좁아 발을 딛기가 어려 운데, 이는 문지의 방어를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통로부의 바닥은 할 석과 점토를 다져서 축조하였다. 남문지와 북문지의 경우는 판석을 정 연하게 깔아서 조성하였지만 동문지는 할석의 바른면을 위로 놓고 돌 사이사이에는 점토를 채워서 바닥을 조성하였다. 발굴전에는 문지 바 닥과 외벽 하단부의 고저차가 있기 때문에 사다리를 이용하여 출입하 는 현문식으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진입로 상면과 문지 바다과는 60∼70cm 고저 창이가 있기 때 문에 현문으로 추정되며 이곳을 출입하기 위해서는 사다리나 별도이 출입시설이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에 대해서는 현재 조사가 진행 중이다. 할석+점토층의 두께는 문지 통로부에 인접한 부분이 가 장 두껍고 여기에서 멀어질수록 얇아지고 있는데, 북쪽보다는 남쪽으 로의 경사가 완만한 것으로 보아 진입로는 남쪽으로 성벽을 끼고 개설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문지 외부에서 북쪽과 동쪽이 급경사로 막혀 있는 반면에 남쪽으로는 능선을 따라서 완만하게 내려갈 수 있는 지형 적 조건과도 일치된다. 따라서 동문지는 현재 구읍리 방면에서 출입하 는 통로였던 것을 추정된다. 동문지는 초축시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기 어렵다. 이는 두 가지 이유 에서이다. 첫째, 동문지 등성시설과 문지 통로부 사이에서 초축시의 내벽이 노 출되었기 때문이다. 이 내벽은 기단열만 남아 있고 그 위로는 동문을 시설하면서 파괴되었다. 내벽 기단 위로는 점토와 잡석을 다져서 문지 바닥이 형성하였고, 이 바닥을 구성한 토층은 등성시설 제일 하단 밑으 로 연결되어 있었다. 여기에서는 신라 토기편과 기와편 등이 출토되었 다. 둘째, 문지 남쪽 측벽과 이와 연결된 내벽은 문지 바닥 위에 축조되었 는데 초축 내벽 보다 약 30cm 정도 돌출되어 있다. 이는 초축 내벽과 문지의 측벽이 같은 시기에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근거 가 된다. 따라서 동문은 초축벽을 허물고 그 위에 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 이다. 초축 성벽은 백제가 축조한 것이 분명하다. 내벽 기단석 하부에 서(기저부)는 신라 토기편이나 기와편이 한 점도 출토되지 않았고, 백 제토기만 출토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문지 바닥석부터 그 상면에 서는 신라 유물이 집중적으로 출토되고 있다. 이는 외벽 기저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문지 바닥과 연결된 외벽 토층과 그 위에서만 신라 토기 편과 기와편이 출토될 뿐 그 아래에서는 백제토기만 출토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을 고려할 때, 초축벽은 백제가 축조하였고 동문은 신라에 서 축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축조시기는 언제이고 어떠한 변화과정을 거쳐서 언제쯤 폐 쇄되었을까? 이는 동문지 토층, 구조, 출토 유물 등을 통하여 대략적인 추정이 가능하다. 먼저 동문지는 한차례 이상 개축되었다. 그 근거가 되는 것은 북쪽 측 벽과 배수시설이다. 북쪽 측벽은 2차례에 걸쳐서 축조되었다. 1차 벽 은 2차 벽 60cm 안쪽에서 출토되었다. 1차벽은 내벽 쪽 1.5m 정도만 비 교적 단을 이루고 있다. 중앙부와 외벽 쪽은 측벽으로 보기 어려울 정 도로 엉성하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중앙부는 외벽 쪽으로 쏠리면 서 붕괴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반면에 외벽 쪽은 성벽 뒤채움 처럼 되 어 있다. 외벽 쪽도 원래 붕괴된 상태는 중앙부와 같았을 것이지만, 문 지를 폐쇄한 후에 외벽을 축조하는 과정에서 뒤채움으로 개축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 같은 1차 벽의 상태로 보아 2차 벽은 1차 벽이 붕 괴된 후 약 60cm 앞으로 내어서 개축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등 성시설이 2차 벽과 연결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2차 벽과 등성시설은 동 시에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배수로 역시 2차에 걸쳐서 축조되었다. 2차 배수로는 1차 배수로의 뚜 껑돌을 바닥석으로 삼아서 축조하였다. 따라서 바닥 역시 두 번에 걸 쳐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모두 할석+적갈색점토를 이용하여 바닥을 조성하였기 때문에 1차 바닥과 2차 바닥을 구분하기 는 어렵다. 배수로와 관련하여 대략적인 짐작만 가능하다. 이 상에서 문지는 모두 2차에 걸쳐서 축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차 문지의 축조시기는 상한시기가 7세기로 추정된다. 이는 동문지에 서 출토된 토기 중 가장 올라가는 토기가 7세기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또한 등성시설 하부와 측면에 와적된 기와도 역시 중심연대가 7세기로 5차 발굴조사시 1차 건물지(7세기)와 2차 건물지(7세기 후)와 관련되 어 해석된 것들이다. 또한 이 기와들은 반월산성에서 출토되는 기와 가 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속하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2차 문지는 대체적 으로 8세기경으로 추정하여 볼 수 있을 것이다. 문지 주변에서 출토된 인화문 토기가 이와 관련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동문지가 폐쇄된 시기는 9세기로 추정된다. 이는 문지를 폐쇄한 와적층의 기와가 통일신라시대의 것들이고 여기에는 9세기 신 라토기편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2. 성벽 그 동안 5차에 걸친 반월산성 발굴조사 과정에서 백제 토기는 끊임없 이 출토되었다. 그러나 이와 관련된 유구나 안정된 토층에서 출토되지 않아서 반월산성이 초축국을 백제로 보는데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 다. 그러나 이번 6차 발굴조사에서는 문지 내·외벽 기저부에서 안정된 토층이 확인되고 여기에서 백제토기가 출토되어 이 성벽을 백제가 축 조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여기에서는 이를 바탕으로 각 시기별 성벽 축조의 특징에 대하여 고찰하여 보겠다. 토층 조사 결과 Ⅰ지구와 Ⅴ지구의 성벽은 최소한 3번에 걸쳐서 축조 된 것으로 보인다. 이를 1차 성벽, 2차 성벽, 3차 성벽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여기에서는 1차 성벽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2차 성벽과 3 차 성벽의 경우에는 모두 붕괴되어 뒤채움만 남아 있고 기단부 및 기저 부는 1차 성벽을 그대로 이용하였기 때문이다. 1차 성벽은 초축 성벽으로 백제에 의하여 축조된 것이다. Ⅰ지구는 협 축으로 축조되었고 Ⅴ지구는 편축으로 축조되었다. Ⅰ지구는 'V'형 계 곡이 형성된 곳이기 때문에 성벽의 강화를위하여 협축한 것으로 보이 고, Ⅴ지구는 기저 암반이 성 외부로 급경사를 이루는 곳이기 때문에 편축식으로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기저부는 Ⅰ지구나 Ⅴ지구 모두 암반층까지 제토하였다. Ⅴ지구의 경 우 암반층을 2단으로 삭토하였는데 이같은 방식은 설봉산성과 죽주산 성에서도 확인되었다. 이는 성벽의 하중을 분산하여 뒤채움이 아래로 미끌어져 내려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로 생각된다. 기단석은 하 단 평탄면 위에 놓여지는데 기단석을 놓기 위하여 암반 위로 점토+모 래 다짐을 하였다. Ⅰ지구는 계곡부이기 때문에 거의 2m 정도 점토 다 짐을 하였지만 Ⅴ지구는 암반층 상면에 약간의 점토다짐을 하여 기단 석이 밀려나가는 것을 방지하였다. 기저부 점토 다짐층에서는 목탄띠 가 보이고 있는데 이는 점토의 습기를 제거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기단석은 그 위의 면석보다 약 5cm 정도 앞으로 돌출시키고 그 위로 는 거의 수직에 가깝게 성벽을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기단석을 포함하여 2∼3정도 기단석 하부의 토층과 동일한 점토로 매몰하였다. 이 같이 점토로 기단석을 감싸듯 보강하는 방식은 설봉산성과 죽주산 성에서도 확인되었다. 외벽의 축조 방식은 성벽이 모두 붕괴되어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동문지 외벽의 경우 기단석을 포함하여 3단 정도는 편마암 할석을 다듬 지 않고 바른면을 앞으로 놓아 축조하였기 때문에 단이 고르지 못하 다. 내벽의 경우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4단 이상에서는 사각추 형태 의 잘 치석된 화강암 면석이 보이고 있으나 4단 이상은 개축된 흔적이 보여 초축시의 성벽인지 의심스럽다. 1차 성벽의 가장 특징적인 면은 뒷채움 방식에 있다. 특히 Ⅴ지구 편 축식 성벽에서 백제 특유의 뒤채움 방식을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신 라 성벽의 경우 석성의 뒷채움은 모두 할석을 이용하고 있다. 이와 달 리 반월산성 백제 성벽은 뒷채움에 점토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 다. 즉 2단으로 삭토한 암반면을 기준으로 보면 하단까지는 돌을 이용 하여 뒤채움하지만 상단과 상하단 사이의 경사면에는 점토를 이용하 여 뒷채움하였다. 이 같은 방식은 역시 백제가 초축한 설봉산성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마치 석촌동 백제 적석총에서 내부를 점토로 축조하 고 외부에 돌을 쌓는 방식을 연상하게 한다. 이 같은 축조 방식은 우선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하는 과정에서 발생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기존의 토성 외벽을 삭토하고 석축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백제의 토성이 정연한 판축으로 축조된 데 반하여 설봉산성이나 반월산성의 성벽 뒷채움은 점토 다짐이기는 하지만 판축은 아니다. 때문에 토성에서 석성으로 개축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기 어려울 것 같다. 그렇다면 토성 축조 방식과 석성 축조 방식을 결합한 과도기적인 축조 방식으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있 다. 또한 기능적인 면에서는 뒷채움이 아래로 미끌어져 내려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효과도 생각하여 볼 수 있다. 앞으로 이 같은 축조 방식 이 한성 백제시대의 석성 축조 방식의 특징으로 볼 수 있을지는 자료 가 좀 더 축조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신라 성벽에서는 보 이지 않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백제 성벽의 특징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 다. 한편, 2차 성벽은 신라 성벽으로 Ⅰ지구는 문지 내벽에 보이고 있지 만 별다른 특징은 없다. Ⅴ지구는 1차 성벽 상면에서 앞으로 돌출하여 1단 정도가 남아 있다. 그러나 이것도 성벽 붕괴시 앞으로 밀려 내려온 것으로 보여 원래 모습을 추정하기 어렵다. 3차 성벽은 조선시대 성벽이다. 대형석재로 뒷심을 기울여 경사지게 쌓아 올라간 것, 심석이 없고 뒷채움이 부실한 것 등 조선시대 성벽의 특징이 잘 남아 있다. 3. 출토유물 동문지와 성벽주변 트렌치, 성내부 트렌치에서 다량의 유물이 출토되 었다. 기와류는 막새기와나 명문기와는 한점도 출토되지 않았지만, 다 량의 평기와가 와적층에서 출토되었다. 출토된 평기와에 대하여 현재 까지 분류 작업중이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기존 5차 발 굴에서 나타난 기와의 양상과 유사하다. 대체로 시문된 문양은 종선 문, 사선문 등의 선문계열의 신라시대 기와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출토된 토기는 신라토기와 백제토기가 크게 구분된다. 하지만 대부 분 파편상태이므로 일부 복원작업이 필요하다. 동문지 Ⅰ확 트렌치와 Ⅱ확 트렌치에서는 백제토기 편이 출토되고 있다. 이러한 출토양상은 기존의 조사에서 지표에서 수습되었던 것과는 달리 확실한 층위를 갖 고 있어 주목된다. 토광에서는 심발형토기편, 장란형토기편과 각종 승 문이 타날된 동체편이 출토되었으며, 동문지 Ⅰ 확 트렌치에서는 각종 승문이 시문된 연·경질토기편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Ⅱ지구 확장트렌 치에서도 회백색 원저발과 함께 승문토기편이 출토되었다. 이와 같은 출토 예를 통해 백제와 반월산성의 관계를 접근하는 확실한 자료가 제 공되었다. 출토된 백제토기의 편년은 대략 4세기 중·후반경으로 추정 이 가능하다. 이번 조사에서 출토된 백제토기는 지난 발굴조사에서 출 토되었던 배면을 대칼로 정리한 원추형 경질고배, 장란형토기편, 심발 형토기편, 원저발과 각종 연질토기편 등과도 양식적으로 비슷하다. 그리고 반월산성에서 출토된 백제토기는 최근 본 연구소에서 조사하 였던 소홀읍 고모리산성에서 출토된 백제토기와는 시기차를 보이고 있 다. 고모리산성의 백제토기는 3세기전반에서 5세기초에 걸치고 있는 데, 특히 3세기후반부터 4세기전반에 해당하는 유물이 다수를 점하고 있다. 그에 비해 반월산성에서 출토된 백제토기는 4세기 중·후반이후 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고모리산성에서 백제토기가 점차 소멸되어가 는 것과 반월산성의 백제토기가 출현하는 것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신라토기는 고신라기로 볼 수 있는 기형은 거의 출토되지 않았으며, 거의 통일신라기에 속하는 유물이 다수를 점하고 있다. 이 시기로 추정 이 가능한 것은 단각고배, 완, 침선문이 시문된 뚜껑 등이다. 고배는 대 부분 굽이 매우 낮거나 배신이 얕은 양식이며, 또는 투창이 작게 뚫려 있다. 그리고 7세기 유적에서 나타나는 대부완도 출토되고 있다. 또한 각종 인화문이 시문된 회청색 경질 뚜껑편과 경부에 음각파상문이 시 문되거나 돌대가 돌려진 호편이 출토되고 있다. 이를 통해 반월산성에 서 출토되는 신라토기의 편년은 대체로 7세기경부터 출현하여 9세기까 지 계속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4. 초축 시기의 검토 이번 6차 발굴조사에서 백제성벽이 출토되었기 때문에 반월산성을 처 음으로 축조한 국가는 백제임이 확실하다. 그 동안 6차에 걸친 발굴조 사에서 다수의 백제 토기가 출토된 의문을 해결할 수 있었다. 그렇다 면 반월산성이 처음으로 축조된 시기는 언제일까? 이 문제는 그 동안 출토된 백제토기와 이번 발굴조사에서 성벽 기저부에서 출토된 백제토 기를 통하여 대략적인 짐작이 가능하다. 먼저 성벽 기저부에서 출토된 토기는 완형이 없고 모두 파편으로 축 조되었기 때문에 편년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다. 현재까지 연구된 백제 토기의 연구 성과에 비추어 볼 때, 반월산성 출토 백제토기는 상한이 4 세기 후반에서 하한은 5세기에 걸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이번 조 사에서 출토된 백제토기는 5차 발굴조사에서 출토되었던 비교적 기형 복원이 가능한 백제토기 중 배면을 대칼로 정리한 원추형 경질고배, 장 란형토기편, 심발형토기편, 원저발과 각종 연질토기편 등과 양식적으 로 비슷하다. 이들은 동벽 상단 건물지 하부에서 출토된 백제 토기로 4 세기 후반에서 5세기에 걸치는 것으로 편년되었다. 성벽 기저부에서 출 토된 토기도 이와 비슷한 시기로 보는 데 무리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반월산성의 축조시기는 4세기 중·후반에서 5세기 초반에 걸치 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볼 경우 인근의 고모리산성 출토 백제토기 와 비교되어 포천 지역에 백제 세력의 변화가 주목된다. 고모리산성의 중심연대는 3세기 후반에서 4세기에 걸치고 있다. 수습된 유물로 보아 5세기초가 되면 고모리산성은 서서히 폐성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 국 4세기 후반 또는 5세기 초반에 반월산성이 축조되면서 고모리산성 의 기능이 약화되고 대신에 반월산성이 포전 지역 중심산성으로 가능 하게 되었다 볼 수 있는 것이다. 4세기 후반은 백제가 고구려와의 전쟁 에서 연승을 거두며 황해도 일대에 진출하였던 시기이다. 한성백제 초 기에 자주 백제으 변경지대에 출모하였던 말갈세력의 활동도 정지되 는 시기이다. 따라서 백제가 원산방면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인 반월 산성을 축조하여 북방 진출의 교두보는 물론 이 지역을 지배하기 위한 체제를 정비하였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또한 4세기말부터 전세가 역전되어 고구려가 백제를 압박하여 왔고 이러한 상태가 475년까지 지속되었다. 더구나 포천 지역은 고구려군이 한성으로 침입해오는 것을 방어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에 백제가 반월산성을 축조하여 이에 대비하였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어떠한 경우든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반 사이에 백제가 반월산성 을 석성으로 축조할 개연성은 충분하다. 이후 고구려와 신라가 한강 유 역에 진출한 이후에도 포천 지역 중심산성으로 반월산성이 운영되었음 은 출토 유물을 보아서도 자명하다. 반월산성이 백제가 초축한 것으로 확인된 이상, 이제 한강 이북 지역 에서도 근초고왕 이후 백제의 석성 축조가 활발하게 전개되었을 가능 성이 높아졌다. 이것은 기존에 백제 토기가 출토되었던 한강 유역 석성 들에 대해서 백제가 초축하였을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이상에서 6차 발굴의 성과를 몇 가지로 나누어 고찰하여 보았다. 이 자료집은 아직 조사 중에 작성된 것인 만큼 부족한 면도 있다. 이점은 앞으로 보고서를 작성하기까지 좀더 신중한 검토를 통하여 보완해 나 갈 것이다. 한편 이번 조사의 목적 가운데 내성의 존재여부를 확인하는 것도 있 었다. 이를 위하여 여러군데 탐색 트렌치를 설치하여 조사하였지만 내 성이 존재했다는 근거는 발견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내성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결론도 내릴 수 없다. 5차 발굴조사에서 애기당지 남쪽에서 내성으로 추정되는 성벽이 분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성벽은 외성보 다 먼저 만들어졌던 성벽이었다. 이번 조사 지역이 애기당지 남서쪽 경 사면에 한정되었던 만큼 내성의 존재 여부를 가름하기에는 한계가 있 다. 이 문제는 앞으로 2단계 발굴이 시작된다면 제일 먼저 검토해야할 것이다.
twitter facebook me2day 요즘
617개(25/31페이지)
 
현장소식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수
등록일
137 대구 욱수동·경산 옥산동유적 현장설명회 (8/28) 운영자 801 2001.08.29
136 논산시 원북리 현장설명회 (8/29) 운영자 778 2001.08.29
135 남산성 현장설명회 (8/28) 운영자 787 2001.08.29
134 논산 원북리유적 발굴조사 현장설명회 개최(8/29) 운영자 757 2001.08.29
133 칠곡 창평리유적 발굴조사 운영자 1981 2001.08.28
132 대전 월평산성 운영자 2098 2001.08.23
131 포항시 남구 원동 토지구획정리 제 3지구내 문화유적 발굴조사-2차(IV,... 운영자 2299 2001.08.17
>> 반월산성 운영자 2853 2001.08.17
129 포천 반월산성 현장설명회(8/13) 운영자 804 2001.08.17
128 성주 심원사지 시굴조사 운영자 1879 2001.08.16
127 부여능산리절터 현장 설명회 (8/7) 운영자 857 2001.08.06
126 능산리사지 유적조사결과 설명회 국립부여박물관 1642 2001.08.06
125 기장 효암이주단지내 매장문화재 발굴조사 운영자 1839 2001.08.01
124 고성 내산리고분군 발굴조사 5차 운영자 2057 2001.07.27
123 고성 내산리고분군 현장 설명회 (7/25) 운영자 799 2001.07.27
122 울산 성안동유적(울산광역시 경찰청사 예정부지) 운영자 2053 2001.07.24
121 상주-낙동간 도로 확·포장 공사구간 내 문화유적 운영자 2565 2001.07.10
120 상주-낙동간 도로 확·포장 공사구간 내 유적 현장설명회 (7/13) 운영자 815 2001.07.10
119 대구 상동 우방팔레스 건설공사부지내 문화유적 발굴조사 운영자 2598 2001.07.06
118 무안공항 건설지역 문화유적 발굴조사 운영자 2996 2001.0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