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로고

현장소식

연천 삼거리유적

2001-05-08 00:00:00
조회 2742
<연천 삼거리유적 긴급발굴조사> Ⅰ. 머리말 연천 삼거리유적은 지난 1996년도에 경기 북부지역에 대한 집중호우시 임진강의 범람으로 인하여 노출된 선사유적지로 이 지역의 향토사학자인 이우형씨에 의해 파주 주월리유적과 함께 처음 발견되어 학계에 보고된 바 있다. 특히 삼거리유적에서는 다량의 즐문토기가 채집되어 임진강유역의 신석기시대 문화를 조명하는 데 있어 대표적인 유적으로 주목되어져 왔다. 그러나 금년 여름 또 한 차례의 집중호우가 내리면서 강쪽에 면한 유적 단애면이 노출되었는데, 여기에 여러 기의 신석기시대 주거지가 분포하고 있음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 가운데에는 위석식 노지가 단애면에 그대로 노출된 주거지가 상하로 중복된 채로 발견되어 이에 대한 보존대책이 요망되었다. 이에 경기도박물관에서는 멸실 위기에 처해 있는 문화유적을 보호하고 경기북부지역의 선사시대 문화양상을 파악하기 위한 기초 자료를 확보할 목적으로 긴급 발굴조사를 계획하게 되었다. 이번 조사 지역의 면적은 50여평에 불과하였지만 조사 결과, 신석기시대 주거지 5기와 청동기시대 주거지 4기 및 소형유구 3기 그리고 조선시대의 용도미상의 적석유구 1기를 포함하여 모두 13기의 유구가 조사되었다. 또한 여기에서 출토된 유물은 암사동계의 즐문토기를 비롯하여 청동기시대의 이중구연단사선문토기, 이중구연단사선문공렬토기 등의 토기류와 함께 석검, 반월형석도, 석착, 석부, 석촉, 방추차, 토제어망추, 갈돌, 갈판 등 다량의 유물들이 출토되어 삼거리유적의 편년적 위치와 성격을 파악하는 데 있어 좋은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당초, 조사는 9월 27일부터 20일간 실시할 예정이었으나, 예상보다 확인된 유구의 수가 많을 뿐만 아니라 청동기시대와 신석기시대의 유구가 상하 중복되어 있어 불가피하게 조사 기간이 연장되었다. Ⅱ. 유적의 위치 및 조사 전 상황 1. 유적의 위치 연천 삼거리유적은 행정구역상 경기도 연천군 군남면 삼거리 722-2번지 일대에 위치한다. 전곡읍에서 324번 지방도로를 따라 북서쪽으로 15㎞ 가량 이동하면 군남면사무소가 위치한 삼거리에 이르게 되며, 여기에서 서쪽으로 왕징면 북삼리 방향의 포장도로를 따라가면 임진강가에 도착하게 되는데, 유적은 바로 강을 건너기 전의 좌측 자연제방상에 위치한다(사진 1). 유적의 서쪽 약 200m 지점에는 북에서 남으로 임진강이 흐르는데, 유적 바로 앞에서 약간 곡류하면서 흘러 10㎞ 남쪽의 남계리에서 한탄강과 합류한다. 또한 유적의 동쪽으로는 임진강의 범람으로 인하여 형성된 비옥한 충적평야가 남북으로 넓게 펼쳐져 있어서 취락의 입지조건으로는 최적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유적의 바로 동쪽에는 배후습지가 잘 발달되어 있어서 여기의 어패류가 식생활에 이용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주변의 문화유적으로는 임진강 하류 쪽으로 미산면 무등리와 동이리의 강쪽 낮은 단구상에서 즐문토기편과 함께 무문토기편이 채집되어 삼거리와 유사한 성격의 선사시대 취락지로 추정된다. 2. 조사 전 상황 유적은 남북 800m 길이의 장타원형의 하안단구 지형으로 자연제방의 역할을 하고 있다. 정상부의 높이는 해발 40m 가량이다. 이 지역은 예전부터 섬말(島村)이라 불리웠으며, 현재 목축과 채소재배를 주업으로 하는 여러 채의 농가들이 위치하고 있다. 이 가운데 조사 지역은 북서쪽 끝에 위치한 50여평 내외의 지역이다. 이 지역은 오래 전에 송전탑이 설치되어 있어서 경작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송전탑을 만들면서 여러 곳에 교란부가 무질서하게 형성되어 있었다. 조사지역의 서쪽, 즉 강쪽에 인접한 지역은 단애면을 이루는데 여기에서 여러 기의 유구 단면이 노출되었으며, 북쪽과 남쪽에도 현 지형을 삭토하여 사슴 사육장 및 양돈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조사지역의 동쪽 경사면에는 밭작물이 경작되어 있다. 주민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송전탑이 위치한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은 기계로 경작하였기 때문에 깊은 곳까지 교란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조사지역 남쪽 10m 지점에는 지석묘로 추정되는 상석이 위치하고 있었다고 하여, 본 유적의 청동기시대 주거지와의 관련성이 주목된다. Ⅲ 유적의 층위 및 조사 방법 1. 유적의 층위(사진 2) 발굴지역 서쪽 및 남쪽의 단애면 상에서 확인한 바에 의하면, 유적의 층위는 크게 Ⅲ층으로 구분된다. 표토층인 Ⅰ층은 점토가 뒤섞인 암갈색 사질점토부식층으로 약 10∼20㎝의 두께이다. Ⅱ층은 무문토기 문화층으로 15∼20㎝ 가량의 두께이다. 암갈색 사질점토부식층으로 무문토기편과 함께 즐문토기편이 출토된다. 이 층은 유적 전체에 걸쳐 형성되어 있지 않고 유적의 북쪽 일부에만 퇴적된 상태로 확인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Ⅲ층은 암황색 모래층으로 신석기시대 주거지 상부에 퇴적된 문화층이다. 두께는 약 10∼15㎝ 가량으로 주로 유적의 북쪽에 위치한 신석기시대 주거지 상부에 퇴적되어 있다. 그 아래로는 생토층인 황색 모래층이 형성되어 있는데 두께는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45∼20㎝ 가량이며 밑으로 내려가면서 황갈색 점토층이 형성되어 있다. 지역에 따라 문화층의 유존상태에 있어 차이가 보이는데 유적의 남쪽 부분은 표토층 하에서 바로 황색 모래층이 노출되지만, 북쪽 부분은 청동기시대 문화층과 신석기시대 문화층이 형성되어 있다. 따라서 남쪽 지역에서는 신석기시대 주거지와 청동기시대 주거지가 표토층 하에서 바로 노출되었지만, 북쪽 지역에서는 청동기시대 주거지를 조사하고 신석기시대 문화층을 제토한 이후에 신석기시대 주거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2 조사 방법 유적의 조사는 방격법을 적용하되 조사 면적이 작기 때문에 5m 방안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방안의 방향은 조사과정에서 층위를 효율적으로 파악하기 위하여 하천의 방향과 일치되게 설치하였다. 유구의 확인작업은 5m 방안 내에 2×4.5m의 시굴갱을 동-서 방향으로 설치하여 실시하였으며, 아울러 동-서 방향의 층위 양상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였다. 한편, 유적의 남쪽과 서쪽의 단애면을 정리하여 전반적인 층위 양상과 유구의 분포 상태를 파악하여 향후 조사의 기초자료로 삼을 수 있었다. 유구의 내부조사는 주거지인 경우, 주거지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뚝을 남겨놓고 층위를 파악하면서 하강작업을 실시하였으나, 소형유구는 1/2을 먼저 조사하여 층위를 파악한 다음, 나머지를 조사하였다. Ⅳ 조사내용 1. 유구 현재까지 조사 결과, 신석기시대 주거지 5기, 청동기시대 주거지 4기·소형유구 3기, 기타 조선시대의 용도미상의 적석유구 1기가 확인·조사되었다. 이들 유구들은 작은 범위 내에 밀집 분포하고 있었는데, 특히 동시대의 유구간에도 중복관계가 확인되고 있다. 가령 신석기시대 주거지 가운데에는 2호 주거지 상부를 1호 주거지가 파괴하고 만들어졌으며, 청동기시대 8호 주거지는 9호 주거지를 파괴하고 만들어졌다. 그리고 청동기시대의 2호 및 3호 소형유구는 8, 9호 주거지를 파괴하고 만들어져 동시대 내에서도 유구의 반복적인 점유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신석기시대 주거지의 평면 형태는 대부분이 원형에 가까운 말각방형이며, 규모는 1호 주거지가 가장 큰 것으로 추정되나, 북동쪽 일부만이 남은 상태라 정확한 규모는 파악하기 어렵다. 기타 2호∼5호 주거지들은 현재의 잔존 상태로 보았을 때, 대개 4m 내외의 소형주거지로 판단된다. 주거지 중앙에는 위석식 노지가 설치되어 있는 것이 대부분이며(사진 3), 일부 바닥에는 불처리하거나(5호 주거지) 약간 바닥을 다진 경우도 있으나(4호 주거지), 대부분은 특별히 처리한 흔적이 없다. 기둥구멍은 벽을 따라 분포하는 경우가 일부 확인된다. 이들 주거지들의 폐기 원인은 3호와 5호 주거지만이 화재에 의한 폐기이고 나머지는 화재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다. 한편, 유적의 북동쪽에서 조사된 5호 주거지(사진 4)는 화재로 인해 무너진 상부구조물이 바닥에 양호하게 남아 있어 지붕 구조를 밝히는데 좋은 자료가 될 것으로 판단된다. 일반적으로 삼거리유적의 신석기시대 주거지들은 중복된 1, 2호 주거지를 제외하면, 대부분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배치되어 있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청동기시대의 주거지는 4기가 조사되었지만, 이 가운데 6호 및 7호 주거지는 일부만이 남아 있으며, 8호, 9호 주거지는 서로 중복된 상태로 조사되었다(사진 5). 주거지의 평면형태는 장방형이며, 장축방향은 북서-남동 방향이다. 주거지의 내부에는 노지가 마련되어 있는데 주로 장축 중앙축선상에 배치되어 있다. 8호 주거지에서 2개, 9호 주거지에서 3개가 확인되었는데 모두 땅을 약간 판 형태이다. 노지 바닥면에는 붉은 소토흔이 잘 남아 있다. 기둥구멍은 모래층에 바닥면을 둔 탓인지, 확인이 어려웠는데, 8호, 9호 주거지에서 각각 2개씩 확인되었다. 주거지의 바닥의 처리는 6호와 8호 주거지에서만 확인되었다. 6호 주거지는 모래층 바닥에 황색 점토를 깔고 다진 흔적이 있으며, 8호 주거지는 주로 중앙부의 모래층 바닥을 그대로 다졌다. 주거지의 폐기 원인은 6호와 9호 주거지만이 화재에 의한 폐기이고 나머지는 화재의 흔적이 없다. 8호, 9호 주거지의 중복관계와 각 주거지의 공간적 분포, 그리고 화재 여부를 고려할 때, 6호, 9호 주거지→7호, 8호 주거지 순으로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주거지의 용도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이 7호 주거지이다. 비록 남동부 일부만이 남아 있지만, 여기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적당한 크기로 만들어놓은 석재와 미완성의 석기 제작품, 지석 등이 출토되어 석기제작이 이루어졌던 주거지로 추정된다.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소형유구는 모두 3기가 확인되었지만, 교란에 의해 일부만이 남은 상태라 분명치 않다. 다만 현재의 잔존 상태로 보았을 때, (장)방형으로 추정된다. 이들 유구들은 특별히 용도를 알기 어려운데, 내부에서도 유물이 거의 출토되지 않았다. 2호 소형유구는 8호 주거지를 파괴하고 만들어졌는데, 내부 상부에 소토부가 퇴적되어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조선시대의 용도미상의 적석유구는 청동기시대 주거지인 7호, 9호 주거지와 신석기시대의 1호, 4호 주거지 일부를 파괴하고 만들어졌다. 유구 상부의 내부퇴적층에는 10∼40㎝ 크기의 할석 내지 자연석이 적석되어 있는데, 돌 사이사이에 검은 연기에 의해 그을린 흔적이 남아 있다. 유구의 전체적인 평면형태는 장타원형에 가까운데, 내부에는 3개의 기둥구멍이 확인된다. 2. 유물 삼거리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은 토기류, 석기류, 기타 토제품 등이 있다. 신석기시대 주거지에서 출토된 즐문토기는 암사동유적에서 출토된 것과 비교할 때, 큰 차이가 보이지 않아 동일 토기 문화권을 형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토기는 정선된 사질성 태토로 만들었으나, 극히 일부는 무문토기와 같은 점토질 태토로 성형한 것도 있다. 저부의 형태는 대부분이 원저이며, 일부 소형토기에 있어서는 말각평저도 보이고 있다. 문양은 구연부에 단사선문을 시문하고 동체부에는 종주어골문이 시문된 것이 주류를 이룬다. 특히 토기 전면에 문양이 시문되어 있어 삼거리 즐문토기의 편년적 위치를 가름하는데 용이하다. 석기류로는 소량이 출토되었을 뿐인데, 2호, 4호 주거지에서 갈판이 출토되었으며, 5호 주거지에서 숫돌이 출토되었다. 기타 석기를 가공하기 위한 석재와 더불어 미가공의 석기들과 석제어망추가 출토되었다. 청동기시대 주거지에서 출토된 무문토기로는 이중구연단사선문토기, 이중구연단사선문공렬토기(사진 6), 갈색마연장경호, 환형파수부토기, 심발형토기(사진 7), 호형토기 등이 있다. 특히 9호 주거지에서는 4∼5개체분의 토기들이 그대로 바닥에 깨진 채로 노출되어 있었다(사진 8). 기타 유일하게 홍도 구연부편이 3호 소형유구에서 출토되었다. 삼거리 청동기시대 토기의 특징이라 한다면, 가락리식토기 계통이 주류이면서 새로이 공렬토기 유형이 가미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공렬토기의 투공수법을 보면, 밖에서 안으로 완전투공하고 있어 한강유역의 투공수법과는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석기류(사진 9)는 8호 주거지에서 마제석검 1점, 반월형석도 3점과 함께 갈돌, 석부, 지석, 석촉 등이 출토되었으며, 9호 주거지에서는 갈돌, 갈판이 셋트로 출토되었으며, 기 타 반월형석도, 석창, 석제방추차가 출토되었다. 또한 7호 주거지에서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각종의 미완성 석기와 함께 지석, 석착 등이 출토되었다. 마제석검은 검신이 부러진 상태로 바닥에서 출토되었는데, 형태상 鳳山 御水區에서 출토된 마제석검과 유사하다. 검신부에 血溝가 마련되어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석촉은 대부분이 삼각만입촉 내지 이단경촉으로 중부지방의 일반적인 석촉의 형태이다. 기타 토제품으로는 방추차편과 함께 소형의 어망추가 출토되었을 뿐이다. Ⅴ 조사성과 및 의의 이번 연천 삼거리유적의 긴급발굴조사에서 얻은 성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삼거리유적의 신석기시대 주거지는 경기북부지방에서 처음으로 조사되었을 뿐만 아니라 50여평이라는 좁은 범위내에서 주거지들이 조밀하게 분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중부지방의 신석기 문화 연구는 암사동, 미사리유적을 중심으로 한 한강유역권과 오이도패총을 중심으로 한 서해도서권에 집중되어 그나마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지만, 경기 북부 특히 임진강유역의 신석기문화에 대한 연구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무엇보다도 이 지역에서 즐문토기는 채집되었지만, 유적의 조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던 사정에 기인한다. 따라서 앞으로 이 지역의 신석기 문화의 계통과 편년적 위치를 파악하는데 있어 표준적인 유적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둘째로, 신석기시대 5호 주거지에 노출된 탄화목재는 주거지의 상부구조를 복원하는데 있어 획기적인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지금까지 조사된 신석기시대 주거지 가운데 화재주거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5호 주거지와 같이 상부구조물이 그대로 주저앉은 채로 발견된 예는 별로 없었다. 따라서 신석기시대 주거지의 복원은 대체로 건축학적인 상식과 더불어 기둥구멍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사정을 염두에 둘 때, 5호 주거지 목탄의 분포 양상은 신석기 주거지 복원에 실증적인 자료가 될 것으로 판단된다. 셋째로, 삼거리 청동기시대 주거지에서 출토된 유물의 성격으로 보았을 때, 다분히 황해도 지역의 각형토기 문화권과의 관련성을 짐작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가락리유형에서 흔암리유형으로의 변화를 살펴보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믿어진다.
twitter facebook me2day 요즘
617개(28/31페이지)
 
현장소식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수
등록일
77 광양 용강리 유적 현장설명회(3/30) 운영자 763 2001.05.21
76 늑도유적 현장 설명회(12/1) 운영자 746 2001.05.21
75 충북 옥천 신석기시대 집자리 현장설명회(8/21) 운영자 834 2001.05.21
74 용담댐 3차 문화유적 발굴조사 현장설명회 및 지도위원회의 안내(6/2) 운영자 694 2001.05.21
73 경주 城東洞 북문로(A지역) 228-4번지 일대 발굴조사 운영자 2575 2001.05.17
72 대전 대정동유적 운영자 2217 2001.05.16
71 석장동고분군 운영자 2282 2001.05.11
>> 연천 삼거리유적 운영자 2743 2001.05.08
69 고성 내산리고분군 운영자 1880 2001.05.08
68 부산 기장경마장 건립부지유적 운영자 2162 2001.05.08
67 강화도 국방유적 운영자 2430 2001.05.08
66 대곡댐사업 편입부지내 문화유적 운영자 2069 2001.05.08
65 경주경마장예정부지내 문화유적(A지역) 운영자 2457 2001.05.08
64 포항시 남구 원동 토지구획정리 제2지구내 문화유적 운영자 1985 2001.05.08
63 몽골 모린톨고이유적 운영자 1963 2001.05.08
62 경주 황성동 강변로 개설구간내 유적 운영자 2312 2001.05.08
61 밀양 사촌제철유적 운영자 2259 2001.05.08
60 포항시 원동토지구획정리 제3지구내 문화유적 운영자 1899 2001.05.08
59 부산 연산동고분군 운영자 1913 2001.05.08
58 여주 고달사지 운영자 1986 2001.05.08