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로고

현장소식

포천 자작리유적

2001-05-31 21:23:00
조회 3295
포천 자작리유적 긴급발굴조사 -지도위원회의 자료- 2001. 4. 2 경기도 박물관 Ⅰ. 머리말 경기도박물관에서는 매년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 및 지역개별로 인해 훼손되어 가는 문화유적에 대한 지표조사와 더불어 긴급발굴조사를 실 시하고 있다. 포천 자작리유적은 단국대학교 학술조사단의 포천군 일 대에 대한 광역 지표조사 과정에서 처음 알려진 유적으로(단국대학교 사학과·포천군 1998) 유적의 중요성에 비추어 학계에 출토유물에 대한 자세한 소개가 이루어진 바 있다(한창균 외 1999). 그 후 경기도박물관 에서는 3대하천 광역 지표조사의 일환으로 포천 자작리유적에 대한 확 인조사를 실시하게 되었는데, 이 때 사료 저장구덩이 단면에 노출된 주 거지를 확인함과 더불어 주변에서 다량의 유물들을 채집할 수 있었다. 채집된 유물로 보았을 때, 원삼국시대의 주거지와 한성백제시대의 주 거지가 밀집된 마을유적으로 판단되었는데, 특히 기벽이 두꺼운 대옹 편들이 채집되어 파주 주월리유적과 같은 거점 취락이 형성되어 있었 던 것으로 추측되었다. 이에 경기도박물관에서는 멸실 위기에 처해 있는 문화유적을 보호하 고 경기북부지역의 역사시대 문화양상을 파악하기 위한 기초 자료를 확보할 목적으로 긴급 발굴조사를 계획하게 되었다. 이번 조사 지역의 면적은 사료 저장구덩이 주변지역에 한하여 좁은 면적이었지만, 한성 백제시대 주거지 2기와 방형 내지 장방형의 도랑(溝)이 돌려진 굴립주 건물지 1기, 기타 구상유구 및 소형유구를 조사할 수 있었다. 이외에도 원삼국시대 및 한성백제시대의 주거지 3기가 중복된 채로 발견되었지 만, 발굴 기간 및 조사 경비의 어려움이 있어 후년에 조사를 실시하기 로 하였다. 한편 여기에서 출토된 유물은 동진대 중국청자편을 비롯하여 기대, 파 수부주구형토기, 심발형토기, 토기 뚜껑, 기와, 꺽쇠, 철정, 철촉 등 다 량의 유물들이 출토되어 자작리유적의 편년적 위치와 더불어 성격을 파악하는데 있어 좋은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조사는 2000년 12월부터 짧은 기간동안 실시할 예정이었으나, 예상보 다 확인된 유구의 수가 많을 뿐만 아니라 주거지의 규모가 커서 불가피 하게 조사 기간이 연장되었다. 본 조사단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 조 사 단 장 : 이인숙(경기도박물관장) * 지 도 위 원 : 조유전(국립문화재연구소장) 최병현(숭실대학교 사학과 교수) 이남규(한신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 책임조사원 :김용철(경기도박물관 학예연구실장) * 조 사 원 : 최근성(경기도박물관 민속미술부장) 이소희(경기도박물관 학예연구사) 송만영( 〃 〃 ) 이헌재( 〃 〃 ) * 조사보조원 : 박경신(숭실대 사학과 대학원 수료) 김경환(명지대 문화재보존관리과 대학원 과정) 김종헌(서울시립대 국사학과 대학원 과정) Ⅱ. 유적의 위치 및 조사 전 상황 1. 유적의 위치 및 고고·역사적 환경 포천 자작리유적은 행정구역상 경기도 포천군 포천읍 자작리 251-2번 지 일대에 위치한다. 의정부에서 43번 국도를 타고 포천읍 방향으로 가 다가 보면 파발막 부근에 우측으로 육군항공단이 위치하고 있으며, 도 로 맞은 편으로는 포천군 향토유적 3호로 지정되어 있는 자작리 지석묘 가 위치하고 있다. 유적은 지석묘 바로 남쪽 20m 지점의 득새들이라 불 리는 넓은 경작지에 펼쳐져 있다 지표채집된 토기편의 분포범위로 보아 유적의 분포 범위는 지번상 자 작리 250-3전, 250-8전, 251-2전, 377-2목, 377-1전, 376-1전, 377-1전, 376전, 373전에 걸쳐 있으며, 전체 면적은 ㎡ 가량이다. 자작리가 위치하고 있는 지역의 서쪽으로는 왕방산(737.2m), 해룡산 (660.7m) 등의 산악지형이, 그리고 동쪽으로도 천주산(424.4m), 국사봉 (546.9m), 죽엽산(610m)의 산악지형이 각각 남북 방향으로 길게 이어 져 있어 분지 지형을 이루는데, 이러한 지형의 낮은 부분을 따라 포천 천이 남에서 북으로 흐르고 있다. 현재 의정부와 포천을 연결하는 43 번 국도가 바로 포천천과 평행하게 남북 방향으로 길게 연결되어 있었 던 것과 같이 과거에도 주민의 이동이 빈번했던 주요 교통로였던 것으 로 생각된다. 따라서 포천천 주변으로 선사·역사시대의 문화유적들이 다수 분포하 고 있는데, 청동기시대 취락은 설운리, 자작리, 거사리, 양문리 청동기 시대 유물산포지 등과 같이 주로 분지 서쪽의 산악지형에서 포천천 방 향으로 뻗어내린 능선의 말단부 내지 하천변의 충적대지상에 분포하 고 있다. 또한 원삼국시대 취락은 양문리, 자작리 원삼국시대 유물산포 지 등과 같이 포천천의 하천변에 위치하고 있다. 2. 조사 전 상황 및 유적 층위 자작리유적은 포천천 서쪽의 해발 102m 충적대지상에 위치하고 있다. 포천천 방향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유적 주변으로는 주로 밭 농사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43번 국도를 넘어서면 하천변 주변으로 논 농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 유적에는 대부분 밭작물이 경작되거나, 소 사료용 호밀이 경작되고 있으며 또한 조사 지역 주변으로는 민가와 더불어 牛舍가 위치하고 있어 유적의 일부가 훼손되었을 가능성이 높 다. 특히 이번 조사 구역의 주변에는 소 사료용 저장구덩이가 3개소 확 인되는데, 그 크기는 대략 길이 10m, 폭 3m, 깊이 2m 가량이다. 이러한 저장 구덩이의 단면에서 다수의 유구들이 확인되었는데, 유구 의 중복상태와 밀집도로 보았을 때, 많은 주거지들이 밀집되어 분포했 던 것으로 보인다. 단면에서 확인된 층위 양상을 보면(사진 2) 위로부 터 지표층(Ⅰ층), 흑갈색 사질토층(Ⅱ층), 황갈색 사질점토층(Ⅲ층) 등 으로 비교적 단순한 층위 양상을 보이는데, 유구의 어깨선은 모두 지표 층(30∼40㎝) 아래에서 확인되고 있다. 따라서 본래 원삼국시대 내지 한성백제시대의 문화층이 형성되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되지만, 경작 과정에서 문화층과 더불어 구지표면이 일부 파괴되었을 가능성이 높 다. Ⅲ. 조사 내용 조사 지역은 43번 국도에서 자작리 마을로 들어가는 소로 북편의 경작 지이다. 소로 북편에는 사료 저장구덩이 3개소가 소로를 따라 설치되 어 있으며, 그 북쪽으로는 넓은 지역에 걸쳐 호밀이 경작되고 있다. 조 사 면적은 234평 가량으로 여기에서 주거지 5기, 굴립주 건물지 1기, 다 수의 기둥구멍, 구상유구, 소형유구 등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이 가운 데 조사지역 밖으로 연장되는 소형유구와 중복된 3기의 주거지는 조사 예산 및 농번기로 인하여 내부조사를 실시하지 못하였는데, 이는 2차 발굴조사를 계획하여 조사를 완료할 예정이다. 따라서 내부조사가 완 료된 유구는 육각형 주거지 1기(1호), 呂자형의 육각형 주거지 1기(2 호)와 더불어 굴립주 건물지 1기, 기타 구상유구 및 소형유구 등이다. 유구의 분포를 보면, 조사 지역의 동쪽으로는 주로 주거지들이 입지하 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바로 인접하여 굴립주 건물지와 구상유구, 소형 유구들이 분포하고 있어 공간 배치에 있어 일정한 정형성이 간취된다. 유구간의 중복관계는 굴립주 건물지와 구상유구 그리고 소형유구 간 에 일부 확인되고 있으며, 주거지에 있어서는 3기의 주거지가 중복되 어 있다. 특히 주거지의 평면형태나 출토유물로 보았을 때, 원삼국시대 의 凸자형 주거지를 한성백제시대의 呂자형의 육각형주거지가 파괴하 고 설치된 것으로 판단된다. 1. 유구 1) 주거지(사진3) 남북 길이가 4.55m인 소형의 육각형 주거지로 잔존하는 최대 깊이는 42cm이다. 출입구시설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이 시기 다른 주거지의 출 입구 시설로 볼 때 남동쪽 내지 남서쪽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바닥 은 황색의 모래층을 그대로 사용하였으나, 사용으로 인하여 약간 다져 있다. 내부시설로는 주거지 벽면을 따라 25∼40㎝ 크기의 기둥구멍이 8 개소 확인되었을 뿐, 특별한 시설은 확인되지 않았다. 한편 주거지의 북쪽 벽가 쪽으로는 황색 점토부가 암갈색 사질부식토층 위에 퇴적되어 있으며, 점토부 위에 한 개체의 대옹편들이 분포되어 있어 주목된다. 위치로 보 아 부뚜막 시설이 무너져 내린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나, 자비용기가 아닌 대옹이 위치하고 있는 점과 점토부의 층위적인 상태를 염두에 둘 때, 분명치 않다. 화재의 흔적이 없는 주거지 내부에서는 소량의 유물 이 출토되었는데, 점토부 위의 대옹편을 제외하면, 복원이 가능한 토기 편들은 거의 없다. 한편 주거지 바닥 부근의 내부퇴적층에서 동진대 중 국청자편과 이형토제품, 그리고 소찰편이 출토되었다. 2)사진 4 대형의 呂자형 주거지로 장축은 남-북향이다. 규모는 전체 길이 23.6m 이고 큰 방의 동서 폭은 12∼13.2m 가량으로 국내에서 조사된 수혈주 거지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다. 작은 방은 주거지 내부로 경사져 있으 며, 출입구를 2중으로 마련한 것으로 판단된다. 작은 방의 평면형태는 사다리꼴 모양으로 1차 출입부가 7.1m, 2차 출입부는 5.4m이며 길이는 5m 가량이다. 작은 방과 큰 방의 연결부분은 폭 3.5∼4.1m로 전반적으 로 큰 방으로 경사져 내려간다. 그러나 큰 방으로 들어가는 통로는 이 보다 좁도록 만들어졌는데, 통로의 양쪽 벽체 라인을 보면 폭은 1.6m 내외이고 길이는 2.3m 내외이다. 그리고 굴토된 벽면과 통로의 벽체 사 이에는 인위적으로 흙을 보강시킨 흔적이 확인되었다. 한편 통로 내부 에는 탄화목재들이 두텁게 노출되었으며, 그 상면에 벽체편들이 퇴적 되어 있어 이러한 구조물들이 벽체 구조 내지 상부 구조와 관련된 것 이 아닌가 판단된다. 벽체편 주변에서 길이 15cm 내외의 철정이 출토 되었는데 목재의 결구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주거지의 평면형태는 6각형으로 북쪽이 약간 넓은 형태이다. 바닥은 모 래층 위에 황색 점토를 깔고 단단하게 다졌다. 출입구 반대쪽에는 약 간 동쪽으로 치우쳐 부뚜막시설이 노출되었다(사진 5). 부뚜막은 전체 적으로 점토를 쌓아 만들었지만, 아궁이 부분은 할석 바깥쪽으로 점토 를 발랐다. 연도부의 평면형태는 북쪽이 약간 좁은 사다리꼴이며, 북쪽 으로 갈수록 전체적으로 연도부가 올라가고 있다. 그리고 파주 주월리 유적의 97-6호 주거지에서 발견된 부뚜막시설과 같이 연도 중앙 부분 을 따라 긴 할석을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놓았는데, 이는 연도 상부의 벽체를 지지하기 위한 기능을 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아궁이 부근의 긴 할석은 주변에 토기편들이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점으로 미 루어 지각의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연도 끝 부분에는 하천석을 쌓고 바깥쪽으로 황색 점토를 발라 굴뚝 시설을 마련하였다. (3) 3·4·5호 주거지 1호 주거지와 2호 주거지 사이에서 3기의 주거지가 중복된 채로 발견되 었으나, 내부조사는 실시하지 않았다. 이들 주거지들은 2호 주거지와 같이 대체로 남쪽에 출입구를 마련한 凸자형(3·4호) 내지 呂자형 주거 지(5호)이다. 이 가운데 3호 주거지는 2호 주거지와 근거리에 위치해 있어 서로 시기차가 있는 것으로 판단되는데, 특히 주거지 상부에서는 중도식무문토기편이 출토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주거지 평면형태상 원 삼국시대의 주거지로 추정된다. 2) 굴립주 건물지(사진 5) 1호 주거지의 서쪽에 위치한다. 북쪽 부분이 조사되지 않아 전체적인 규모 및 평면형태는 알 수 없지만, 기둥구멍은 동서 3열, 남북 3열이 확 인되었는데, 북쪽으로 더욱 더 연장될 가능성이 크다. 기둥구멍의 간격 은 대개 2.6m를 유지하고 있으며, 주변에 보조 기둥구멍이 위치한다. 기둥구멍의 직경은 35∼65㎝로 다양하며, 원형의 형태가 가장 많다. 구 상유구와 중복되어 있는데, 선후관계는 밝혀내지 못했다. 그러나 시기 차는 크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3) 기타 유구 (1) 소형유구 모두 3기가 조사되었는데, 전체적인 크기 및 깊이, 평면형태에 있어 차 이가 있다. 1호 소형유구는 1호 주거지 북동쪽 약 0.4m 지점에 위치하 고 있다. 상부의 평면형태는 원형에 가까우나 바닥은 말각방형에 가깝 다. 규모는 상부 직경이 2.3∼2.4m이며 바닥의 폭은 동서 0.95m, 남북 1.1m 가량이다. 잔존 깊이는 1m이다. 바닥에는 소토와 목탄이 가득차 있으며 내부퇴적층에서 소량의 토기편이 출토되었는데, 한성백제기의 유물로 생각된다. 2호 소형유구는 굴립주 건물지 남서쪽에 위치한다. 구상유구와 중복되 어 있는데, 구상유구가 2호 소형유구를 파괴하고 만들어졌다. 평면 원 형이며 내부퇴적층에서 소량의 토기편만이 출토되었다. 3호 소형유구 는 2호 소형유구 남쪽에 인접하여 위치하고 있다. 평면 형태는 말각장 방형에 가까우며 동서 1.8m, 남북 1.5m, 깊이 0.4m이다. 남쪽 바닥면에 서 회백색 토기 한 점이 주저앉은 채 출토되었다. (2) 구상유구 굴립주 건물지의 서쪽에서 남북 방향으로 설치된 구상유구 3개소가 확 인 조사되었으며, 굴립주 건물지와 일부 중복되게 "ㄷ"자형으로 돌아가 는 구상유구가 조사되었다. 굴립주 건물지 외곽으로 돌아가는 "ㄷ"자형 의 溝는 상부 최대 폭이 1.4m(최소 0.9m)로 깊이는 가장 깊은 곳이 0.9m 가량이나, 이보다는 좀더 깊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북쪽이 조사되지 않은 상태라 전체적인 규모 및 평면 형태는 알 수 없고 또한 이들 溝들이 모두 연결되어 있지 않았지만, 배치로 보았을 때, 동일 시 기의 것으로 생각된다. 유물은 溝 내부에서 모두 기와편들이 출토되었 으며, 이외에도 심발형토기, 파수편, 토기 뚜겅 등과 함께 철도자편이 출토되었는데, 특히 여기에서 출토된 토기 뚜껑은 한 개체분이 동쪽의 溝와 서쪽의 溝에서 각기 출토되었다. 溝의 단면은 U자형으로 물이 흐 른 흔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2. 출토유물 이번 조사를 통해 가장 많이 출토된 유물은 토기류이다. 회청색 경질토 기의 비중이 가장 높으며, 타날문토기편 및 중도식무문토기편도 출토 되었다. 기종으로는 자비용기로 사용된 심발형토기의 개체수가 많았으 며, 대옹, 뚜껑(사진 7), 동이, 시루편 등 다양한 기종의 토기가 출토되 었다. 특히 주거지에서는 발견된 예가 적은 통형기대가 완형으로 발견 된 점도 주목된다 기와류(사진 8)는 모두 정선된 점토로 만든 것으로 색조는 대부분 적 갈색을 띤다. 두께는 0.7cm 내외로 매우 얇은 편이며, 외곽부분은 와도 로 1회에서 많게는 4회 이상 깎아 정성을 들여 만들었던 흔적이 확인된 다. 외면에는 주로 격자문 및 사선문이 타날되어 있는데 격자문의 경 우 박자의 크기는 대략 가로 세로 5cm 내외이다. 내부에는 전혀 포목흔 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특징인데, 지두로 정면한 흔적이 관찰된다. 철기류(사진 10)는 소량 발견되었다. 1호 주거지에서는 소찰편이 출토 되었으며, 목재 결구를 위한 철정류 및 꺾쇠가 2호 주거지에서 출토되 었다. 또한 도자, 철촉과 함께 용도미상의 철편 등이 출토되었다. 이 외에도 동진대 중국청자편을 비롯하여 용도 미상의 토제품이 1호 주 거지에서 출토되었으며, 기타 뼈조각이 2호 주거지 내부와 구상유구에 서 출토되었다. Ⅳ. 포천 자작리유적의 편년과 성격 자작리유적에서 조사된 수혈주거지의 평면 형태는 呂자형의 출입구가 붙은 육각형주거지이다. 이러한 육각형주거지는 원삼국시대의 방형 내 지 장방형주거지에서 계승·발전한 것으로 대체로 4세기대 이후의 유적 인 몽촌토성, 풍납토성, 하남 미사리유적, 의정부 민락동유적에서 조사 된 바 있다. 이 시기의 주거지들은 대체로 겨울철의 북서풍의 영향을 막기 위하여 남동쪽 내지 남서쪽에 출입구를 2중으로 설치한 것이 특징 이며, 주거지 출입구 반대편에는 약간 동편하여 부뚜막이 설치되어 있 는데, 자작리유적의 육각형 주거지 역시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다. 한성백제시대의 출입구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지만, 이 가운데 呂자형 은 원삼국시대 이래의 전통 한성백제시대의 출입구는 여러 가지 형태 가 있지만, 이 가운데 呂자형은 원삼국시대 이래의 전통을 그대로 따 른 것으로 이와 같은 예는 서울대에서 조사한 미사리 B-2호 주거지, 몽 촌토성 88-2호 주거지, 파주 주월리 97-4호 주거지가 있다. 이러한 여 자형의 출입부는 원삼국시대 이래 평면형태상의 변화가 확인되는데, 명주 안인리 주거지, 미사리 한-1호 주거지, 횡성 둔내 주거지 등의 원 삼국시대 여자형 출입부는 방형 내지 장방형을 이루지만, 3세기 중반 대 이후의 한성백제시대 주거지의 출입부는 대체로 사다리꼴로 바뀌 는 변화를 보여준다. 즉 미사리 서-B-2호 주거지와 자작리 2호 주거지 가 그러한 예에 해당되는데, 1차 출입부가 2차 출입부보다 넓은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주거지의 평면형태만으로 보았을 때, 자작 리 1호, 2호 주거지의 연대는 대체로 4세기∼5세기 후반으로 크게 설정 할 수 있다. 한편 이와는 달리 내부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3호 주거지는 평면형 태상 凸자형의 출입부가 달린 장방형주거지인데, 출입부 반대편의 벽 면이 둥글게 처리되어 있으며, 주거지 상부에서 중도식무문토기편이 출토되고 있어 원삼국시대 중기 전반대∼중반대의 주거지로 추정된 다. 따라서 조사 지역 내의 주거지는 크게 2단계로 시기 구분이 가능하 다. 주거지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시기 파악이 가능한 유물은 많지 않지 만, 무엇보다도 2호 주거지 작은방에서 출토된 통형기대가 주목된다. 이 기대는 암회색 경질 소성으로 수발부는 비교적 깊은 편이며, 통부 에 2조의 단면 삼각형 돌대를 3개소에 돌리고 삼각형의 투창을 일직선 으로 뚫었다. 또한 각부는 넓게 내려가면서 다소 곡선을 이루는데, 각 부의 상부에도 역시 삼각 투창이 뚫려져 있다. 한성백제시대의 기대는 주로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에서만 출토되었는데, 자작리 2호 주거지 출 토의 기대와 비교할 만한 것이 없다. 다만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통형기 대 가운데 삼각형 투창 내지 장방형 투창이 뚫린 기대를 가장 늦은 시 기로 파악하고 있는 점에 비추어 5세기 늦은 시기의 기대가 아닌가 판 단된다. 1호 주거지에서 출토된 동진대 중국청자편 역시 작은 편이라 기종은 파 악하기 어렵지만, 상한 연대가 4세기 전반을 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주거지의 연대와 관련하여 참고할 수 있는 자료는 자작리 유적에서 채집된 목탄의 탄소 연대이다. 단국대학교 학술조사팀의 지 표조사 과정에서 채집된 목탄의 탄소 연대가 B.P.1615±60(AD 391∼ 535)인 점에 비추어 볼 때, 주거지의 구조나 출토유물을 통해 알 수 있 는 연대와 대략 일치하고 있다. 따라서 주거지의 구조와 출토유물 그리 고 탄소연대를 감안해 볼 때, 자작리 주거지의 연대는 5세기 무렵이 아 닌가 생각된다. 다음으로 자작리유적의 성격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자작리유적 에서 조사된 2호 주거지의 규모와 출토유물로 보았을 때, 한성백제시대 의 지방의 정치적 거점취락으로 생각된다. 먼저 2호 주거지의 규모는 길이 23.6m, 폭 13.2m 가량으로 이는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수혈주거지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이다. 주거지 내부에서, 특히 부뚜막 내부에 서 와편이 출토되어 주거지의 상부에는 기와를 얹었던 것으로 추정되 는데, 이와 같은 기와편이 구상유구 내부에서도 출토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그 주변에도 기와를 얹은 건물지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러한 기와집은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에서만 확인되고 있는 점을 염두 에 둘 때, 이에 버금가는 정치적 거점취락으로 판단된다. 또한 출토유 물 가운데 1호 주거지에서 출토된 동진대 중국청자편은 비록 완형의 형 태는 아니지만, 자작리유적의 위상을 파악하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동 진대 중국청자는 몽촌토성과 풍납토성, 석촌동고분군 이외에도 원주 법천리, 천안 화성리 등지의 고분에서 출토된 바 있다. 또한 앞에서 언 급한 2호 주거지 출토 기대 역시 일반 취락에서 출토된 예가 없으며, 몽 촌토성 및 풍납토성에서만 그 존재가 확인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포천 자작리유적은 주거지의 규모와 출토 유물로 보았을 때, 일반 취락과는 현격히 차이가 있다. 특히 기와를 얹 은 대형주거지와 통형기대, 그리고 동진대 중국청자 등의 존재로 보아 독자적 지배영역을 갖는 지방의 지배거점취락일 가능성이 높다. Ⅴ. 조사 성과 및 의의 이번 긴급발굴조사에서 얻은 성과는 다음과 같다. 먼저 포천 자작리유적은 원삼국시대에서 한성백제시대에 걸쳐 형성된 취락으로, 기와를 얹은 대형 주거지와 백제의 왕성에서만 출토되는 유 물의 존재로 볼 때, 한성백제시대의 지방의 지배거점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한성백제시대의 지방지배체제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 로 평가된다. 또한 지금까지 조사되었던 한성백제시대의 생활유적이 주로 일반 자연 취락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자작리유적의 조사는 거점 취락의 분포 정 형을 파악할 수 있는 획기적인 자료로 평가된다. 둘째로, 자작리유적은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를 거쳐 원삼국시 대, 한성백제시대에 이르는 장기 지속적인 복합유적으로 경기이북에 서 취락 유형의 변화를 통시적으로 파악하는데 있어 가장 표준적인 유 적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자작리유적이 입지하고 있는 포천천을 중심 으로 정밀지표조사와 더불어 체계적인 발굴조사가 실시되면, 경기북부 지역에 있어 정치체의 출현 및 성장 과정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단서 가 마련될 것으로 판단된다. 세째로, 화재에 의해 폐기된 대부분의 주거지 내부에서는 탄화목재들 이 양호한 상태로 노출되어 이 시기의 주거지 상부구조를 복원하는데 있어 좋은 자료가 될 것으로 판단된다.
twitter facebook me2day 요즘
617개(27/31페이지)
 
현장소식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수
등록일
97 「연천 호로고루성」유적 발굴조사 운영자 2340 2001.06.08
96 대구-부산간 고속도로 제7공구내 시굴조사(금천리,살내유적) 운영자 2339 2001.06.08
95 부여 궁남지(宮南池) 발굴조사 운영자 2320 2001.06.08
94 양주 관아지(楊洲 官衙址) 현장설명회(6/8) 운영자 750 2001.06.08
93 수도권광역 상수도 6단계 구간내 문화유적 현장설명회(6/5) 운영자 657 2001.06.08
92 대전 월평산성 현장설명회(6/4) 운영자 720 2001.06.08
91 구룡-부여간 도로공사 구간내 유적 현장설명회(6/1) 운영자 744 2001.06.08
90 용담댐 수몰지구내 문화유적 4차 발굴조사 및 지석묘 이전복원 지도 위원회... 운영자 2988 2001.06.05
89 용담댐 수몰지구내 문화유적 4차 발굴조사 및 지석묘 이전복원 지도 위원회... 운영자 2122 2001.06.05
88 용담댐 수몰지구내 문화유적 4차 발굴조사 및 지석묘 이전복원 운영자 2062 2001.06.05
87 하남시 교산동 건물지 제2차 발굴조사 운영자 2076 2001.06.05
86 國立慶州博物館 共同溝敷地 發掘調査 운영자 1931 2001.06.05
85 浦港 芝谷洞 포항테크노파크 造成豫定敷地 試掘 운영자 2135 2001.06.05
>> 포천 자작리유적 운영자 3296 2001.05.31
83 연천 호로고루성(瓠盧古壘城) 현장설명회 (5/25) 운영자 811 2001.05.28
82 부여 궁남지 현장설명회(5/17) 운영자 708 2001.05.28
81 오이도 패총 시굴조사 지도위원회(5/16) 운영자 692 2001.05.21
80 경주 황성동 강변로 개설구간내 유적 현장설명회(4/26) 운영자 707 2001.05.21
79 회암사지 현장설명회(4/26) 운영자 641 2001.05.21
78 포천 자작리 유적 현장설명회(4/2) 운영자 799 2001.0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